탈북자 출신 이명애 시인의 증언-1부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2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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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출신 이명애 시인의 증언-1부 탈북자 출신 시인 ‘이명애 시집’.
/RFA Photo

왜 탈북인으로 시를 썼을까? 하고 여쭤보니 남한과 북한에서 살면서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려줘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사이버 대학에 등록해 북한에서 하지 못한 대학을 다니며, 시를 쓰는 시인으로 활동하게 됐다고 이명애 씨가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이 씨는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연장전’ 제목의 시에서 한국도 응원하고 북한도 응원하지만 다만 북한 선수들은 지고 돌아가면 사상투쟁의 무대에 서게 될 걱정에 북한 응원도 하는 시를 썼다고 들려줬습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망명 북한펜센터 회원이며, 탈북자 시인 이명애 시인의 남한 삶의 현장 이야기로 함께 합니다.

자신이 어떤 분인지 소개 부탁합니다.

이명애: 2005년도에 탈북했고요. 2006년도에 대한민국의 입국했어요. 여기는 저의 아들딸과 같이 오고 오빠 한 분이 가족들하고 계세요. 그리고 이북에는 아버님은 제가 한국 오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살아계셨는데 아직 소식을 모르죠. 언니도 있고 동생 둘이 있어요.

북한에선 어떤 일을 하셨나요

이명애: 북한에서, 제가 유치원 교사를 했어요. 여기는 교사라고 하지만 거기서는 교양원이라고 하거든요. 유치원 교양원을 출가하기 전까지 하다가 출가해서도 좀 했지요. 아이들 낳고 일을 못 하고 있다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아 그다음에는 장사해서 벌어 먹고살다 온 거지요.

남한에 와 사이버 대학에 다니게 됐다고요.

이명애: 예. 그럼요 저는 “시”라고는 접해본 적이 없거든요. 북한에서도요. 남한에 와서도 그렇고요. 그런데 제가 사이버대학에서 맹목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사이버 대학은 일하면서도 공부할 수 있으니까, 사이버 대학을 들어갔는데 거기 들어가서 공부하다 보니까 방송문예창작과가 있는 걸 알게 됐어요. 거기서 소설 작법이나 시 작법이나 창작, 어쩌든 이런 문학에 관한 강의 하는 것을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취미였다고나 할까 그래 어쩌든 그 강의를 듣기 시작했거든요. 그래 듣다 보니까 또 방송문예창작과 학과장님의 수업을 듣다 보니까 시 문학을 공부하게 됐지요. 접하게 됐지요. 그때부터 교수님이 내주는 과제물로 시를 한 편 두 편 쓰던 게, 그다음 강의를 듣다 보니까 교수님에게 이런저런 도움말도 듣고 또 교수님이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내가 재능이 있나! 생각 들어서 그다음부터 써보기 시작했죠.

북한에서도 대학에 다녔습니까?

이명애: 아니요. 저는 북한에서는 대학을 못 나왔지요. 전공이라는 게 없지요. 북한에서 대학을 나와야 전공이라는 게 있지요. 그냥 유치원 교사는 그냥 뭐야 북한에서는 유치원 교사라는 직업은 비중을 높게 보지 않아요. 본래 대학교를 졸업해야만 교사 자격증이 주어지는 데 농촌이나 이런 지방에는 교사들이 많이 부족하니까 굳이 대학교 안 나와도 교원도 그렇고 유치원 교사도 양성기관이 있거든요, 이런 양성기관서 1년 동안 수료하고 자격증은 안 줘요. 수료하고 교양원을 하면서 한 3년 동안 일을 하고 재교육이라는 과정이 있는데 재교육을 받게 되면 그때 자격증을 주거든요. 그래서 그런 과정을 거쳐서 저도 유치원 교사가 됐거든요. 그러니까 뭐 전문 대학을 나온 게 아니니까 전공이라는 걸 가져보지 않았지요.

지금까지 몇 편의 시를 썼습니까?

이명애: 시는 총 써 놓은 것은 한 100편 정도 되는데요. 이번에 시집에 발표한 것은 70편 정도 됐죠. 그리고 아직도 한 미완성 작품이 30여 편 되지요.

남한에서 이렇게 많은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이명애: 저는 북한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니까 북한에 대한 ‘시’를 많이 썼죠. 남한에 정착하다 보니까 제가 이 시를 쓰게 된 것도,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됐냐에 대답을 못 했는데, 저의 학과장님이 시인이시고 문학평론가이시거든요. 그분이 제 시를 보더니, (제가 쓴 시가 내가 봐도 한심했거든요. 시라기보다 그냥 북한의 있는 사실을 그저 적어 놨다뿐이지, 이게 시라고 평가받을만한 것도 아닌데,) 교수님이 이런 탈북 시인들이 많이 나와야지, 이건 너무 귀한 문학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너무 귀한 인재들이다. 이때까지 남북한이 닫고 살았으니까 남한에서 북한 문학을 전혀 모르잖아요. 탈북자들이 와 시를 쓰니까 너무 생동감 있고, 신선하다고, 지금 남한의 시는 너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이제 남한의 시는 아직도 남한 시인들의 시는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 저 스스로는 풀이를 할 수가 없더라고요. 교수님이 제 하찮은 작품을 보고는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시니까? 아 진짜 내가 쓰긴 써야겠다. 그러지 않아도 저도 시 쓰려고 마음 먹은 것은 정착하다 보니까 남한 사람들한테, 남한분들이 아니 북한에도 사람 사는 곳인데, 거기도 사람 살만하지 않느냐 왜 여기까지 타향에 와서 고생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는데 이 고생을 하냐!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북한에 대해서 너무 모르니까 이걸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글을 쓰긴 써야겠다. 글로 써서 많이 알려야지 한마디로 아무리 떠들어도 이해를 못 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머리에 딱 들더라고요.

펜클럽 회원들 반응도 있었나요.

이명애: 펜클럽 회원이라고 해도 다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일 년에 한두 번 전화상으로나 얘기하지 자주 모이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한 분이 시집을 읽어 보고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시집 잘 읽었다고, 그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느냐고 자기는 다 잊어먹고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는데 어떻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느냐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글쎄요. 저도 글을 쓰려고 하니까 그 일이 그냥 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쓰기 시작한 거지요.

100여 편의 시 가운데 ‘연장전’은 어떤 내용이 담겼습니까?

이명애: 남한이 좋아서 왔잖아요. 그러니까 우선 남한이 이겨야 하겠다. 생각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북한도 우리 같은 고향 사람들인데 제들도 이겨야 하는데 남한에 쟤들은 지면 북한 가서 처분이 간단치 않은데 이런 걱정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한도 응원했다. 북한도 응원했다. 저의 심정을 그대로 쓴 거예요. 남한이 이겨서 좋은데 북한이 졌으니까 저 사람들은 가면 어떻게 처벌을 받겠나 걱정이 들고,

고향에 가면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이명애: 만나고 싶은 사람이야 너무 많지요. 그걸 뭐 매일 매일 꿈에서도 그냥, 꿈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일하러 가도 뜬금없이 뉴스 듣다가 무슨 얘기 나오면 그냥 떠오르는 게 북한 사람들이거든요.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제자매, 동창생들, 우리 동창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친구는 어떻게 변했을까? 나는 그래도 남한에 와서 이렇게 잘 먹고 잘사니까? 친구들은 엄청나게 늙었겠지, 얼굴에 주름살도 많이 생겼겠지, 시도 때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통일돼서 북한에 가게 되면 우리 동창들 다 모아놓고 잔치 한번 벌이려는 생각도 하고요.

RFA 초대석 오늘은 망명 북한펜센터 회원이며, 탈북자 시인 이명애 시인의 남한 삶의 현장 이야기로 함께 했습니다.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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