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간 국군포로들의 인권과 비극에 대해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져주길 호소하러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고 한국의 6.25 국군포로유족회 손명화 대표가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손 대표는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 1-2명이라도 구출하도록 국제 인권단체가 적극 협력해 주길 호소했습니다. 손명화 씨는 지난 7일 유엔 인권 이사회 산하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 담당자와 국군포로의 북한 구금 사실과 국군포로의 인권문제에 대해 전화 회견했으며, 오는 13일 국군포로 인권문제로 국제회의가 소집될 것이라며 9일 오전 손명화 대표가 자유아시아방송에 전했습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6.25 국군포로유족회 손명화 대표로부터 국군포로들이 북한에서 인권 사각지대에서 살았던 이야기 전해 듣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포로로 북한에 끌려가 북한에서 사망한 국군포로 손동식 이등 중사 즉 손명화 씨의 아버지 이야기 들려주세요.
손명화: 저희 아버지는 6.25 전쟁 중 53년 5월 26일 포로가 됐어요. 강동 포로수용소에 29명 마지막 포로가 됐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 고향이 경상남도 김해지만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남쪽 끝에서 태어나서 함경북도 무산으로 가다 나니까 한반도의 끝에서 끝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6.25 전쟁의 3년 동안 전쟁에 참여 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북한에서는 국군포로라 하면, 괴뢰군 포로 43호에서 아버지는 1등급 포로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1등급이라 하면 급수가 높지만, 북한은 1등급이면 죽을 때까지 이 사람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그런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전깃불을 못 본 사람입니다.
아버지, 국군포로 손동식 이등 중사가 북한 무산광산에서 살았던 이야기해 주시지요.
손명화: 무산광산에서 51살에 폐암에 걸리니까 광산에 동발을 생산하는 심신 산골에, 한 70리 들어가 있는 그런 곳간에 아버지를 처넣고 아버지는 콘크리트 바닥에, 온돌방에서도 못 살고 진흙을 다려서 그 위에다가 비닐 방막 깔고, 가마니를 깔고 기틀집 같은데 통나무 그런 집을 진흙으로 발라서 전깃불도 없는 데서 평생 아버지가 살다가 9년 동안 거기서 정말 우리가 TV에 나오는 노예 같은 그런 인생을 살다가 눈을 감기 전에 열흘 전에 집에 돌아왔어요. 이제는 더 이상 부려 먹지 못하겠구나! 하고 집으로 보냈어요. 그래 집에 와서 열흘 동안 전깃불을 봤다 하는 것도, 아버지는 아 이 전깃불을 보니까 정신이 깜빡깜빡 들어갔다 나갔다 할 적에는 정신이 나갈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정신이 돌아와서는 이게 전깃불이냐! 전깃불을 보니까 살 것 같다고! 이렇게 하다가 전기불마저도 10일 동안 보다가 아버지는 눈을 감았어요.
손동식 이등 중사의 6.25 때 참전한 이야기
손명화: 아버지가 저한테 이야기한 것은 국군에 입대할 때는 낙동강 전투에서 입대했고, 아버지가 한미연합군에 국군으로 입대했고, 휴전을 앞에 두고 281고지에는 장교가 없었데요. 이등 중사 4명이 그 부대를 인솔하면서 전투를 했는데 그 고지를 16번 뺏기고 찾고 뺏기고 찾고 했는데 그 전투에서는 총알이 다 떨어져서 마지막에는 육박전을 벌였던 이야기를 아버지는 거기에서 내가 죽었더라면 아마 이 세상에 내가 없었을 거다 거기서 그래도 살아서 포로된 것도 억울하다고 281 전투에 대한 걸 이야기하셨어요.
북한에서 사망한 국군포로 손동식 이등 중사가 마지막 유언은 고향 땅에 묻어 달라고 하셨다고요.
손명화: 아버지는 눈을 감기 열흘 전에야 할아버지 이름 할머니 이름 그리고 형님들의 이름을 다 알려주면서, 아버지 군번이 K라는 것만 아버지가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우리 아버지 군번이 K 다 했더니 맞더라고요. 아버지는 그것만은 기억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눈을 감기 전, 열흘 전에 내가 죽으면 내 묘라도 파서, 네가 둘러 매고서라도 아버지 고향에 가라, 가서 아버지 고향에 묻어달라고…그러니까 그처럼 보고 싶어 하고 그처럼 보고 싶었던 조국이니까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어달라는…
6.25국군포로유족회 회원들의 아버지, 국군포로들의 이야기 전해 주세요.
손명화: 저 하나뿐이 아닌 국군포로 우리 회원이 110가족입니다. 110 가족 중에서 정치범으로 잡혀간 사람, 그다음에는 총살당한 사람, 아버지들이 삶은 다 다르지만, 총살당한 사람들은 국군포로 시체가 어디 매가 있는지도 모르고 정치범에 잡혀간 사람들도 그 시체가 어디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내 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유해라도 대한민국에 안장된 것만 해도 내가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드렸지 안나 생각합니다. 회원들 한 분 한 분을 보면 아버지들 눈을 감을 때 대체로 다 그처럼 오고 싶었고, 그처럼 보고 싶어서 딱 부모형제를 한 번만 보고 싶어서 대한민국 땅을 한 번만 밟아봤으면 좋겠다. 죽으면 유해를 다 한국에다가 너희들이 둘러메고 가라고, 가서 아버지 고향에 묻어달라고 저의 하나의 유언이 아닌 전체 회원들의 아버지들이 눈을 감을 적에 너무나 억울해서 유언을 다 남겼습니다.
미국에 국군포로의 비극을 알리러 오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손명화: 국군포로 숫자를 보면 우리는 200명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국군포로 말을 하면은 정부가 민감한 부분이 있습니다. 국군포로의 말을 한다면 정부는 덮으려고 하기 때문에, 안 되겠다. 이제는 국군포로 억울한 삶, 국군포로 인권에 대해서, 북한에서 어떻게 총살당했고, 북한에서 국군포로가 죽었다 하면 시체가 유기되고, 이런 사연들을 국군포로의 인권은 어디에 있었느냐! 왜 정부가 민감해하는 부분, 왜 정부가 이걸 덮으려 하는지 이 부분에 대해서 이제는 아무래도 국제사회에 나가서 알려야 되겠다. 10년 동안을 발버둥 해도 들어줄 때 없기 때문에 이번에 국제사회에 알리고 싶어서 미국에 왔습니다.
생존 국군포로 구출에 국제 인권단체가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길 바라신다고요.
손명화: 한 3년 전에 생존국군포로가 9명이 있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1년에 국군포로가 4분, 5분 정도가 돌아가셨습니다. 국군포로 생사확인은 몇 명이 있다는 걸 정확히 모릅니다. 저는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만큼 우리 단체라도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모든 민간단체, 사회단체와 협력해서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는 1-2명 정도 있을 것 같아 그 사람들을 구출해 오고, 또 우리 회원들은 아버지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압니다. 그처럼 고향에 오고 싶어 했던 조국에, 1년에 한, 두 분의 유해를 모셔 드리고 싶다. 그래야만 그들이 원한을 갚아 드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고, 대한민국에다가 국군포로 추모비를 하나 세워주자고 호소합니다.
아버지 유해를 갖고 탈북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손명화: 아버지 유해를 대전 현충원에 안장했고요. 저는 아버지 유해와 형제 산 사람 3명과 바꿨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아버지 유해를 모셔 오면서 언론에 가족 이야기기 나오다 보니까 북한에서 보위부가 저 오빠, 제 여동생, 조카 이 세 명, 살아 있는 사람을, 정치범 수용소에 다 가뒀습니다. 그래서 제가 산 사람 3명하고 죽은 아버지 유해하고, 유해 한 구하고 산 사람 3명을 바꾼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아마 제가 여기까지 이 일을 손에 넣을 수 없어서 여기까지 왔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탈북해 남한에 와 계시는 국군포로들 근황도 들려주세요.
손명화: 우리 단체에 다 소속되어 있습니다. 국군포로들 18분 밖에 없습니다. 다 돌아가시고요. 80분 중에서 18분 밖에 없습니다. 그 18분 중에서도 걸음 걸을 수 있는 사람은 8분 밖에 없고, 나머지 분들은 다 몸이 아파서 누워 계십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6.25 국군포로유족회 손명화 대표로부터 국군포로들이 북한에서 인권 사각지대에서 살았던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