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회령 전거리교화소 수용자 출신 김나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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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북한의 인권유린 실태를 조사하고 집계해 보고서를 내고 있는 한국의 민간 인권단체가 있습니다. 북한인권정보센터입니다. 이 보고서들은 북한인권기록보존소에 저장관리되며 북한의 반인도범죄의 자료로 유엔에 제출됩니다. 이 단체에서 6월 말, 정치범수용소보다 더 지독한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다는 회령 전거리 제 12호 교화소의 실태를 담은 보고서를 펴냈습니다. 전거리 교화소 출신 탈북자 80여명의 실화를 토대로 작성한 것인데요, 이 가운데 여성수용자 김나윤씨가 있습니다.
2007년 비법월경죄로 교화소에 잡혀 들어가 지옥 같은 2년의 형기를 마치고 2009년7월 다시 탈북해 한국행에 성공한 김씨. 이제 한국 정착, 만 3년이 됐습니다.
현재 충청남도 대전에서 한 아기의 엄마로,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김나윤씨와 함께
그가 최근에 쓴 전거리 교화소 수기 '얼의 몸부림'에 관해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전수일: 2006년 4월 중국 공안에 잡혀 강제 북송돼 2007년 3월 결국 회령 전거리 교화소에 들어가셨는데 수감될 때까지 거의 1년이나 걸렸습니다. 거친 곳도 여러군데 였구요.

중국 변방대- 온성보위부- 보안서-구류장- 교화소로. 탈북해 강제북송 당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잘 모를 것 같은데, 좀 설명해 주시죠. 우선 변방대로 가셨다고 했죠?

김나윤: 네. 중국에서 처음 잡히면 중국변방구류소라는데로 가는데 거기서 제가 한 100일 정도 있었습니다.

전: 그 다음에는 온성에 있는 보위부로?

김: 네. 북송되어서 온성으로 보내지면 제일 먼저 거치는 곳이 온성 보위부입니다. 보위부에서 1차 심사를 하고 그 다음에 보안서로 갑니다.

전: 그 다음에는 단련대도 거치셨죠?

김: 네. 보안서에서 심사가 끝나면 자기 관할지역 단련대로 보냅니다.

전: 그 다음에는 도 집결소로 간다구요?

김: 네. 거기도 온성 단련대와 비슷한 곳입니다. 집결소는 범위가 큽니다. 거기서도 강제 노동을 시킵니다.

전: 그 다음 구역 보안서로 갔다가 다시 구류장으로 가시더라구요.

김: 구역 보안서 안에 구류장이 있습니다. 거기 가면 그때부터 심사가 시작되는 겁니다. 자기 구역내에서. 서울이라고 한다면 그 안의 어떤 구 안에 경찰서가 있지 않아요? 양천구라고 하면 양천구 경찰서에서 담당해 심사를 하는 겁니다. 그 심사를 하는 동안에 구류장에 있는 겁니다.

전: 구류장에 있으면서도 노동을 해야 합니까?

김: 아니요. 거기서는 노동을 안 시켜요. 조그만 감방에 앉혀 놓고 심사만 합니다.

전: 그 다음에 전거리 교화소로 가시게 된거죠?

김: 네. 거기에서 심사를 받고 재판이 끝나면 교화소로 보냅니다.

전: 교화소에 가셨을 때 그 감방안에 22명의 수감자가 있었는데 그중 80퍼센트가 비법월경죄로 수용이 됐다고 썼습니다. 10명 중에 8명꼴로 모두 비법월경이란 것인데 그렇게 비법월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김: 네 많았어요. 국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한 집에 거의 한명씩 넘어 갔다고 보면 됩니다.

전: 그러니까 먹을 걸 구하려고 도강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군요.

김: 네. 그 당시는 그렇게 많았어요.

전: 그 교화소 내에서 어려운 것은 많았지만 그 중에도 먹을 것 때문에 받는 고통에 대해 많이 썼습니다. 수기 일부 내용을 인용하면 “교화 생활에서 먹는 신경은 절대 독약이다… 하지만 주린 창자 어쩔 수 없는 사람은 도주하고 농작물 훔치고 독장처벌 받고 낙후자반에 들어가 일하다 그대로 죽기도 한다…규정된 밥 양은 비록 적은 양은 아니지만 규정일뿐 정량이 차려질 때가 없다. 수용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배고픔에 시달린다.”

수용자로서 얼마나 배가 고팠습니까?

김: 일단은 거기서 주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준다는 게 하루 세끼 밥하고 염장국을 끓여 주는데 건더기는 거의 없습니다. 그저 물에 말아 먹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양배추 껍데기만 썰어서 줄 때도 있습니다. 강제노동은 버겁도록 시키는데 먹는 건 옥수수를 찧지도 않고 이삭 그대로 돌이 섞이든 유리가 섞이든 상관없이 물을 부어 증기밥으로 하거든요. 그래서 ‘단지’를 찍어서 한 사람에게 한덩어리씩 주는데 원래 국가 규정은 1인당 430그람이에요. 그런데 저희들에게 차려지는 건 330그람정도? 하루에 그렇게 밖에 안차려집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배고픔에 시달리는 거죠.

전: 하루에 강제 노동은 몇시간이나 합니까?

김: 겨울에는 아침 7시 반에 출력해서 저녁 6시정도 어두워지면 들어옵니다. 거의 12시간 일합니다. 여름에는 아침 5시반이나 6시에 나가면 저녁 8시 9시쯤에 들어옵니다. 여름에는 12시간 넘게 길게 일합니다.

전: 그걸 먹고는 몸을 추스리거나 견디기가 어렵겠네요?

김: 어렵죠. 일 자체도 강제노동에 중노동이거든요. 기계로 하는일은 거의 없고 사람이 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 또 수기에는-면회자들이 먹다 남은 음식은 군견 몫이었다? 사람이 개보다 못했다.” 고 했는데 무슨 얘깁니까?

김: 당시 가족의 면회를 3개월에 한번씩 시켜줬는데 가족이 면회를 오면 밥을 싸 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더 먹이겠다고 많이 싸 오는데 수감자들은 너무도 먹지 못해 속이 비어있다 보니 한꺼번에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밖에 못 먹고 음식이 남습니다. 그런데 남는 음식을 감방에 들어가서 먹으려면 때리고 못 먹게 합니다. 몰래 감추고 가지고 들어가다 걸리면 독방 처벌을 받지요. 간수들은 수감자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그곳 군견에게 다 줘 버립니다.

전: 그걸 가지고 들어가 먹기도 하고 동료 수용자들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좋을 텐데?

김: 그러니까요. 그렇게도 못하게 해요.

전: ‘수용자들은 배 고파, 소와 염소가 싼 똥, 배설물 속에 남은 콩알을 주워서 먹는 지경’이었다고 하던데?

김: 네. 그랬어요.

전: 그만큼 배가 고팠다는 얘기군요. 그런데 ‘쥐고기도 불에 구으니 별맛이다’라고 쓰셨는데 정말인가요?

김: 네. 쥐고기 굽는 냄새가 얼마나 구수한 지 몰라요.

전: 쥐는 어떻게 잡습니까?

김: 돌로 때려 잡거나 몽둥이로 잡습니다.

전: 근데 교화소에서 쥐를 잡아서 구워먹게 합니까?

김: 교화소에서는 잡아 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구실을 댑니다. 허약한 수감자를 먹인다고 하기도 하고. 그런 구실을 대고 잡아 먹었어요.

전; 그런데 김나윤씨가 거기 조장일 때 죽도록 맞고 3일간 처벌밥을 먹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처벌밥은 정량의 절반밖에 되지않는 벌칙 밥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일이 일어났었는지 설명해 주시죠.

김: 제가 조장을 할 때 조원이 잘못을 했어요. 제가 관리하는 애가 잘못을 했어요. 그때 제가 남새반에서 일 했는데 그 애가 남새를 훔쳤어요. 고추따기를 할 때 고추를 훔쳐 들어와서 감방에 있는 다른 애 하고 펑펑이 면식가루와 바꿔 먹다가 동료가 고자질 해서 들켰어요. 그래서 제가 조원들 관리를 제대로 안했다고 해서 매맞고 처벌을 받았어요.

전: 처벌받고 처벌밥을 먹었을 테니 그 굶주림은 말 할 수 없었겠네요?

김: 그랬어요. 배고프지만 그렇다고 말도 못하고.

전: 그런데 “추운겨울 단벌로 입소한 수용자들, 그 옷마저 압수해 제대로 입을 게 없었다.”고 적으셨는데 수용자들에게 주는 옷이 그렇게 없었습니까?

김: 수용자들에게 주는 옷이 처음에는 있었어요. 그것도 겨울 것 밖에는 안 줬어요. 여름에는 수용자들이 입고 들어온 옷을 수선해서 입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수용자 인원이 너무 불어나니까 겨울 작업복도 주지 않았습니다. 먼저 수용되었던 사람들의 옷을 물려 입게 했었습니다.

전: 교화생활 8개월만에 구내반 담당 반장이 되셨다는데 그 구내반에는 18세부터 70세 노인까지 한 반에서 생활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와 손녀 간의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들을 한번에 수용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는 반원들이 남의 물건 훔치기, 바꿈질, 힘센자가 약자 부려먹기, 이간질, 스파이 짓도 한다고 했는데 반장으로서 반원들의 인간관계를 관리하기가 힘들지 않았습니까?

김: 힘들죠. 조장할 때보다 반장할 때가 정신적으로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반장을 이용자라고 합니다. 교화소 보안원들이 우리 수용자들을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이용자라고 하는데 반장의 임무는 보안원들의 마음에 들도록 반원들의 언행 모든 걸 시시콜콜 다 보고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 다 일러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다. 수용자 모두가 같은 처지인데. 그래서 어지간 한 일이면 묵과하고 보고를 하지 않는데 그러면 반원 중 다른 사람이 선생(지도원)한테 반장이 알고 있으면서도 얘기를 안 한다고 일러 바칩니다. 지도원은 그러면 반장이 묵인하고 감싸고 얘기를 안 한다면서 욕설하고 때리고 벌을 줍니다. 그래서 지도원과 반원 가운데서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전: 그런데 ‘교화소에서는 동정이 함정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감자를 숨겨온 것을 고발한 배신자가 있었다는데 김나윤씨의 반장 자리를 노리던 수용자라고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반장 자리를 노리거나 배고픔을 피하려고 동료들을 팔아먹는 스파이 고발자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까?

김: 네. 그렇습니다.

전: 수용자들의 범죄유형 즉 죄목도 다양한 것 같습니다. 살인, 살인미수, 사기협작, 도둑질, 비법월경, 인신매매…그런데 그 중에서도 한국 씨디를 보다가 적발돼 들어온 사람도 있다고 해요.

김: 네, 있어요.

전: 그러니까 한국의 드라마라든가 음악등이 들어있는 씨디를 보다가 적발된 사람들인가요?

김: 네.

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됐습니까?

김: 그런 애들이 몇 명 있었어요.

전: 국경에서 손전화를 사용하다 걸려 들어 온 사람도 있다고 하셨어요.

김: 네.

전: 회령이 국경지역이다 보니 거기서 손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죠?

김: 네. 무산 온성 회령 혜산 지역에서는 우리처럼 한국에 들어 온 탈북자들이 가족들과 통화를 하도록 도와주는 브로커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휴대폰을 북한 가족들이 국경에서 사용할 수 있거든요. 근데 북한에는 전자파를 잡는 기계가 있어요. 그래서 전화를 하다가 잡히면 무조건 교화소로 보냅니다.

전: 그런데 또 한국 라디오 방송 듣다가 잡혀온 사람들도 있다고 쓰셨어요.

김: 네.

전: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게 불법이지만 그래도 방송을 듣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죠?

김: 네. 있더라구요. 제가 북한에 살 때는 없었는데 북송 당해 보니 그 몇 년 사이에 한국 씨디와 비데오가 들어가고 라디오로 한국 방송을 듣더라구요.

전: 교화생활이 너무 힘들어 고의적으로 병을 만들어 죽는 사람도 있었다는 끔찍한 얘기도 있던데요.

김: 몸이 허약하거나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은 교화소 생활이 하도 힘이 드니까 낙심하죠. 자신들은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어차피 죽을 바에야 빨리 죽고 싶다고. 먹으면 안될 음식 쓰레기나 쇠줄 같은 것을 먹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면 약도 없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왜냐면 병원에 입원하면 밥도 조금만 줍니다. 우리가 먹는 밥의 절반 만한 밥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 다고. 그렇게 먹으면 점점 몸이 망가지면서 결국 죽는 거에요.

전: 그런데 제가 수기를 읽으면서 더 놀란 것은 배고픔도 어려웠지만 더 어려운 것은 물사정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물이 없어서 아주 고통스러웠다고 적으셨는데 어떤 인신매매범 아줌마는 힘들게 갖고 온 물을 감방 안에서 잃어버려 결국 ‘대못을 삼켜’ 앓다가 열흘만에 죽었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얘깁니까?

김: 물이 너무 없다보니 밖에 나가서 일하고 들어 올 때마다 조그만 물통에 물을 담아 가져옵니다. 근데 결국에는 그 여자가 밤에 그 물을 잃어버려서 물 때문에 감방 안의 동료 수감자와 싸웠습니다. 싸워서 또 처벌을 받게 됐는데 처벌밥을 며칠 먹다가 너무 힘이 들어 작업 나갔다가 작업실 안에 있던 못을 삼킨 겁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일주일인가 열흘만에 죽었어요.

전: 그런데 교화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있다고 했는데 그 물을 끌어 들이면 될텐데 왜 물이 모자랍니까?

김: 물을 끌어 오면 되는데 전기사정 때문에 그랬죠. 물을 충분히 끌어 올릴 수가 없는 거지요. 여름에는 그마나 괜찮은데 겨울이면 강이 다 얼어버리니까 밥할 물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달구지에 물통을 싣고 끌고가서 얼음을 까서 구명을 내어 물을 길어 오곤했습니다. 그걸로 밥을 겨우 해 먹곤 했는데 몸을 씻을 물은 더욱 없었습니다. 여자에게 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전: 근데 교화소 초기에는 20-30명 정도였던 감방이 교화소를 나오실 때쯤에는 21평짜리 감방 안에 수용자가 140에서 150명이었다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설 자리도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수용합니까?

김: 그러니까요. 날마다 싸우고 처벌받고 그런 일이 되풀이 되지요.

전: 교화소에서 여자용 교화소를 증축하지 않았습니까?

김: 제가 2009년 교화소를 나올 때 짓기 시작했어요. 아마 지금은 다 지었을 거에요.

전: 김나윤씨는 여자 교화소가 처음 전거리 교화소에 생겼을 때 수용되셨다는데
남자들이 쓰던 방을 사용하다 보니 여자 수용자들의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죠?

김: 그렇죠. 처음 들어가서는 남자들이 사용하던 감방을 쓰고 교화소 한 가운데 있는 우물을 남자들과 같이 썼어요. 그러다 보니 여자들은 목욕할 형편도 안되고요. 몰래 숨어서 몸을 닦으면 남자들이 훔쳐 보고. 그러다가 지도원들에게 들키면 그 남자들은 죽도록 매맞고 처벌받고. 서로 안 좋은 거에요.

전: 그런데 2007년 3월 입소해 2009년 4월 2년 만에 교화소 수용생활을 끝내고 출소하셨습니다. 그런데 북한사회에서는 “주민증도 제대로 발급해 주지 않았고, 나를 받아주겠다는 회사도 없었다. 그 이유는 한 번 도강한 사람은 또 도강할 터이니 그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다가 죽더라고 다시 도강해야 한다” 고 결심을 하셨다는데 한 번 비법월경죄로 교화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겠네요?

김: 없어요.

전: 그러니까 다시 도강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김: 그렇죠. 그러니까 교화소를 한 번 갔다 온 사람들은 거의 다시 중국으로 탈북해요.

전: 그러니까 악순환이네요.

김: 악순환이죠. 그러니까 형기도 길어져요. 풀어줘 봤자 또 도강할 테니까요. 이제는 형기도 5년 이상이에요. 그때는 3년이 최고형이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5년 이상 7년까지 수용되거든요.

전: 그렇다면 재탈북해서 다시 북송돼 수감될경우 그 형기가 엄청 늘어날 텐데…

김: 7년인데, 죽을 것 각오해야죠. 살아 나오겠다는 생각은 말아야죠. 그리고 재탕하면 재탕자 반이 따로 있고 노동도 다른 잡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일을 시켜요.

전: 재탕이란 말은 두번째 도강했다 잡힌 사람을 말하는 거군요.

김: 네.

전: 그런 사람들은 형기가 길 뿐만 아니라 시키는 노동의 강도도 아주 높다는 말이니 일하다 죽을 각오를 하는 사람만이 2차 3차 탈북을 감행하겠네요?

김: 그렇죠.

전: 그런데 출소 후 2달 열흘만에 다시 2차 탈북에 성공하셨어요.

김: 네.

전: 대단한 결심을 하신 건데 아버지는 말렸다고 하셨죠?

김: 네. 저희 아버지가 많이 말렸어요. 어디 나가실때면 제가 밖으로 못 나가게 문을 걸어 잠그셨지요.

전: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는 도강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까?

김; 네.

전: 수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남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아직 북에 있습니까?

김: 네. 북에 있어요.

전: 거기서 신변 안전은 어떻습니까?

김: 가족은 다 무사합니다. 근데 아빠는 폐결핵 말기 상태고요 오빠는 장결핵에 폐결핵 합병증으로 거의 가망이 없다고 엄마가 그러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