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여대생이 전하는 북한 제1중학교는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9.08.14
jhj_interview_b 전효진 씨가 자유아시아방송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RFA PHOTO/ 이규상

RFA 초대석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북한에서 제1중학교를 다니며 북한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살고 싶었지만, 돈과 권력이 없고 노동자의 자식으로 북한 사회에서는 도저히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판단으로 결국 탈북했다고 탈북대학생 전효진 씨가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전 씨는 워싱턴을 거점으로 지도력 양성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민간단체 한인 나눔운동이 주최하는 연수프로그램에 참가 차 지난 7월 미국을 방문 중 자유아시아방송을 방문했습니다.

질문: 전효진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아주 반갑습니다.

질문: 자기 소개해 주실래요.

전: 저는 2013년까지 북한에서 살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왔고요. 지금은 한동대학교에서 국제관계와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는 25살 전효진입니다.

질문: 북한에서 어릴 때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 졸업하셨잖아요. 북한에서의 학교생활이 궁금해요. 과정들을 소개해 주실래요.

전: 제가 다닐 때는 북한이 11년제 의무교육이었고요. 지금은 12년제 의무교육이라고 하잖아요. 의무교육이라고 할 때 북한은 유치원 높은 반을 시작해서 11년으로 저희 때는 봤는데요. 유치원에 6살 때 들어갔던 것 같아요. 유치원 낮은 반에서는 공부는 배우지 않고요. 높은 반에서부터 공부했던 것 같고 여덟 살에 소학교에 들어가서 1-2학년 때는 국어 수학을 공부했고요. 과목이 한 6-7개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제일 특별했던 거는요. 10살, 한 3학년 됐을 때 조선소년단 입단을 하더라고요. 그때 교육받기로 ‘사람에게는 육체적 생명과 정치적 생명이 있는데 부모님이께서 낳아준 육체적 생명은 생체적 태아에 따라서 죽을지라도 국가와 수령이 기억하는 정치적 생명은 빛이 난다면서 영원히 살 수 있다.’ 그 시작이 조선소년단 입단이라고 하면서….소년단에 입단을 저도 했어요. 입단을 하고 여러 정치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북한에서 많이 하는 생활총화, 학습 대 토론회 등을 많이 했었던 것 같고, 그러다가 간부로 선발되는데, 간부를 했을 때 처음에는 학습반장을 시켜 하다가 4학년 때에는 사상 비서라고, 분당 위원장이 학급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고요. 그 아래 학급 반장과 사상 비서가 분당 위원장을 보필하는 역할을 했는데 분당위원장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질문: 고등학교까지 북한에서 마쳤는데, 그렇다면 고등학교 때 추억이랄까

전: 네. 북한은 중학교 고등학교 지금은 분리됐는데 제가 있을 때는 중고등학교라고 해서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일체형이었어요. 중학교 때는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많이 배우고 싶어서 제1중학교를 지원해서 가게 됐어요. 제1중학교에 가니까 뭐 일반 학교서 1등 하던 친구들이 와 있는 거에요. 물론 공부도 잘하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이 친구들의 가정 배경과 권력이 참 대단하다. 실력보다도 그런 권력 배경에 더 놀랬던 기억이 있어요. 제1중학교를 지원할 때, 우리 집은 노동자 출신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돈이나 권력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잘할 수 있는 공부, 어느 정도 했으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나의 정치적 생명을 빛내야겠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회로부터 그런 인정을 받고 싶다. 그런 일꾼이 되고 싶다는 아주 여리고 순수한 꿈을 가지고 갔는데, 그 사회에서 인정받고, 사회가 원하는 일꾼이 되려면 실력보다는 돈과 권력이 있어야 되겠더라고요. 제1중학교는 누구보다 공부를 잘하는 수재 양성하는 학교인데 여기서까지 내가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앞으로 제가 살아야 할 더 큰 사회는 얼마나 힘들까? 차라리 그 사회가 원하는 게 실력이 아니라면 돈을 먼저 벌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1중학교 3학년 때 중학교를 더 다닐 필요가 없겠다. 이 사회가 원하는 게 실력이 아니고 돈이라면 그래서 1중학교 다니던 그때 중학교 3학년까지만 다니고 일반 학교로 갔어요.

질문: 일반 학교로 옮긴 이후 이야기도 해 주세요.

전: 일반 학교에 가서는 학교에는 꼬박꼬박 나가기는 했는데요. 그 이후로 엄마 아빠의 장사 열심히 도왔어요. 돈을 벌어야 권력도 가질 수 있고, 권력을 가져야 돈을 지킬 수가 있고, 그것이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이고 사회서 존경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내가 이 일(장사)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 중 고등학교에서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게(장사 도운일)인상적이었어요. 결과적으로 아무리 제가 노동자 자녀로서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 사회에서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해도 먹고 살기가 힘 드는 거에요. 그렇게 살아온 부모님의 삶을 봤을 때 고단해 보였고, 내가 앞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성인으로서 부모님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살아가기가 참 힘든 사회다. 고달프다. 또 사람이 먹고살기만 위해 사는 게 아니고 그 이외에 행복과 진정한 더 높은 수준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데 그 사회에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지 않은 세상, 그 이상의 것을 해결되는 사회를 꿈꿨던 것 같고,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거에요. 멀리 중국까지만 가도 많이 다르고, 더 나아가 한국까지 갔을 때도 최소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질문: 탈북하기까지의 기억은

전: 제1중학교 다닐 때 북한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씩 했고, 고등학교 때는 그걸 굳었고, 기회를 보게 됐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부모님도 밥상머리 교육이라고 하죠. 이제는 어느 정도 교육은 부모의 슬하에서 마친 것 같으니 ‘너희 삶을 독립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것도, 부모님 세대가 여기에서 그렇게 뼈가 쇠도록 고생하는 것도 너무 안타까운데 자녀세대까지 여기서 썩게 하고 싶지 않다는 관점이 있어서 저희에게 오래전부터 그런 식으로 많이 교육하셨어요. 오빠가 있는데요. 오빠가 저를 기다린 격이 됐어요. 오빠가 대학을 졸업한 시기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기와 맞아떨어졌고 결과적으로 탈북하게 됐지요. 중 고등학교 시절에 뭔가 열심히 공부했고, 청소년 시기에 하하호호 한 기억보다는 대개 사회에 (나쁜) 민낯을 많이 보고 약간 쓴 물을 많이 먹은 느낌이 들어요.

질문: 남북한 비교해 주세요.

전: 북한에서는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그 실력을 활용할 환경이 아니고요. 실력이 있어도 돈이나 권력이 없으면 인정이 안 되기 때문에, 실력 같은 것 별로 중요하지 않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는 돈이나 권력을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실력이 인정받는 사회로 가자! 해서 탈북했는데 이렇게 와 보니까 우리가 꿈꾸던 정말 온전히 실력으로 모든 것이 이뤄지는 사회는 아니었어요. 다만 여기서도 돈과 권력이 중요하더라고요. 아버지가 뭐 하시고, 집이 얼마나 잘 살고도 중요하지만, 최소한의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보장받는 그런 환경은 돼 있었어요. 그 차이는 정말 북한과 비교했을 때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돈과 권력은 없지만, 가진 실력을 갖추고 어느 정도 어필은 가능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요. 또 거기에 대해서 노력했을 때 만족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더 발전시킬 기회는 있는 것 같아요.

RFA 초대석 오늘은 탈북여대생 전효진 씨를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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