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받아들이면 힘든 일 없다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7.08.08
st_food_vendor-620.jpg 대구 동성로에 나온 시민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포장마차의 오뎅을 먹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무슨 일이나 어떤 사명감이나 희생이 뒤따르는 일을 한다면 참 마음이 무거울 겁니다. 그런데 같은 일이라도 보상이 있고 자신이 원해서 하면 발걸음도 가벼울텐데요. 남한생활 5년만에 이제는 기본적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고 말하는 김향순(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향순: 제가 탈북한 것은 2005년이었고 그때는 자본주의 풍이 들어와서 돈이 있는 사람은 장사를 해서 먹고 살만 했지만 저는 장사할 밑천도 없고 …

청진 출신의 김 씨는 중국에서 7년을 살다가 탈북자에게는 남한정부에서 특별지원을 한다는 것을 알고 남한으로 갑니다.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남한에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김향순: 집을 배정받아서 나왔을 때는 길도 모르고 해서 지형을 잘 모르니까 앞이 캄캄했어요. 다음날 나가보니까 지하철이 짝 열리고 교통이 잘 터지고 해서 좋았어요. 그리고 임진강을 한달 안돼서 갔어요. 북한에서 임진강이란 노래도 배웠고 해서 임진강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때는 가보고 싶었어요.

어린 딸을 학교에 보내야 했기 때문에 아침마다 나가보면 바쁘게 움직이는 남한사회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북한에서의 생활이나 또는 탈북해 중국에 있었을 때와 비교가 됐는데요. 특히 점심 시간의 거리 풍경과 길에서 파는 노점 음식이 인상적이었답니다.

김향순: 지하철 다니고 버스 다니고 사람들이 점심 식사하러 단체로 식당에 가서 먹는 걸 보면서 한국의 흐름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느꼈죠. 또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퇴근하면서 술을 한잔 하던가 밥을 먹고 들어가는데 그것이 눈에 들어왔고 해보고 싶었어요. 북한에는 떡볶이가 없어요. 그래서 사먹어 보고 집에와서도 해먹어 보고요.

한국인이 즐겨 찾는 간식. 빨간색 음식 떡볶이를 북한 청취자분은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김향순: 떢볶기는 얇은 가래떡에 고추장, 설탕, 오뎅, 계란 등을 넣고 만든 음식인데 우리 입맛에는 맛더라고요. 달콤하고 새콤하고 별맞이더라고요. 일반 대중음식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참 맛있고 귀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요즘은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지만 남한의 유행어가 한때 “빨리 빨리” 였던 적이 있습니다. 모든지 빨리 서둘러 해야 한다는 말인데요. 급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처리하려니 자연히 나오는 말이 습관처럼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번졌던 것입니다. 김 씨의 눈에는 바쁘게 돌아가는 남한사회가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김향순: 아이 유치원에 갈 때 나가봤는데 학생들은 가다가 24시마트에 들려서 간단한 음식을 사서 먹으며 등교하는 거예요.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과외공부를 하다보니까 늦게 일어나서 아침을 사먹고 가는 거예요. 회사원들도 가면서 지하철에서 간단한 빵과 우유를 사서 먹더라고요. 시간에 쫒겨 사는 것도 있지만 시간을 아껴 가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지금까지 열심히 산겁니다.

바쁘게 일만 한다면 사는 재미가 없겠죠. 열심히 일했으면 쉬는 시간도 평소에 하지 못했던 것 또는 하고 싶었던 것을 찾게 마련인데요. 이런 것이 바로 취미생활, 여가활동이겠죠.

김향순: 캠핑을 간다든지 등산을 주말에 가는 것이 부러웠어요. 그런데 눈치를 많이 봤어요. 처음 가봤어요. 밖에서 집없이 자는 것을 생각하고 갔죠. 북한에서 추운에 밖에서 자는 생각으로 갔는데 캠핑도구가 너무 좋고 해서 집 같은 느낌이 나고 야외에서 즐기는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산이 너무 아름답고 새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니까 너무 놀랐어요. 북한에서는 못 느꼈던 것을 여기 와서 느꼈어요.

남한생활에서의 혼란이 정착 초기에는 있었는데요. 그중 하나가 남쪽에선 사용하는 화폐 단위입니다.

김향순: 북한 돈 5만원은 많은 돈이예요. 그런데 여기 와서 5만원 하니까 그렇게 큰줄알았죠. 북한에서 5만원이면 소한마리 살 큰돈이예요. 그런데 여긴 아니었어요. 마트에 가서 시장을 한번 보고 오면 별거 산 것도 없는데 1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거예요. 집에 와서는 다시 계산을 해보는 거예요. 물가도 높고 5만원의 가치가 북한보다 작은 것같이 생각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단순히 남한돈 5만원이면 북한에선 뭘 할 수 있을 텐데. 이런식으로 생각하다가 좀 더 나아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남한에서 태어난 사람들처럼 살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할까 생각이 많았답니다.

김향순: 당연히 했죠. 처음엔 돈을 벌어도 물가가 높으니까 기술직도 아니고 몸으로 때우는 일만 하는데 120만원정도 가지고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어요. 그래서 그때는 되는데로 알바도 하고 회사도 다니고 싶었어요. 초기에는 너무 열심히 살아서 200만원 정도는 벌어서 생활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특별한 기술도 없고 자격증도 없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김향순: 회사에서 상품을 만드는데 화장품을 만들었어요. 스티커를 붙이고 간지를 붙였는데 다 붙이고 나서는 물건을 날라와야 하는데 나이든 사람은 가만히 서 있고 나이 어린 내가 해야 했어요. 그땐 화가 났고 밤 1시까지 야간작업을 하고 집에 올때는 돈을 벌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도 내가 오늘 이렇게 열심히 해서 돈을 벌었구나. 이런 성취감도 있었어요.

기자: 그때 얼마나 버셨는데요.

김향순: 회사에서 8시간 일해서 6만 4천원을 벌었어요. 그러니까 매일 일하면 내 통장에 돈이 쌀이겠구나 하는 욕망이 생기더라고요. 그땐 먹고 싶은 것도 안먹고 쓰고 싶은 것도 안쓰고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재미에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누가 강요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얼핏 들으면 긴 시간 일을 하고 쉬는 날도 별로 없기 때문에 너무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것 아닌가 하겠지만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몸은 좀 지쳐도 기쁜 마음으로 했습니다.

김향순: 일단 회사에서는 힘들게 일했지만 그래도 일이 끝나면 바로 돈 지급을 받아 나올 때 북한에서라면 일을 했어도 한푼도 못 받는데 여기는 일을 하면 그만큼 대가를 받으니까 좋았고 내가 한국에 정착해서 마음껏 돈을 벌어서 경치좋고 물좋은 곳을 마음대로 가고 즐기고 놀수 있는 것이 북한에 대비하면 한국이 지상낙원이라고 생각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향순 (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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