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아닌 남한에서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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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취업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취업상담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 중에는 일본에서 1960년대 북한으로 이주한 후 탈북해 현재 남한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래 고향인 일본으로 가지 않고 남한을 선택한 것인데요. 오늘은 남한이 세 번째 고향이라는 조미순 씨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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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순: 2006년 탈북해서 한국은 2007년에 도착했어요.

일본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12살 때 북한에 갔던 조미순 씨. 북한을 떠나야 한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한 배경에는 역시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컸습니다.

조미순: 그 때 고난의 행군 시기라 너무 배가 고팠어요. 남편이 먼저 1997년에 떠났거든요. 그때는 굶어 죽는 사람도 많고 이렇게 살다가는 굶어 죽겠다고 해서 중국에 남편 이모가 살아서 거기가서 도움 받고 오겠다고 그렇게 떠나서 2003년에 소식이 왔어요. 그래서 우리 딸이 브로커를 따라 온성에 갔는데 거기  가니까 아빠가 중국에 와야 돈을 주겠다고 해서 딸이 중국 건너가서 아빠한테 돈을 받아 오다가  온성에서 잡혀서 거기서 한 3개월 감옥에 잡혀있었어요.

북한에 사는 교포를 크게 둘로 나누면 한줄기는 일본에서 1960년대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교포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쪽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간 조선족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분들은 말투도 다르고 새로운 환경에 뿌릴 내려야 했기에 어려움도 많았는데요. 살기 괜찮을 때는 그나마 큰 문제가 없었는데 나라전체에 고난이 닥치자 그 충격은 배가 됐습니다.

조미순: 그때 1965년 귀국했을 때는 배급이나 노임은 줬고 그런데로 상점도 있고 일본처럼 흔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로 살았어요. 부모님이 계시고 하니까 괜찮았는데… 시집와서도 둘이 한공장에 다니고  남편은 운전사였으니까 그런데로 살았는데 김일성 사망 후에 배급을 안줘서 1996년부터 98년까지  힘들었어요. 귀국자는 직장생활만 하고 적응이 약하니까 힘들었죠.

기자: 귀국자는 당시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고난의 행군 때 더 힘들었습니까?

조미순: 다 힘들었겠지만 우리 귀국자들은 일본에서 잘살다 왔잖아요. 그러다보니까 북한사람들보다 좀 약하지 못하다고 할까? 고생을 못해봤으니까요.

탈북하기 전에 이미 남한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공개적인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북한식 표현으로 말하면 가만가만히 비디오를 통해 또는 가깝게 지내는 사람을 통해 현실이 어떻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조미순: 당시에 한국 드라마도 가만가만 봤거든요. 또 북한에 있으면 귀국자들한테 친척들이 조국방문단이 와요. 우리집에는 안왔지만 일본에서 온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까 한국이 엄청 잘산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한국이 잘산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탈북해서는 최종 목적지를 태어난 고향인 일본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남한으로 바꿨습니다.

조미순: 갈 수는 있었죠. 그래서 우리는 일본에 가려고 했는데 알아보니까 일본에서 받아는 주는데 집도 안주고 혜택이 없데요. 남편이 다 알아봤거든요. 우리가 나이가 있는데 거기서 일해야 먹고 살수 있잖아요. 그래서 포기 했어요.

기자: 한국에서는 정착금도 주고 집도 주고 하는데 직접 와보니 어땠습니까?

조미순: 소감이 우리는 집을12평 주거든요. 집이 좀 제생각은 집이 크고 멋있는가 했는데 집이 생각과 다르게 좀 작더라고요.

기자: 북한에서는 몇 평에서 사셨는데요.

조미순: 북한에서는 그것보다 더 작은 집에서 살았죠. 하지만 한국은 잘사니까 집도 큰가 했어요.그런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작더라고요.

기자: 생활은 쉽게 적응이 되던가요?

조미순: 네, 그것은 좋았어요. 여기 오니까 24시간 전기가 다 들어오지, 교통이 좋지 하니까 적응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는데 은행이용을 잘 못해서 그렇지 다 괜찮았어요. 그런데 말이 좀 안통했어요. 북한말투여서 잘 알아듣지를 못하더라고요. 또 어떤 사람은 일본에서 왔는가 이러더라고요.

기자: 혹시 남한생활 중에 일본에 친척도 있고 할텐데 가보고 하셨나요?

조미순: 네, 두 번 갔다왔어요. 친척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한테 4촌5촌 되니까 우리에게는 먼 친척이 되거든요. 얼굴도 몰라요. 또 우리가 귀국할 때 그 친척들이 가지 말라고 다 반대했거든요. 통일되면 우리는 한국에 가야 한다고요. 부모님 고향이 경상북도 거든요. 친척을 찾으려니 힘들고 해서 옛날 일본에서 내가 살던 집을 찾아 갔어요. 그러니까 집이 그냥 있더라고요.

일본에서 소학교까지 다녔던 조 씨는 반세기가 지나 살던 곳을 가봤습니다. 그리운 사람들은 만날 수 없었지만 그 흔적은 확인할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어렸을 때 먹었던 과자며 사탕을 먹었을 때는 그때의 맛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잠시 과거로의 여행을 다녀 와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는데요.

조미순: 좋은 것은 여기는 자기만 부지런하면 다 살 수 있잖아요. 모든 것이 북한보다 발전이 돼서 다 좋았고 좀 기분이 나쁜 것은 우리는 나이를 먹어 왔기 때문에 말투가 잘 안돼요. 택시 기사분이라든가 마트에 물건 사러 가면 어떤 사람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더라고요. 중국 조선족인가 하고 물어보고요. 그런것이 불편했어요. 그분들은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북한에서 왔다고 깔보는가 하는 느낌도 들고요. 여기 한국 사람들도 북한에 가면 말이 통하지 않고 할텐데 왜 북한에서 왔다고 다른 눈으로 볼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제 좋은 일만 생각하고 여유가 생기면 가고 싶은 곳을 다니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조미순: 나이도 있고 하니까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그런데 노후 준비가 안돼있으니 좀 걱정스러워요. 여기서 태아났으면 노후 준비를 했겠는데 우리는 나이 먹어 왔잖아요. 남편은 좀 먼저 왔지만 우리 데리고 온다 해서 노후 준비를 못했어요. 그것이 좀 안타깝죠.

제2의 고향 오늘은 일본이 고향인 조미순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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