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유튜브 즉 인터넷 동영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도 많이들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가지고 북한에서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허초히(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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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초히: 지금 코로나로 정세가 너무 안 좋아요. 그래서 저는 집에서 유튜브를 하려고 공부하고 있어요.
요즘 허 씨는 이전에 하지 않았던 공부에 푹 빠져 있습니다. 유튜브 즉 인터넷을 이용해 동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일인데요. 아직은 본격적으로 시작하진 않았지만 곧 전세계 사람들과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게 됩니다.
기자: 동영상을 올리기 위해 따로 컴퓨터 학원에서 배우고 계신 겁니까?
허초히: 아니요. 학원은 다니지 않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유튜브 만들기 보면서 사이트를 깔고 하는 중입니다.
기자: 보기는 쉬어도 막상 직접 하려고 하면 쉽지 않을 텐데요.
허초히: 워낙 탈북민들이 여기서 많이들 해요. 그래서 물어보기도 하는데 실시간으로 올리려면 기본 주제가 확실해야 사람들이 많이 보기 때문에 좋은데 그냥 들리는 소문만 갖고 하면 망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실시간으로는 못하고요. 또 실시간으로 올리려면 말도 잘해야 하고 아이디어가 특출해야 구독수도 늘고 보는 사람들이 꾸준히 보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준비를 완벽하게 하려고 하고 있는 중이에요.
기자: 어떤 내용을 동영상으로 만들 계획이십니까?
허초히: 저는 제 일상 생활을 올리려고요. 기본적으로 내가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말하면서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요. 북한에서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올리려고 해요.
과거 기억만 떠올리면 목부터 메이는데요. 너무도 평범하고 화목했던 가정이 한 순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맙니다. 그리고 허 씨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허초히: 저는 탈북한 동기는 저희 가족이 잘 사는 계층이었어요. 아버지는 6군단에 있었고 어머니는 인민반장이었고요. 오빠가 외화벌이 배를 탔어요. 그런데 배가 좌초 하면서 사망하고 그때 나라도 고난의 행군 때였는데 아버지는 뇌출혈이 와서 쓰러지고 저도 아프고 집안에 불화가 겹치고 국가도 어렵고 해서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예요.
허 씨는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중국에 가면 담배 장사를 하게 해준다는 사람의 꼬임에 빠져 탈북 하게 됩니다. 그 후 지난 2003년에 중국에서 강제북송이 돼서 평안남도 11호 증산 교화소에서 2년동안 수용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세월이 꽤 흘렀지만 감옥에서의 일은 지금도 악몽이 돼서 허 씨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허초히: 맞아요. 치유가 안돼요. 저는 고향을 떠나 온지 거의 20년이 되거든요. 탈북해서 한 번 강제북송 당해서 감옥 생활한 뒤에 4년이란 기간을 북한에서 보내고 왔는데 한국에서 13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가끔씩 북한에서 감옥에 있었던 꿈을 꾼단 말이죠. 또 저는 11호 노동 교화소에 있었던 것이 제 머릿속에 있다 보니까 밥을 해서 음식이 남았을 때 계속 생각은 안 하는데 음식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 북한에 있을 때는 이런 음식이 없어서 땅바닥에서 주워먹고 그러던 생각이 나거든요. 그러니까 잊을 수가 없어요.
기자: 예전에 통화 했을 때 그때 후유증으로 지금도 화장실 갈 때조차 문을 닫지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허초히: 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저는 폐쇄공포증이 있어요.
기자: 치료는 받고 계시고요?
허초히: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 받아서 오는데 약이 엄청 독해요. 제가 약을 전부 흡수를 못해요. 그래서 하루 종일 누워있어야 해서 저는 이틀에 한번 꼴로 먹고 있거든요. 그 약을 먹으면 제가 맑은 날이 없어요 계속 자리에 누워있어야 하거든요.
마음의 병이라서 그런지 허 씨는 정신 없이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생각이 들지 못하도록 몸을 혹사 시켜서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건데요. 올해는 코로나 19 때문에 일하는 것도 잠시 접고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겁니다. 지난 2007년부터 남한 생활을 시작한 허 씨는 한국 남성을 만나 가정도 꾸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자: 여러 가지로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진 않았을 텐데요. 어떠세요?
허초히: 맞아요. 그냥 검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밝은 날도 많죠. 제가 13년을 살아오면서 쭉 기억을 더듬어 보면 힘든 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같은 이런 날도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해봐요. 그리고 제가 예전에는 일만 알고 살았는데 이제는 시야를 넓혀서 사각지대에서 나보다 더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을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목표도 생긴 것 같아요.
기자: 북한에서 살다 30대에 남한에 가서 모든 것이 낯설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허초히: 저는 본인 앞에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고민을 안 해봤어요. 단지 힘들었던 것이 문화 차이, 언어 차이였어요. 한국에서는 외래어를 많이 쓰다 보니까 저희가 잘 이해를 못하고 오해를 하고 막 성질 내고 싸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지 일하면서 적응하는 것은 힘들지 않았어요. 사람들과 소통하고 대화를 하고 이런 부분에서 언어 차이가 있다 보니까 남한 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해 저희들이 받아들일 때는 저 사람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는가 하고 성질 내고 싸우려고 하고 과민하게 받아들이고 이런 부분이 힘들었어요.
같은 남한에서 성장한 성인 남녀가 결혼을 해도 서로 자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해 못하는 면이 생기기 마련인데요. 하물며 북한 여성과 남한 남성이 부부가 된다면 어려운 점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신혼 때는 부부 싸움도 많이 했습니다.
기자: 처음에는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사소한 것으로도 많이 오해를 샀을 것 같은데요.
허초히: 당연하죠. 저를 간첩취급 했어요. 진심으로 얘기 한 것이 아니고 농담 식으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밥 먹을 때 남편이 시어머니한테 “엄마 어젯밤에 이 사람이 무전 치는 소리 못 들었는가?” 하고 내가 북한에 첩보질을 하는 것처럼 농담 삼아 얘기를 하는데 지금은 유우머로 알지만 그때는 진심인지 알고 무슨 말 하는가 하고 막 화를 내면서 그랬거든요.
남편은 그냥 웃자고 한말이었지만 때때로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허 씨에게는 비수가 돼서 꽂혔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남한사회를 좀 더 알게 되면서 이젠 대부분의 상황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아직 한가지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답니다. 중국에 있는 딸을 남한으로 데려오는 겁니다. 올해 데려오려 했지만 코로나 19 때문에 상황이 안 좋아서 잠시 모녀의 만남은 뒤로 미뤘습니다.
허초히: 저는 지금 딸을 빨리 데려오는 것이 우선이고요. 코로나가 해제되고 하면 딸을 데려와서 지금까지 딸한테 해주지 못했던 것 다해주고 싶은 마음이고 그리고 우선 제가 건강을 회복해야 하니까 첫째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려고요. 제가 마음을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서 병이 악화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좀 더 밝은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다스리고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저보다 더 어렵게 사는 탈북민들을 위해 제가 좀 더 노력하려고 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자신의 이야기를 유튜브를 통해 전하겠다는 청진 출신의 허초히(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