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며 그리움 달래요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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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영등포공원에서 열린 '제10회 영등포 여성백일장'에서 참가자들이 나무그늘 아래 앉아 글짓기를 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공원에서 열린 '제10회 영등포 여성백일장'에서 참가자들이 나무그늘 아래 앉아 글짓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그것을 진정시킬 뭔가를 찾게 됩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 한동안 요양을할 수도 있고 취미생활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합니다. 오늘은 북한에 있는 가족 생각이 날때마다 시를 쓴다는 차명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차명희: 자식에 대한 그림움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제가 현재까지도 20년이 넘게 헤어져 살아져 살았지만 그리움은 모든 것이 그리움 같습니다.

함경북도 출신으로 친척을 만나기 위해 중국에 갔던 차 씨는 그길로 뜻하지 않게 고향을 등지게 됩니다. 계획했던 탈북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차명희: 제가 군부대에 있으면서 김정일이 군부대에 찾아오신다고 하기 때문에 군부대 가족들이 공연을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피아노가 고장이 나서 그 피아노를 고쳐 충성심을 보여주겠다 하는 마음에 중국에  살고 있는 친척에게 피아노를 사려고 떠났는데 중국에서 여자를 사고 팔고 하는 인신매매에 걸린거죠. 그것이 1998년 10월이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겨울 고향의 가족에게 한 편의 시로 마음을 전합니다.

차명희: 그리운 고향 떠날 때ㅡ 차명희

눈이 내리던 날 꽁꽁 언 작은 손 내저으며 빨리 갔다 오라고. 걸어가는 뒷모습 사라질세라 의자에 올라  온몸 키 돋우며 손 흔들어주던 너. 그 약속 지키지 못한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 외롭게 내리는 눈을 보니  차마 가슴이 미어져. 오늘은 돌아올까 의자에 올라서 눈 내리는 하늘만 바라만 보고 있을 네게 이 마음  전해주렴. 나도 눈을 보며 그리움 달랜다고.

국경 경비대에게 중국돈으로 300원을 주기로 하고 잠시 넘어갔다 오려던 것이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때 중국돈 2천원을 주고 중고 피아노를 친척을 통해 사기로 하고 길을 떠났었는데 지금은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차명희: 솔직히 말해서 그때 당시 내가 피아노를 사가지고 갔었더라면 내 인생이 바뀌었지 않나 싶지만 그런데 경제적으로가 아니고 한순간이었지 않았을까 해요. 김정일 장군이 온다고 해서 피아노를 충성으로 받침으로써 칭찬을 순간적으로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훗날 닥친 식량위기라든가 가족을 꾸려나갈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니었구나. 내가 여기와서 보면 경제적으로 먹는 걱정은  안하고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남한에 사는 많은 수의 탈북자는 북한의 가족에게 송금도 하고 최소한 안부 정도는 알고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물론 합벅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 있는 조선족을 통하거나 그들만이 아는 경로를 통해 이뤄지긴 하지만요. 그런데 최 씨는 그마저도 할 수 없습니다.

차명희: 아이들을 볼때마다 자식에 대한 생각이 나요. 내 자식이 얼마나 컸을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내 자식도 저렇게 컸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연락은 했는데 아이들이 내가 보낸 브로커가 갔었는데 만약 엄마가 살아있다고 해도 자기네는 엄마를 모른다. 안그러면 자기 집안은 모두 농촌으로 추방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 연락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탓할 수도 없는데 그저 미안하기만 합니다. 어머니에게 그리고 북에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미친듯 더 열심히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차명희: 바쁠 때는 진짜 생각이 안납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날 때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생각이 나는 거죠. 생각이 날 때는 피곤해서 하루종일 자고 일어나서 텔레비를 보는 데 아이들이 나오고 시골이 나오고 고향의 비슷한 모습이 나오면 생각이 납니다. 내가 일하러 현장을 가다가고 돌맹이라든가 농촌  이모네 집에 놀러갔을 때 소를 보고 무서워했던 생각도 나고요. 지금 평택에 사는데 소를 봐도 그렇고 어쨌든 모든 것이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자꾸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왜 그때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어머니로 그리고 한 여인으로의 삶을 말입니다.

차명희: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스무살 차이가 났었어요. 어버님이 제가 12살 때 돌아가셨고 홀로 어머니가 저희 5남매를 키우신거죠. 그때 제가 막내로 몰랐던 모든 걸 이제 안거죠. 막 울면서 엄마가 새아빠를 맞으면 나는 나가겠다고 한 생각도 나는데요…

차명희: 용서- 차명희

떠나는 자식들 행복을 빌며 두 손 모아 꼭 잡으시던 어머니. 머리에는 흰 서리가 내리고 까맣게 그을린 얼굴엔 밭고랑처럼 주름가득했던 어머니. 언젠가 조용히 나에게 짝을 맺어야 한다는 한숨지으시던. 아,  그때는 몰라서 그 심정 차마 헤아리지 못해서. 세월이 흘러 이제야 알게된 어머니 마음. 홀몸이 된 딸이 이제야 진심으로 용서를 바라옵니다. 어머니 용서해 주세요.

최 씨는 10년이 훨씬 넘게 중국생활을 한 후 2016년부터 남한을 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남한행이 늦어졌던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차명희: 여기서처럼 인터넷을 중국에서 종종 보고 탈북자가 나오는 장면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만 해도 이런 배신자가 있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것은 남한에서 내세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국에서 열심히 사는 과정에 인정을 받은 거죠. 그래서 한국에 관광객으로 오게 됐습니다.

남한에 가서는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궁금증이 풀린 다음에 중국에 돌아가 생활을 정리하고 남한에 정착한 겁니다. 이제 최 씨는 50대 중반이 됐는데요. 현재는 건설현장에서 안전요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동의 강도는 만만치 않지만 노력하는 만큼 잘 살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고향 생각이 날때마다 마음을 흰종이에 적고 있습니다.

차명희: 제가 제일 진짜 행복하다는 것이 한 사람의 시지만 마음에 우러나오는 말을 함으로써 다른이에게 감동을 주지 않을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데…

제2의 고향 오늘은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차명희 씨의 시 두편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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