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행복하고 싶어요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8.04.03
defector_family_sk_b 지난 2003년 방콕 주재 일본 대사관에 진입한후 망명요청을 한 탈북자 가족 10명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선글래스와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행복인 인생이란 뭘까요?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행복이고,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대학진학이 행복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행복이 있는데요. 오늘은 환갑의 나이에 봉사활동을 하면서 홀로 손녀를 키우며 남한생활을 하는 양강도 혜산 출신의 유혜림(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유혜림: 자꾸 우리 북한 사람들 잡아내간다 해서 장춘 쪽 아주 깊은 시골에 가 있었어요.

2009년 11월 압록강을 건넌 유혜림 씨. 탈북자가 도강을 해서 중국에 가면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강제북송입니다. 작은딸이 먼저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오겠다며 떠났고 3년 후 큰 딸마저 동생을 찾겠다고 집을 나서면서 가족은 생이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간 딸의 연락을 받고 손녀를 보살피던 유 씨는 탈북자가 처지가 돼서 이때부터는 자신도 중국을 떠나는 순간까지 숨죽이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유혜림: 큰딸이 잡혔다는 소리를 듣고는 낮에는 산에가 있었어요. 2시전에 들어가 못 자봤어요. 진짜 집안에 앉아 있어도 편하게 있지 못 했어요. 텔레비전 보다가도 사람만 마당에 들어와도 잡으로 오는 것 같고, 창문으로 도망가서 산에 가 있고요. 딸이 잡히고 브로커와 연결이 돼서 중국에서 라오스로 갔거든요.

물론 합법적으로 북한에서 여행증명서를 받아 나가는 무역일꾼이나 조선족 친지방문은 걱정이 없지만 소위 말하는 불법 도강자들은 중국 땅을 밟은 순간부터 숨어 사는 것이 보통입니다. 유 씨도 먹는 문제는  해결이 됐지만 또 다른 걱정에 불안해 합니다.

기자: 산에 갈때는 몇 시에 가서 몇 시에 내려온 겁니까?

유혜림: 몇시랄 것도 없어요. 아침밥 먹고는 앉아있다가 공안차 지나가거나 하면 아랫집에서 연락이 와요. 거기 탈북자 세 집이 있었는데 아랫집에서 기별하면 우리집까지 연락이 와요. 우리보고 피하라고 뛰어오면 산에가서 있었어요. 저녁에도 볏짚같은데 숨어서 자다가는 주인집에서 나오라고 하면 오고 그랬어요

보통 중국에 숨어사는 탈북자는 이전에 남한으로 간 탈북자들의 소개로 또는 중국에 있는 남한 종교단체를 통해 브로커를 소개 받아 제3국을 통해 남한에 갑니다. 유 씨도 큰 딸이 북송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남한행을 결심을 했고 2010년 남한 땅을 밟게 됩니다. 당시 소감을 유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혜림: 우리가 라오스에서 8월 16일 비행기를 탔어요. 인천공항에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것 같은데 한국이라고 해서 졸다가 눈을 뜨고 밖을 보니까 별무리랄까요? 전기불이 다 켜졌는데 북에서는 보지 못하던 광경을 보고는 멋있다, 멋있다 하고 인천공항에 착륙해서 나오니까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가 있더라고요. 이제 한국에 왔다고 하니까 그때 마음은 말을 더 못하겠더라고요.

유 씨는 남한 땅에 도착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유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그저 얼굴을 젖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남한생활. 정부에서 지원한 17평 아파트에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서서히 생활은 적응이 됐는데요. 보름만에 집에 난리가 납니다. 손녀가 갑자기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던 겁니다.

유혜림: 밤에 갑자기 급성폐렴이 와서 열이 나서 하나센터에 전화를 하니까 팀장님이 왔어요. 입원을 시키고 그땐 정말 막막했어요. 그리고 3월에 학교에 손녀를 보냈는데 한 주 가더니 안 가겠데요. 말이 왜 그런가? 중국에서 왔는가? 물어보고 너 왜 할머니 하고 왔나, 엄마 아빠 없는가 물어보더레요. 또 글을 배우는 시기를 길에서 보냈잖아요. 그래서 글도 모르지 아니들이 자꾸 물어보지 하니까 내가 좀 더 있다가 보내겠다고 하고 아이를 학교에 안 보냈어요. 한 8개월이 지났는데 하나센터에서 전화오지  담당형사님도 진희를 여기와서 공부시켜야하지 않나 해서 마음을 잡았어요. 손녀를 동네 어린이 방에 보내고 저는 저대로 알바를 다니고…

어른도 힘든 새로운 환경이 아직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6살된 손녀라고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적응이 어른보다는 빠르다고들 하지만 반면 쉽게 마음에 상처도 받기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 씨는 손녀를 생각해 먼저 자신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현실에 적응하자 맘을 먹었던 겁니다.

유혜림: 자격증은 국가자격증만 6개 그리고 일반 자격증까지 하면 8개예요.

기자: 사람들이 연세도 있으신데 2년제 대학도 졸업하고 국가자격증도 따고 왜 그렇게 많이 하셨어요 하면 뭐라 하십니까?

유혜림: 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잖아요. 학교 때 대학 못가면 공부 못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와서는 나이 먹어서도 자기 희망과 포부가 있으면 다 실현이 되거든요. 나는 한국에 왔으면 하나라도 국가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이에 맞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거든요. 그때는 진희 때문에 일을 할 형편이 못됐는데 보니까 여기 봉사하는 사람도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이 힘든 사람들 위해 봉사를 많이 하더라고요. 텔레비전을 보니까 감동이 많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자격증을 땄어요. 지금은 탈북자 단체인 더불향봉사단 일원으로 복지관에 가서 어르신 식사하는데 가서 자원봉사를 해요.

남한정부는 저소득 계층의 사람에게는 최저생계비 지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유 씨는 시간제 노동을 하며 손녀를 돌보는데 지금 북에 있는 딸도 걱정입니다.

유혜림: 직업을 세탁소 다리미 다리는 자격을 따서 일을 했는데 요양원 공부하고 밤에는 아이를  세탁소 데려가서 돈을 벌어 북에 보내자 하고 하루도 쉬지 않았어요. 낮에 학교 가면 저녁에 일하고 그래서 북에 돈도 보내주고… 지금도 허리 치료를 받다보니 일은 그렇게 많이 못해요. 알바는 해도 전문직업을 못했어요. 전문직업을 갖자니까 제가 컴퓨터를 못하거든요. 아무래도 자격증이 있어 일하자고 해도 진희 학교에서 전화오면 달려가야 하고

남한에 가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손녀가 웃음을 되찾았을 때입니다. 지금은 14살로 중학교에 다니는데요. 북한에서 입은 사고로 몸에 흉터가 있는데 그것을 없애는 수술을 받은 겁니다.

유혜림: 진희는 학교 다니면서 돈 들어가는거 없어요. 진희가 북한에서 4살 때 국물에 데어서 상처를 많이 입었어요. 그래서 싸우나나 물놀이장도 못가고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는데 작년에 어린이 재단에서 도와줘서 1차 수술을 받고 제가 작년에 진희 때문에 너무 속상해 하니까 후원이 들어와서 2차 수술을 받을 돈도 다 후원이 됐어요. 한국에 왔으니 그런 수술도 하죠. 이제 진희도 친구들도 많고 잘나가요…제작년까지만 해도 친구들한테 북한에서 왔다고 상처 입어서 학교 안 다니겠다고 해서  대안학원까지 갔다가 앓아서 집에 내려와서 일반학교를 갔는데 이젠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적응에 문제가 없어요.

살다보니 힘든 때도 기쁠 때도 있습니다. 당장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은 없지만 한순간도 북에 있는 딸 그리고 중국에 있는 딸을 잊은 적은 없습니다. 어디에 살던 딸들이 건강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면서 수줍은 상상도 해봅니다.

유혜림: 저도 이제 소망이 있다면 여기 오니까 한국 남자들이 진짜 잘하더라고요. 저는 북한에서 남편없이 생활을 오래 했거든요. 나도 우리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서 죽을 때까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양강도 혜산이 고향인 유혜림(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