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15년, 수술 위해 남한행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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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아산병원이 경찰수련원에서 새터민의 건강을 위한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
강릉아산병원이 경찰수련원에서 새터민의 건강을 위한 무료진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태어나 정든 곳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운 결정은 아닙니다. 처음 탈북이 그랬고 또 10년 넘게 살던 중국에서 남한행을 했을 때가 그랬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탈북여성은 중국에서 15년을 살다가 남한으로 갔는데요. 이분은 중국에서 저희 RFA 자유아시아방송을 열심히 들었다는 애청자이기도 합니다. 남한생활 3년차 고지은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고지은: 첫 탈북은 1997년에 했고요. 중국에서 식당에서 일하다가 북송당해 갔어요.

양강도 출신의 고 씨는 북한에서 아사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던 시기에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강제북송. 북한에 가서는 1년동안 감옥생활을 2000년 다시 도강 합니다.

고지은: 한국에 온 것은 2015년입니다.

기자: 그러면 중국에서 15년을 살았다는 것인데 한국행을 한 이유는 뭔가요?

고지은: 국적이 없고 금방 탈북했을 때는 30살이었는데 15년 지나니 45살이 됐죠. 병이 났는데 중국에서는 신분증이 없으니 병원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눈이 잘보이지 않아서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신분확인이 안되니가 그게 안됐어요. 점점 나이 먹을수록 병원진료를 봐야 하는데 그런 것을  못 하는거예요. 숨어서 병원을 못가는 거예요. 그런 것이 제일 맘에 걸렸어요.

남한입국 탈북자 10명 중 7명은 여성입니다. 그리고 최근 발표된 남북하나재단의 탈북자 정착실태 보고서에서도 이들의 연령대는 30대가 25%, 40대가 31%로 둘을 합치면 절반이 넘습니다. 이런 통계 보고서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오씨의 경우가 그런데요.

예를 들어 2000년 초기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는 탈북동기가 배가고파 먹을 것을 찾아서 했고  이것이 남한행으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탈북자의 남한입국은 이어졌는데 이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요. 오 씨는 탈북과 중국에서의 강제북송 그리고 북한에서 감옥생활에 후 다시 탈북해 중국에서는 15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백내장 수술을 받기 위해 남한행을 택한 겁니다. 신분불안도 그랬지만 시력을 잃어서는 안됐기 때문입니다.

기자: 중국에서 15년 사는 동안 저희 RFA 자유아시아 방송도 들으셨습니까?

고지은: 네, 2008년부터 방송을 들은 것 같아요. 기자님 방송도요. 대북방송으로써 유일한 우리의  희망인 것 같더라고요. 북한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을 알려주고 정보전달도 있지만 정말 북한 사람들이 알 수없던 것들을 알리는 방송으로 너무 감사하고 좋더라고요. 매일매일 마음으로 사모하고 어떻게 감사를 전할 지 모르정도였어요. 탈북수기가 좋았는데 로얄패밀리, 김정일의 요리사 같이 밤마다 매일 조금씩 읽어 내보내고 강철환 기자가 쓴 수용소의 노래가 엄청 좋았어요. 한국에 오면서 방송 들은 것 너무 좋아서 얘기를 했는데 그때 북에서 직접 오신 가족이 있었어요. 그분들도 북에서 저녁마다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자기들도 몰랐데요. 인민반회의에서 “너희 미국에서 하는 자유아시아 방송 듣지말라” 그랬다는 거예요. 미국놈들의 모략책동이니 하면서 그런 방송을 듣지 말라고 해서 호기심이 났데요. 그래서  주파수를 돌리다가 그 방송을 찾았다는 거예요. 그다음부터 들었는데 너무 좋았다고 그 얘기를 했어요.

북한에서 또는 제3국에서 저희 RFA 자유아시아 방송을 듣는 분들을 위해 더 열심히 진실된 보도 잘못된 뉴스가 없는 방송을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보게 됩니다.

오 씨는 북한에서 태어나 30년 중국에서 15년을 살다가 남한에 갔습니다. 그에 나이 45세때 일인데요. 찌게와 김치를 좋아하는데 중국에서는 먹지 못하던 음식을 남한에 가서 어딜 가나 먹을 수 있고 또 말이  통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다시 한번 낯선  세상에 적응을 해야 했습니다.

고지은: 처음에는 나와서 제일 느껴지는 것이 자격증이 없다는 것이 제일 안타깝더라고요. 취업을 하려고 해도 자격증이 없어서 안되는 경험을 했어요. 계단이나 건물외곽 청소하는 일도 해봤는데 하루에 20개 층 아파트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했는데 한 달을 일했는데 얻어맞은 것처럼 몸이 힘들어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두 달 일하다가 나왔거든요. 젊었을 때 그 생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증을 가지고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것도 깨닭게 되고 …

사람에게 매일 힘들고 고된 일만 생긴다면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희망이요. 작은 행복의 순간들이 아닐까 싶은데요.

고지은: 평상시에도 느끼지만 도로의 가로수 풍경이 너무 아름답고 북한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마음껏 구경하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또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달릴 때 한강의 기적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피의 대가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 여기 이 땅에 와서 행복을 찾았다는 것이 행복하거든요.

3살 때 강을 건넜던 딸은 이제 18살이 됐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데요. 혼자 딸을 키우느라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아직은 남한생활 모든 면이 서툴지만 조금씩 나아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고지은: 여기 나와서 눈수술도 하고 정부에서 미혼모 자녀라고 해서 지원을 받으면서 살았어요. 제가 알바를 하면서 보테면서 남한사람이나 돈 있는 사람과 비교를 하면 어려운 환경이지만 돈이 없다고 어렵다 생각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가 먹을 수 있고 아이가 학교 다닐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기쁘게 생활하니까 살아가는 거죠. 나는 몸도 회복이 됐으니까 열심히 살 수 있고 지금  대안학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돼서 열심히 하면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고품의 고통을 벗어나 탈북을 했고 백내장으로 실명 직전에 남한행을 했습니다. 언제나 난관을 잘 극복했던 것처럼 오늘은 좀 힘들어도 내일은 더 행복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남한생활을 한답니다.

고지은: 제가 열심히 10년 정도 살면 딸도 취업을 하고 나면 우리 생활이 좀 더 풍족해지지 않을까 하고 지금은 작은집에서 살지만 큰집에서 살고 싶은 꿈도 있고요. 딸이 공부도 잘하고 잘 자라서 남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생활 3년차가 되는 고지은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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