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시집장가 가고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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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북한을 탈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로 모스크바까지 간 이기숙 씨. 사진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러시아의 한 역에 정차해 있는 모습.
2002년 북한을 탈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로 모스크바까지 간 이기숙 씨. 사진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러시아의 한 역에 정차해 있는 모습.
/AFP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아빠는 아들은 업고 엄마는 딸의 손을 잡고 탈북 한 일가족이 있습니다. 남한에 가서는 딸을 하나 더 낳아서 다섯 식구가 됐는데요. 이젠 세월이 흘러 성장한 자녀들이 남한에서 시집 장가를 가고 새로운 사회에 뿌릴 내리고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무산 출신의 이기숙 씨의 이야기 입니다.

이기숙: 내가 2년전에 무릎 수술을 했어요. 관절이 다 닳고 연골이 찢어지고 해서 대수술 했어요. 400만원정도 들었어요.

남한에 가서 라면 생산공장 북한식 표현으로 꼬부랑 국수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이 씨는 기자와 전화한 주말 오전 병원에 있었습니다. 젊을 때 무리를 해서인지 50대 중반을 넘고서 몸에 하나 둘 문제가 생겨 치료를 받았던 겁니다.

이기숙: 한국 의술은 알아주잖아요. 수술하고 괜찮았는데 저번에 일하면서 계단을 급하게 오르다가 상태가 안 좋아져서 병원에 갔더니 DNA주사하고 연골주사하고 맞았더니 괜찮아졌어요.

말을 들어보면 간단한 수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기숙: 무릎관절이 안 좋아서 빼내고 내 뼈를 이식해 넣었어요. 연골도 안 쓰는 곳에 것을 조금 채취해서 넣었는데 거부 반응도 없고요.

기자: 액수가 큰데 수술비용은 어떻게 감당하셨습니까?

이기숙: 실비보험을 들어놨고 통일부에서도 진료비의 반을 지원해줬어요.

기자: 그러면 본인 부담은 얼마를 낸 겁니까?

이기숙: 실제 내 돈 든 것은 없죠. 실비보험으로 다 받았으니까.

탈북자기 때문에 정부 지원을 좀 받았고 자신도 15년전에 건강보험을 들어 놨기에 치료비 걱정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씨는 탈북 후 강제북송도 한 번 당했었는데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기숙: 내가 2002년에 가족하고 전부 강제북송을 당했는데 그때 엄마집 앞에 앉아서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이 난국을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가 하고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아들이 엄마, 배고프고 다리 아프다는 말 안 할테니까 한국이란 나라를 찾아 걸어서 떠나자고 그러더라고요.

기자: 아들이 몇 살이었는데 그런 말을 했나요?

이기숙: 그때 중국에 있으면서 계속 우리가 한국 가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아이가 옆에서 봤죠.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가야만 우리가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아이도 알았던 거죠. 그때 아이가 열두 살 정도 됐거든요.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난국을 해결해야겠다. 그때 사실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났어도 됐는데 하도 목숨을 걸고 떠나는 위험한 길이니까 만일을 위해서라도 아이들을 남에게 맡겼더랬죠.

2차 탈북을 하고는 당시 탈북자들이 가지 않던 러시아로 갑니다.

이기숙: 우리가 2002년 9월 13일에 블라디보스토크로 해서 러시아 국경을 넘었어요. 내 생일이어서 기억을 해요. 넘어서 7박 8일을 모스크바 행 완행기차를 타고 가서 한국 영사관에 들어가서 입국수속을 하는 것이 8개월 걸렸어요. 그 다음해 5월에 한국에 입국했으니까요.

이렇게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얘기 하지만 처음 탈북했을 때는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기숙: 1998년이었는데 남편하고 장사 차 중국 밀수를 몇 번 다니면서 해외에 대해 눈이 트였다고 할까요? 어느 곳에서 살아야 사람이 인간답게 살겠는가 이런 것을 느꼈던 거죠. 그 당시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탈북한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중국에 온 것은 한국에 가기 위해 온 건데 연줄을 못 찾아서 시간이 걸렸는데 개인이 브로커를 찾아서 연결해 준다는 사람들은 아이들 하고 헤어져 가라고 했어요. 그때는 아이들과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까 선뜻 결심을 못하고 망설이다가 강제북송을 당했던 거죠. 그리고 북송 당해서 나가서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행동에 옮기자고 생각하고 그 해 2003년 8월 15일에 2차 탈북을 했죠.

남한에서 낳은 딸이 이제 17살이 됐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죠.

기자: 남한생활이 거의 20년이 가까워 오는데 살아보니 어떻습니까?

이기숙: 사람이 정신적으로 벌써 틀리다고 생각해요. 북한에 있을 때는 나를 위해 사는지, 김정일을 위해 사는지 모를 정도예요. 입만 벌리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모르고 그런 말을 하고 살았어요. 북한에서 오빠가 있는데 입당을 시키기 위해서 중학교 때부터 새 양말을 사다 다 갖다 받쳤어요. 오빠 입당 시키기 위해서요. 어디서 술한병이 생겨도 노동당 비서한테 갖다 받쳤어요. 전재산을 갖다 받치면서 오빠가 26살에 입당을 했는데 북한에서는 당원이 돼야지 결혼도 하고 살 수 있는 거예요.

기자: 남한에서는 그런 것은 없잖습니까?

이기숙: 그러니까 자기가 노력하면 노력한 것만큼 야근 일을 하면 야근 수당이 나오죠. 일하면 한만큼 돌아오는 것이 있잖아요. 노력하면 대가가 있잖아요. 경제적인 것은 자기 부지런함에 달린 거죠. 계획을 세우고 얼마나 알뜰하게 사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북한에서는 경제적인 계획도 없고 그저 하루 먹고 하루 살고 이런 것밖에는 없죠.

북한 청취자 여러분도 이 말을 들으면 놀라실 텐데요.

이기숙: 40년만에 만난 동창 친구들 정말 반가웠어요. 고향 소식도 듣고…

기자: 북한 동창을 만났단 말입니까?

이기숙: 네, 여기서 동창모임 다 해요. 온성에서 온 아이들 회령에서 온 아이들 동창모임을 다 해요. 이제는 우리 회사에도 탈북민들이 10명도 더 되는 것 같아요. 제가 1호고요.

기자: 회사에도 탈북자가 많이 일하는 군요?

이기숙: 네 많아요. 그리고 남자도 아르바이트 하는 아이들도 많고요.

기자: 동창들 만나서는 어떤 얘기를 나누셨나요?

이기숙: 어릴 적 얘기를 하고 가슴 아픈 소리도 많죠. 죽은 아이도 많고 오다가다 죽은 아이도 많고 지금 소식이 끊긴 아이도 많고 그래요.

남한에서 탈북자들이 고향 친구들을 만나 동창회를 한다 하니 정말 탈북자 3만명 이상이 남한에 산다는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이 씨는 풍족한 생활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정말 알뜰하게 부부가 벌어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니 불만은 없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고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할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이기숙: 우리 남편이 차를 샀어요. 새 차를 샀어요. 나 몰래 현금을 다발로 4천만원을 모아놨다가 차를 샀어요.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이라 차는 있었는데 이제는 며느리까지 보게 되니까 욕심에 아이들 전부 탈 수 있는 새차를 사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 봐요.

이제 막내만 대학에 입학하면 어느 정도 할 일은 다 했다고 믿고 있는 이 씨. 정년퇴직까지 건강하게 행복하길 바랍니다.

이기숙: 한 3-4년 전부터 통일부에서 하는 DMZ도 갔다 오고 판문점 견학도 가고 제주도에도 가고요. 은나하고 국내 여행은 거의 다녔고 은나가 대학 졸업하고 하면 운전면허 따서 차로 엄마하고 전국 방방곡곡 다 다닌데요.

제 2의 고향 오늘은 무산출신의 탈북여성 이기숙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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