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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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dle_house_b 사진은 성북동 국시집 메뉴.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흔 살에 딸을 낳고 비로소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됐다는 탈북여성이 있는데요. 특별한 것 없이 똑같게 느껴지는 일상이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생활이 좋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40대 초반으로 평안북도 구성 출신의 김례영 씨의 이야기 입니다.

김례영: 오늘은 손님이 좀 많았어요. 그래서 바쁘게 일했어요.

남한생활 10년이 되는 김 씨는 오늘도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점심시간 식당일을 했습니다.

김례영: 국수집에서 점심 때 서빙하고 있어요.

기자: 국수집이라고 하면 면 전문점인가 보군요?

김례영: 잔치국수, 콩국수, 들깨 칼국수, 얼큰 칼국수, 칼제비 이렇게 여러 가지요.

기자: 여름이니까 시원한 콩국수가 많이 팔리죠?

김례영: 오늘 같은 비 오는 날은 몽땅 얼큰이 칼국수, 칼제비 이런 게 많이 나갔어요. 콩국수는 보다 더 팔렸거든요.

김 씨가 탈북한 것은 1990년대 말 북한의 고난의 행군시절입니다.

김례영: 아버지가 아프지만 안았으면 우리는 살만 했어요. 사람이 아프니까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가 약도 써야 하고 하니까 식량을 꾸었단 말이에요.

평범하게 살던 김 씨 가족의 생활은 기울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병환과 북한에 닥친 경제난으로 인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바로 탈북인데요.

김례영: 전에는 장사도 좀 됐는데 고난의 행군이 되면서 힘들고 남는 게 없더라고요. 또 도둑을 세 번 맞고 보니까 완전 집안형편이 기울었어요. 아버지가 암이었는데 엄마는 살려보겠다고 돈을 빌리고 약을 사고 그렇게 3년이 되니까 이자가 붙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옆에 친구가 하는 말이 중국에 갔다 오면 빚도 갚고 잘은 못 먹어도 죽물은 먹을 수 있다 이러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는 제가 19살이었는데 엄마한테 쪽지를 써놓고 그렇게 중국에 갔었어요.

중국에서는 거진 10년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는 결국 불안한 신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한행을 했고 30대 초반에 남한에 도착한 김 씨는 우선 일자리부터 찾습니다.

김례영: 제가 원래 처음에 와서는 직장생활 했어요. 북구에 가면 안경 회사가 있는데 거기서 일하다가 대학을 다녔어요.

기자: 안경산업도 발달한 곳이 대구인데 생산공장에서 일하셨군요?

김례영: 안경을 만드는데 플라스틱을 가져다가 색을 입히고 굽고 코팅을 하는 그런 곳인데 1년 넘게 일했어요.

기자: 일하면서 대학을 다니신 거군요?

김례영: 간호 조무사 학원도 1년 다니고요.

기자: 조무사 자격증을 따셨고요?

김례영: 시험을 봐야 하는데 사회복지 대학을 다니면서 임신을 해서 시험을 못 봤어요.

조무사 자격증 시험을 본다본다 하면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 간호조무사 일을 할 것도 아니고 해서 미루다 보니 학원 공부를 마친 것은 오래됐지만 아직 자격증을 따진 못했습니다. 이제는 자꾸 나이를 먹어가면서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요.

김례영: 아이하고 못 놀아주니까 힘들죠. 내가 체력이 안 되요. 옛날에는 두 가지 세가지를 동시에 했어요. 학교 다니면서 새벽까지 알바 하고 했는데 지금은 못하겠어요.

처음 남한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려도 특별히 놀랍거나 좋았던 기억은 없습니다. 중국에 살 때 신분증이 없어 불안한 것이 없어진 대신 당장 먹고 사는 문제 그리고 북한에 송금할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기자: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놀라고 또 자유를 만끽하고 그랬었나요?

김례영: 아니요. 저는 그런 생각 못 했어요. 와서 그냥 힘들더라고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을 하려니까 생각이 많았죠. 일단 기초생계비를 나라에서 줬는데 이것 가지고 어떻게 살지? 북한에도 보내고 해야 하는데 하면서 이것 가지고는 안되겠다 싶어 고용지원센터를 찾아가서 일자리를 찾았죠. 그리고 한 일이 안경회사 일이었어요.

남한입국 탈북자는 만 35세 이전에 대학에 입학을 해야 등록금 지원을 해줍니다. 김 씨가 남한생활을 시작했을 때가 34살 이었으니까 대학에 입학할 것인가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망설임도 있었을 법 한데요.

김례영: 모르니까 궁금할 것도 없었죠. 알면 궁금해서 물어보겠는데 몰랐으니까요. 약간 알면서 정확히 모를 때는 전화를 해서 알아보는데 모르면 물어 볼 것도 없죠.

하나원에서 남한사회 전반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을 받고 또 지역사회에 나와선 하나센터가 있어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 씨는 그런 교육이나 지원에 관심을 두기 보다 일해서 돈을 버는 길을 택했습니다.

김례영: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죠. 처음엔 북한하고 비교가 되고 일한만큼 돈을 버니까 좋다고 생각을 했는데 보험을 들고 차를 샀으니까 월부를 내고 하다 보니까 돈을 벌어도 손에 쥐는 게 없어요.

정착초기보다 훨씬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나은 삶을 살고 있는데도 그때보다 행복이 배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남한생활 10년사이 결혼도 했고 딸도 낳았고 많은 변화를 가졌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물질적인 것에서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마음 먹기 나름이란 생각입니다.

김례영: 시간이 중요한 것 같아요. 순간 돈을 많이 벌자 이러는 것 보다 시간을 갖고 느긋하게 생각을 하니까 좋은 거 같아요. 이제 하나하나 계획을 세우고 살다 보니까 남들처럼 잘살지는 못해도 그냥 만족하면서 산다니까요. 남편하고 살면서 성격이 안 맞아서 정말 많이 싸웠어요. 처음에 애를 낳지 말고 둘이 살자고 하고 만났는데 언니들이 아이가 있으면 달라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애를 낳았는데 이제 남편하고는 문제가 없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까 책임감이 더 생기고 엄마가 더 보고 싶고 하더라고요.

남한에서 낳은 딸은 이제 5살이 됐는데요.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됐고 북에 있는 엄마가 더 그리워 집니다. 철없이 편지 한 장 써놓고 집을 나섰던 것이 이제 20년 세월이 지났는데요. 북한 식량사정이 어렵다는 뉴스를 접할 때 마다 걱정입니다.

김례영: 이제 4월하고 10월 1년에 두 번 엄마한테 돈을 보내주거든요. 요즘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돈은 전달이 됐다고 생각해야죠. 안됐다고 생각하면 더 마음이 힘들어요. 사진도 보내오고 전화로 받았다고 하니까 받은 줄 알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걱정이 산처럼 쌓이면서 머리가 아파집니다. 그럴 때면 그냥 노래를 틀어놓고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싶어지는데요

김례영: (노래 한잔해)월요일은 원래 먹는 날 한잔해. 화요일은 화가 나니까 숙취에 한잔 목이 말라 한잔. 금요일은 불금이니까. 밤새도록 한잔…

남하고 비교하지 않고 평범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한다고 말하는 김례영 씨. 북한에 있는 어머니의 건강 그리고 딸과 남편의 건강 모두가 아프지 않고 살면 좋겠답니다.

김례영: 마음만 편하면 되니까요. 김치 한쪽에 밥을 먹어도 걱정 없으면 되죠. 오늘도 고생했어. 건강해야해 그래야 딸 지우를 봐줄 수 있으니 건강하자, 밥 잘 먹고. 건강해야 한다는 것 밖에는 없어요.

제 2의 고향 오늘은 김례영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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