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어요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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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특별기획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출연진들. 사진 왼쪽부터 이동건, 김정은, 박신양.
SBS 특별기획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출연진들. 사진 왼쪽부터 이동건, 김정은, 박신양.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사는 탈북자 중에는 북한에서 본 남한 드라마나 영화가 탈북 동기가 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풍요롭고 멋지게 사는 모습에 반해 자신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었다는 건데요. 오늘은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박수향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수향: 2009년에 탈북했고요. 한국에 이모가 먼저 와 계셔서 저는 이모가 보낸 브로커를 통해 한국에 오게 됐어요.

박 씨는 19살 바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중대 결심을 하고 가족들 몰래 사고를 칩니다. 그것이 가출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출가였는지 생각할 여지도 없이 말입니다.

박수향: 제가 국경지역에 살았거든요. 그래서 북한에 있을 때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봐서 어린 마음에 한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나도 드라마처럼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이모가 오라고 했을 때 가족들이 나중에 걱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저런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다는 마음이 훨씬 컸기 때문에 선뜻 이모한테 간다고 약속을 하고 가족들한테도 비밀로 하고 탈북을 했어요.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예쁜 옷을 입고 자유롭게 생활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물론 잘 만들어진 가공의 이야기였지만 눈에 보이는 모습은 현재 자신이 사는 곳보다 못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박수향: 일단 북한에서 한국을 교육하는 것 자체가 한국은 못사는 나라고 도와줘야 한다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13살 때 처음 한국 드라마 첫사랑이란 드라마를 봤는데 내가 알던 한국이랑 너무 다른 거예요. 옛날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사는 나라로 보여지는 거예요. 그 이후로 한국 드라마를 계속 봤는데 천국에 계단, 슬픈 연가, 올인, 파리의 연인 등 20편 넘게 한국 드라마를 봤던 것 같아요. 그런 것을 보면서 전반적으로 한국은 잘사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드라마 자체가 부잣집, 회장님도 나오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환상이 컸던 것 같아요. 나도 한국 가면 저렇게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환상도 크고 해서 동경이 컸지 않았나 싶어요.

탈북해서는 바로 남한으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보통 다른 탈북자들이 제3국을 통해 긴 여정을 거쳐 남한에 도착하는 것과는 달리 최단시간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비용도 일반 탈북자들이 지불하는 것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박수향: 북한에서 떠나서 일주일 만에 한국에 왔거든요. 중국에서 배를 타고 왔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굉장히 빠르고 쉽게 왔어요. 2009년 당시 브로커에게 갚아야 하는 비용이 1,200만원이었어요. 저는 솔직히 한국에 올 때 내가 브로커 비용을 갚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왔는데 한국 오자마자 드라마처럼 잘 살 줄 알았는데 빚이 생겼던 거예요. 그래서 한국 오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돈을 벌어야 했어요.

탈북자는 남한에 입국하면 나라에서 정착금, 임대주택제공, 의료비용과 학비지원 등 각종 혜택을 줘서 정착을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탈북해서 남한에 도착할 때까지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는 본인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박 씨는 남한입국 후 몇 년 동안 힘든 생활을 하게 됩니다.

박수향: 일단 브로커 비용은 1년 반을 일해서 갚았는데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한국에 오겠다고 하는 거예요. 한국에 데려 오려면 브로커 비용이 필요하잖아요. 저는 북한에서 한국에 대한 환상이 커서 왔는데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거든요. 저의 가족들 역시 한국에서는 그냥 돈을 쉽게 벌고 잘사는 구나 하는 인식만 있었지 돈을 어떻게 벌고 하는 정보는 없기 때문에 환상을 가지고 가족들도 올 텐데 오자마자 가족들한테 빚이 생긴다면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가족들 데려오기 위한 브로커 비용을 내가 마련해야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2년반 3년 가까이를 일해서 1,800만원을 모아서 저희 가족 3명을 데려 왔어요. 그렇게 가족 데려오는 비용을 버느라고 거의 4년 정도를 한국에 와서 일했던 것 같아요.

10년전 600만원은 미화로 계산해 5천 700달러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가족을 남한으로 데려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지불했던 비용이 1만 7천달러가 정도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 없던 박 씨가 스무 살에 그 큰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 대단한데요.

박수향: 그 상황에는 지금 돌아보면 저도 어린 나이에 고생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때 솔직히 어린 나이에 일만 하면서 정말 힘들었고 울기도 정말 많이 울었고 가족들 몰래 탈북을 해서 내가 지금 벌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어요. 특히 몸이 힘든 거는 참을 수 있는데 너무 외로운 거예요. 가족들 보고 싶고 그런 생각에 더 힘들었던 시간이었는데요. 그래도 제가 참을 수 있고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조금만 참으면 우리 가족들 모두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하나만으로 그때는 정말 힘들고 했지만 동시에 힘이 났던 것 같아요. 내가 조금만 견디면 가족들 다 올 수 있으니까 그때는 정말 지금보다 훨씬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견디자 견디자 이런 생각으로 그때는 버텼던 것 같아요.

기술이 있고 전문직 일을 했으면 급여도 많았겠지만 단순 노동일이었기 때문에 보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정말 티끌 모아 태산이란 표현이 딱 맞는 말인데요. 왜 힘들게 돈을 모아야 하는지 그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힘든 시간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박수향: 저는 4년동안 편의점에서만 일했는데 그때 당시 제 기억으로 시급이 3천원대였는데 하루 10시간씩 한 달에 한 번 쉬면서 일해도 100만원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친구들과 영화관 가서 영화도 보고 싶었는데 그런 것도 못하고 그냥 모으기만 했던 것 같아요.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요.

말도 같은데 북한주민이 남한에 가면 어떤 것이 힘든지 한 번 들어볼까요?

박수향: 예를 들면 담배가 가지 수가 정말 많잖아요. 그걸 외우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그 담배 이름을 말하지 않고 줄여서 말하는 거예요. 팔라멘트 라이트 하나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는데 팔라 하나 주세요. 이러는 거예요. 그런 물건 이름 외우는 것이 정말 어려웠고 어떤 손님은 급하게 들어와서 밴드(반창고) 어디 있어요? 하는데 밴드가 뭔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 없다고 했는데 그 손님이 바로 제 앞에서 가져오는 거예요. 그런 에피소드가 많아서 초반에는 몰라서 겪는 실수들 황당했던 경험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남한에 도착해 가족을 모두 데려 오기까지 4년정도는 정말 힘들었지만 가족과 재회 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제일 하고 싶은 것부터 합니다.

박수향: 그래서 가족이 오자마자 제 친구들은 다 대학을 다니고 있었거든요. 저는 그게 너무 부러운 거예요. 나도 공부하고 싶다. 또래 친구들처럼 사는 것이 너무 부러워서 가족이 오자마자 공부를 하겠다고 하고 가족들이 2013년에 왔는데 그 해 9월에 대안학교를 다녔어요. 대학에 가려고요. 그리고 2014년에 대학에 입학했어요.

기자: 어느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셨나요?

박수향: 가톨릭 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들어갔어요.

이제야 비로서 북한에서 꿈꾸던 남한생활의 시작입니다. 같은 또래들과 대학 교정을 거닐고 강의실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된 박수향 씨.

박수향: 공부를 하는 게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북한에서 하는 방식과 달랐는데 아무도 배워주지 않고 갑자기 어느 날 수업을 듣는데 리포트를 내라는 거예요. 리포트를 어떻게 쓰는지 조차 모르는데 제출을 하고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고 엄청 당황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수업을 들을 때도 남한 친구들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고 외래어 쓰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저희한테는 그게 무슨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 안될 때도 있고 그리고 특히 토론 수업이 어려웠어요. 북한에서는 내 의견을 한번도 내 본적이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 의견을 내야 한다는 거예요. 생애 처음 하는 거라 그것도 어려웠고…

대학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수업 첫날 자신이 북한에서 왔고 대학입학도 다른 친구들 보다 나이를 먹어 들어온 편이라면서 모르는 것이 많으니 좀 도와 달라고 솔직히 말했던 것이 주요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같은 취미활동을 하는 소모임 즉 동아리 활동을 통해 남한정착에 성공합니다.

박수향: 그냥 제가 제일 학교를 재미있게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동아리 활동이었어요. 남북청년 동아리였는데 북한에 관심이 있는 한국청년이랑 탈북 대학생들이다 보니까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에 가서 수다 떨고 같이 북한 음식도 만들어서 축제 때는 판매도 하고 동아리 활동 했던 것들 때문에 대학생활이 즐거웠던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무산 출신의 박수향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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