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통한 12년만의 모녀 상봉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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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탈북민 고령자 세대를 방문한 탈북자 정착 교육 기관 하나원 교육생이 탈북민의 손을 잡고 있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탈북민 고령자 세대를 방문한 탈북자 정착 교육 기관 하나원 교육생이 탈북민의 손을 잡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생이별한 가족이 서로를 그리워 하며 눈물로 지낸 12년 세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이들 모녀는 남한 땅에서 상봉합니다. 그런데 그 헤어져 살았던 시간만큼이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시간도 필요해 보입니다. 오늘은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12년만에 큰딸과 재회한 김순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순희: 너무나 행복하죠. 그런데 12년이란 세월이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더라고요.

큰딸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동안 해주지 못한 사랑을 몇배로 갚아 줄 것이라고 말했던 김순희 씨. 김 씨는 딸을 찾았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됐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다고 저희 RFA 방송에 전한바 있습니다. 그후 1년이 지나 기자가 전화를 했을 땐 목소리에 맥이 하나도 없어 좀 슬프게 들리기까지 했는데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김순희: 서로가 오해를 많이 가지게 되더라고요. 나와서 혜련이도 엄마에 대한 원망이 있어서 부산에 집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안받았더라고요. 나와서 알고 보니까 엄마에 대한 오해가 많더라고요. 그래도 부모 자식지간이라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정을 붙이니까 오해가 풀리더라고요.

기자: 엄마에 대한 오해는 뭐였던가요?

김순희: 북한에 있을 때 내가 혜련이를 강하게 키우려고 때리고 했던 것을 혜련이는 동생 향심이만 좋아하고 자기는 너무 차갑게 대했다고 했고 와서도 말하는 것이 엄마는 향심이를 잃어버렸으면 몇 천리를 찾아 헤맸을 텐데 자기는 찾지 않았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동생도 말했어요. 엄마가 12년을 어느 한순간 편하게 산적이 없고 마지막에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했거든요.  옆에서 사람들도 많이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를 못 찾아서 화병에 죽자고 하다가도 너를 만난 다음에 죽겠다고 옆에서 말을 많이 해주고 내가 옆에서 뭐라도 챙겨주려고 하고 하니까 조금씩 풀리더라고요.

기자는 2015년 3월 “내딸 혜련이를 찾습니다.” 그리고 2016년 10월 “큰딸 윤혜련을 찾습니다”를 통해 엄마가 딸을 애타게 찾는다는 방송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기적적으로 2017년 9월 큰딸 혜련이를 찾았습니다라는 방송을 기쁜 마음으로 전해드렸었죠.

전쟁으로 남과 북이 갈리고 가족이 서로 만나는 남북이산가족상봉 행사를 진행하는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그런데 탈북으로 인한 또 다른 형태의 이별도 있어 안타깝습니다. 김 씨의 사연입니다.

김순희: 탈북을 같이 하려고 하다가 셋이 넘다가 잡히면 남한행으로 보기 때문에 잡히면 다 죽기 때문에 그래서 혜련이를 놔두고 동생만 먼저 업고 넘었거든요. 혜련이가 그때당시 자기가 남겠다고 했고 한 달만

기다려라 가서 연락을 할께 했는데 연락이 없으니까 혜련이가 그냥 넘었거든요. 후에 알고 보니까 연락이 오지 않아서 넘어오는데 총구가 등 뒤에서 자기를 겨누고 서라 서라 하면서 자기 혼자 고생을 많이 했더라고요. 중국에서 12년 고생 또 탈북하면서 한 고생에 대한 원한이 쌓여서 엄마를 많이 원망했더라고요.

2006년 12월에 벌어졌던 상황입니다.

김순희: 강짜로 얼음 강판을 넘었더라고요. 경비대가 총을 들이대면서 쪼그만 것들이 강을 넘는다고 너희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했데요. 그런데 그때 엄마 말이 생각났다고 하더라고요. 연선에서는 총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너희 쏘지는 않을 것이다 해서 아는 아이 손목을 잡고 그냥 넘었데요. 강을 넘어서 고생을 많이 했더라고요. 중국에서 매도 많이 맞고요

생이별을 하고 12년만에 큰딸을 만나 알게된 사실인데 딸은 엄마를 찾아 도강을 했고 탈북한 이후 강제북송까지 한차례 당했습니다. 혼자 갖은 고초를 견디며 남한까지 온 딸을 앞에 두고 김 씨는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 지 적당한 말을 찾기 힘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 세월 김 씨도 손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김순희: 심양까지 내가 말도 모르는데 딸 찾겠다고 버스타고 가서 헤매는데 그 우리 딸을 넘겼다는 브로커를 찾았는데 딸 말로는 그 사람이 넘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넘겨서 심양의 어느 여자한테 팔았다고 했는데 딸이 와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더라고요

기자: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김순희: 글쎄 왜 그렇게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딸이 와서 말하는 것은 맞지 않거든요.

기자: 엄마를 딸을 찾아서 백방으로 노력을 했는데 딸도 분명 엄마가 동생하고 어디 살고 있을 것이다 해서 찾으려고 했을 텐데요.

김순희: 그랬데요. 그래서 자기도 심양에 있으면서 한국 사람도 많이 알고 한국으로 오는 선도 많이 알았는데 엄마가 혹시 동생을 데리고 북송 됐을까봐 그럼 자기가 중국에 있어야 엄마를 다시 구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자기도 남한에 오지 못하고 중국에 그냥 남아있었데요.

모녀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았던 것인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일이 현실이 됩니다.

기자:  12년동안 엄마에 대한 미움도 있었지만 걱정도 됐기 때문에 계속 중국에 있었던 것 아닙니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만나게 된거죠?

김순희: 혜련이가 한국 회사에 다니면서 약게 살았더라고요. 중국말도 잘하고 하니까 한국 관광객이 가면 가이드도 하고 했더라고요. 한국 기업에 가서 일도 하고 하니까 한국 사람과 같이 산악회도 다니고 했는데 거기선 우리 혜련이를 완전한 중국 조선족으로 알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살다보니까 산악회도 같이 다니고 했는데 산악회 회장이 이만갑 방송을 봤데요. 우리 혜련이가 언젠가는 엄마를 찾기 위해 이름도 바꾸지 않고 살았는데 방송을 보니까 혜련을 찾는다고 하고 이름하고 나이하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자기가 아는 혜련이 맞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장을 불러서 혜련이 엄마가 찾는 사람이 우리가 아는 그 혜련이 맞는 것 같으니까 물어봐라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큰딸 그리고 그것은 오해라며 엄마의 진심이 통하기를 바랬던 김순희 씨. 그것은 남한에서 극적인 상봉이 있고 지난 1년동안의 시간이었습니다.

김순희: 오해가 풀려서 엄마 곁으로 왔지만 조금 앙금이 남았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풀려서 매일 엄마한테 전화도 하고 다시 엄마 곁으로 오겠다고 집을 다시 배정 받아서 엄마를 돌보며 살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도 걱정 되는 것이 또다시 딸하고 오해가 생길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딸에게 모든 것을 맞추면서 살거든요.

너무도 보고 싶던 얼굴이었기에 그리고 함께 하고 싶었던 핏줄이기에 지금 이시간이 소중한데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리고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김순희 씨의 건강은 더 나빠졌습니다. 뇌수종과 협심증을 앓고 있는데 엎친데곂친 격으로 얼마전엔 교통사고까지 당했기 때문입니다. 큰딸 혜련이와 두쨋딸 향심 씨는 이런 엄마의 건강이 제일 걱정입니다.

김순희: 딸들은 하는 말이 우리 가족이 전부 모였으니까 이제는 더 바랄 것은 엄마 건강이니 아무것도 하지말고 병원에서 주는 약 잘 챙겨먹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해요. 그래야 자기들 시집가면 손주들 볼 수 있으니까 엄마 오래살라고 하거든요. 자식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는지…자식이 있으니까 그런 말도 들어보고…

시간을 되돌려 아픔이 지워질 수만 있다면 어떨까? 탈북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지는 않는가 하는 질문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순희: 안타깝고 원망 스럽지만 그래도 거기서 굶으면서 고달프게 구박 받으면서 사는 것 보다는 여기 와서 힘든 세월이 좀 있었지만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벌이가 생겨서 자유롭게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12년만에 남한에서 딸과 재회한 김순희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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