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살자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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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양시 안양4동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에 '민들레 쉼터'라는 가게를 창업한 안양대 학생들이 가게를 찾아온 고객들에게 주력 상품인 가락국수를 서빙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 안양4동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에 '민들레 쉼터'라는 가게를 창업한 안양대 학생들이 가게를 찾아온 고객들에게 주력 상품인 가락국수를 서빙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이 목표를 정해 정신없이 달리다가 그 목표를 달성하면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면서 정신과 육체가 무너져 버리는 건데요. 탈북자들은 남한에 가서 뿌릴 내릴 때 북한에서 어려웠던 생활을 잊지 말고 초심으로 살자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이채원(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채원: 나만을 위해 살았더라면, 나만을 위한 선택이라고 하고 움직였더라면 그런 생각을 해봐요.

이제 40대 중반이 된 이 씨는 북한에서 먹고 살기 힘들었던 고난의 행군시절 탈북합니다. 20대였던 탈북당시를 떠올리면 좀 더 빨리 남한행을 결심하지 못했던 아쉬움도 있지만 그렇다고 부질없이 과거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결정지어졌던 것이 아닌가? 그런 얘길 들려줍니다.

이채원: 북한에서 19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했는데 그때 한국에서 현대자동차 3대를 들여왔데요. 그때 공학박사 5명을 데려다가 3대를 뜯었다가 다시 조립을 하라고 했데요. 북한에서 똑같이 그 차처럼 만들기 위해서요. 그런데 한 사람도 다시 조립을 못했다는 거예요. 외삼촌이 그런 얘기를 하시면서 한국이 정말 대단한 나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탈북해서는 바로 남한에 가지 못하고 중국에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다 일어 터졌는데요.

이채원: 제가 그때 국경절 60주년이었는데 중국공안에게 잡혀 일주일을 있었어요. 같이 사는 분이 중국 돈 8만원을 주고 빼냈어요. 그리고 제가 한국으로 왔어요.

10년을 중국에 살았지만 불법신분으로 늘 불안했고 막상 중국 공안에게 잡혀 북송 직전의 위기에까지 몰리다 보니 더 이상 중국에 있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리고는 말로는 듣던 남한행을 하게 됩니다.

이채원: 제가 텔레비를 통해 자본주의를 익히고 왔지만 현실에 딱 부딪치니까 달랐어요. 하나원에서 나와 집에 들어가니 8평이었어요. 3일 동안 아무생각 없이 누워만 있었어요. 과연 내가 자본주의 한국에 와서 어떻게 사는가? 그냥 버려진 느낌이었어요. 텔레비에선 좋은 것만 봤거든요. 내가 이런 생활을 하리라고는 모르고 왔으니까요. 16평인줄 알았는데 8평인거예요. 그래서 다시 신청을 해서 그 다음해에 17평을 받은 거예요.

탈북자는 남한에 가면 나라에서 주거지원으로 임대아파트를 주는데 혼자인 경우 제일 작은 평수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살게 될 지역에 빈집에 없으면 당장 옮길 수 있는 거처로 가게 되는데 이것이 자신이 알고 있었던 평수보다 작아서 처음엔 실망이 컸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잘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는데요.

이채원: 제가 북한에서는 성분이 나쁘다보니까 대학을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 하고 공부를 안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난 여기서 뭔가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6개월간 기초수급비를 받는 동안 배우자고 생각을 한 거예요.

기자: 그리고 학교를 간 겁니까?

이채원: 네, 6개월 알바를 하면서 컴퓨터 학원을 다니면서 자격증을 땄어요. 그때는 한글 엑셀 ,파워 포인트 등 기본적인 것을 땄어요.

기자: 누가 컴퓨터를 배우라고 했나요?

이채원: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정보화 시대기 때문에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한 거죠.

이 씨는 남한에서 전문대학교 2년 과정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합니다. 처음에는 학원에서 컴퓨터를 익히고 그 후 대학진학을 했습니다.

이채원: 제가 알바도 하고 그래보니까 저희가 첫째 문화차이 때문에 대화가 잘 안 되는 거잖아요. 한국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첫째 배우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 사람들과 많이 소통하는 것이라 대학에 간 거예요.

대학에 입학했을 때가 마흔이었습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곱절은 많았는데요.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 다니던 때가 젤 좋았다고 하네요.

이채원: 당시는 한국말도 서툴고 하니까 이상한 눈빛으로 보더라고요. 그때 어느 교수가 나를 학생들에게 소개해 주더라고요. 나가서 그랬죠. 나는 탈북자고 당당하게 말한다 대학에 온 이유는 한국에 대해 더 잘 알고 친해지고 싶어 왔다 또 한국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젊은이들이 잘 알지 않는가? 그랬죠. 그리고 정말 잘 지냈어요.

학교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면 일을 하면서 용돈을 벌어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가지에만 매달려도 정신이 없는데 경제활동과 학교공부를 병행 하자니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보통 이런 경우는 후회 같은 것을 하게 되는데요.

이채원: 가끔은 했어요. 하다가도 그냥 초심으로 살자. 저희가 한국에 올 때를 생각하면서 초심을 살자했죠. 알바를 하는데 힘든 게 아니더라고요. 저는 6년 동안 초심을 잃지 말자는 말을 하면서 살았던 거 같아요.

보통 주 40시간을 일하지 않고 시간급을 받으면 하는 일을 알바라고 하는데 이 씨가 했던 일은 이런 겁니다.

기자: 시간당 얼마를 받습니까?

이채원: 식당일을 하면 시간당 6천을 받아요. 그리고 아산에서 도로 공사장에서 측량기사를 도왔는데 그때는 시간당 7천원을 받았어요.

기자: 하루 벌면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을 버는 겁니까?

이채원: 그 돈으로 한 보름동안 생활비로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채소를 사고 소소한 것을 할 수 있는 돈이었어요. 작은 돈이 아니더라고요. 그때 처음 돈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느꼈어요. 그래서 진짜 더 악착같이 했던 것 같아요.

남한에서의 새로운 삶이 팍팍하게 느껴지기도 한데요 이럴 때 노래방을 찾습니다.

이채원: 노사연의 바램이요. 노래방에서 잘 부르는데 노랫말에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게 맘에 들어서 노래가 좋아요.

(노사연 바램)

이 씨는 최근 2박 3일 동안 충북 화양계곡부터 해서 강원도 설악산, 경포대, 대포항까지 자신이 운전을 해서 여름휴가를 보냈습니다. 남한생활 3개월째부터 운전을 했는데 일이 잘 안 풀릴 때 고속도로를 달리면 답답한 마음이 뻥 뚫려 좋답니다.

이채원: 저는 한국에서 운전할 때 도로가 쭉 뻗어서 좋고 터널 지날 때 너무 좋아요. 터널 들어설 때는 어둠이 있다가 끝이 보이잖아요. 나도 언젠가 좋은 날이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저는 그냥 달리기만 해도 좋더라고요.


작은 것에서 찾는 행복. 이 씨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채원: 행복을 느끼는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컴퓨터 자격증을 따고 그랬을 때에요. 삶에 대한 팍팍한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 이런 것은 잘 몰랐는데 자격증을 하나하나 따고 했을 때 내가 이 나이에도 뭔가 할 수 있구나. 이런 행복감으로 즐겁게 지냈던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이채원(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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