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해야 행복해요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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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성들이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강의실에서 창업 교육을 받고 있다.
탈북 여성들이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강의실에서 창업 교육을 받고 있다.
RFA PHOTO/노재완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힘든 육체노동을 한 후 다음날 아침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보통은 너무 피곤하니 하루 쉬었으면 좋겠다 이러지 않으시는지요? 그런데 일을 또 할수 있어 감사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11년차 허초히 (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허초히: 하루하루 너무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잖아요. 세수를 하고 단정하게 하고 출근할 수 있다는 그 마음이 너무 좋은 거예요.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허 씨는 2007년부터 남한생활을 합니다. 남한에 가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일을 안하고 쉬면 오히려 몸이 아프고 불안해진다고 했습니다. 허 씨가 고향을 떠난 것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허초히: 제가 97년에 탈북해서 중국에서 살다가 2003년에 북송 됐어요. 나가서 6개월 단련대에 있다가 다시 단련대에서 나와서 도강하다가 잡혀서 북송됐어요. 그리고 2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서 2006년에 나왔어요. 그리고 한 달 있다가 다시 탈북했어요. 거기서는 살수가 없었어요. 교도소 갔다가 오니까  인민반장이 사람을 시켜서 수시로 확인을 했어요. 탈북할까봐요.

탈북때 이야기를 하면 눈물부터 흐른다고 했습니다. 집을 떠나서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브러커를 만납니다. 먹고 살 수 있게 담배장사를 해줄 수 있다는 말에 탈북하게 됐습니다. 그후 인생은 인생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중국에서의 강제북송 그리고 북한에서의 감옥생활 끝에 결국 남한에 정착 합니다.  30대 나이에 경험한 평안남도 11호 증산 교화소의 2년은 아직도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허 씨는 11년 6월 남한땅을 밟았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허초히: 꿈인가 했어요. 식당에 들어가서 부폐식으로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서 먹을 때 그때 진짜 알았어요. 한국이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을 보고 운동을 하고 또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간식을 주는데 우리가 북한에서 와서 그런가 하는 오해도 있었어요.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깨끗하고 냄새가 나지 않는 화장실과 길거리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고 자신이 남한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현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는 누구의 지시에 따라서 작업에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아서 일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허초히: 처음에는 월급날이 다가오면 너무 좋았어요. 일한 대가를 받는 다는 것이 좋았어요. 2007년부터 일했는데 그때 최저임금이 4,580원인가 했어요. 한 달 일하면 150만원 정도였어요. 적은 돈이지만 그 돈을 받아 너무 좋았어요. 저축도 하고요.

기자: 북한에서는 뭘 하셨나요?

허초히: 북한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기중기를 운전하다 탈북했거든요.

기자: 북한에서 기중기 운전을 하셨으면 남한에서도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직종인데 왜 그 일을 안하셨어요?

허초히: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하나원 수료하고 나와서 4일 쉬고 바로 회사일을 시작했어요.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내 기술을 써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우왕좌왕 했죠. 나중에 공부를 해서 내가 아는 기술을 써먹어야 겠다 생각했을 때는 벌써 나이가 40이 넘은 거예요. 그냥 한국 사람들하고 회사에서 웃으면서 지내고 일하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다른 생각을 못했어요.

회사생활을 만 9년 했다는 허 씨. 남한직장 생활에 어려움도 있었을 법 한데요.

허초히: 없지않아 있어요. 회사생활 하면서 문화차가 너무 있다 보니까 직원들과 드문히 싸우는 경우가 있었어요.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데 저는 오해를 해서 기분 나쁘게 인상붉힌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솔직히 상대가 좋게 얘기 하는 것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열등감에 싸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기자: 그런 남한문화를 받아들이기까지 몇 년이 걸리던가요?

허초히: 저는 한 6년 걸렸어요.

처음부터 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고비가 있는 법이고 그 순간을 넘기면 한결 편해지는 법인데요. 허 씨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보상을 받습니다.

허초히: 내가 아침에 일어나 내 몸을 움직이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것이잖아요. 저는 회사생활이 해를 넘기면서 그 사람들과 같이 웃으면서 아침에 나가면 얼굴보고 저녁에 헤어지고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계속 시간이 지나고 적응이 되니까 가족같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좀 편하게 사는 법은 없을까 하고 가끔씩은 잠시나마 즐거운 공상을 할 겁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일을 하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허 씨가 좀 이상해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허초히: 제가 솔직히 한국에 와서 간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어요. 그때는 진짜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았어요. 잘살자고 왔는데 죽는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수술을 받고 지금 완치가 되면서 생각했어요. 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진짜 북한에서 하지 못했던 것을 전부하고 열심히 살아서 부모에게 효도하자는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남보다 더 열심히 살고 항상 일을 하면 즐겁고 그런 보람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건강도 챙기면서 열심히…

탈북하면서 또 북한의 감옥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밟았고 남한에서 암 수술을 받으면서 저 세상 문턱을 넘을뻔 했던 허 씨에게 몸을 움직여 일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허 씨는 남한의 자유를 이 순간 느낀답니다.

허초히: 차를 운전할 때요. 저희가 북한에 있었으면 솔직히 어떻게 내 이름으로 된 차를 운전할 수 있겠어요. 운전할 때가 제일 뿌듯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왔다는 실감이 나요. 또 일한 것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좋아요.

기자: 운전을 하고 다니시는군요

허초히: 네, 6년 됐어요.

기자: 이제는 차 운전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겠군요.

허초히: 네, 저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온 사람 대부분이 너도 타는데 나라고 못타겠니 하면서 다 좋은 차를 타려고 하잖아요. 다 운전을 하잖아요.

얼마전 다니던 회사가 부도를 맞으면서 지금은 잠시 공사장을 돌며 현장 노동을 하고 있는데요. 무슨일을 하던 일에대한 두려움은 없답니다. 허 씨는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꿈을 마음에 간직한채 웃으며 일하고 있습니다.

허초히: 저희도 그렇지만 장애인들이 힘들어 하시잖아요. 앞으로 돈을 벌어서 장애인을 돕는 일을 하고 싶고요. 저는 통일을 원하는데 앞으로 통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통일이 되면 꼭 고향에 가는 것이 소원이예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허초히(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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