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은 도전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10-20
Share
online_study_b 광주 남구 광주대학교 도서관에서 재학생들이 온라인 강의 등 비대면 방식의 수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픔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북한에서 또는 탈북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은 남한에 가서도 심한 마음의 병을 앓게 됩니다. 오늘은 대학진학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만들겠다는 강연화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강연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또 자유롭게 살려고 온 건데 저를 보면 그냥 유리병 안에 갇힌 그런 것을 상상하면 딱 맞을 거예요.

이제 남한생활이 16년차가 되는 강 씨는 그 동안 심한 마음의 병을 앓았습니다. 어찌 보면 그 고통은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이런 아픔은 탈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강연화: 2000년에 탈북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먼저 탈북 하고 저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있어야 했는데 어떻게 살아갈만한 형편이 안됐어요. 아버지가 떠나고 난 후에 산에서 한 4개월을 쌍둥이 둘하고 딸, 엄마 하고 산에 파놓은 방공호(참호) 같은 곳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눈이 오고 서리가 내리니까 겁이 나더라고요.

강 씨가 하루 아침에 집도 없이 산으로 가야 했던 사연은 이렇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 아버지가 중국에 있는 친척에게 중국 돈 3만 위안을 방조 받아서 식량을 마련하고 가자미 잡는 돛배를 구입합니다. 돈벌이가 좀 되고 동네에 소문이 나자 난데없이 보위부에서 들이닥쳐 남한 안기부 간첩자금을 받았다며 아버지를 잡아간 겁니다.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쓴 강 씨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그 와중에 강 씨는 쌍둥이 아들을 잃게 됩니다.

강연화: 음식 같은 것은 제가 새벽 1시쯤 농장에 나가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 벼를 조금씩 잘라서 왔어요. 벼가 다 익어서 묶어 놓을 때니까 낮에는 이삭을 줍고 밤에는 아직 수확을 안 한 것이 있으면 조금씩 잘라오고요.

기자: 그렇게 모아봐야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그 볍씨는 어떻게 했습니까?

강연화: 햇빛에 말려서 양말에 넣어서 돌멩이로 찧으면 껍질이 벗겨져요.

기자: 정말 하루 하루 연명하는 것조차 힘들었겠어요.

강연화: 그렇죠. 아무것도 없이 산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거든요. 엄마 하고 나하고 두 명이서 살면 좀 나은데 아이들이 있으니까 어디 가기가 힘든 거예요.

당시 강 씨의 나이가 29살. 어렵게 중국으로 탈북해 그곳에서 4년을 살다 딸만 데리고 남한으로 갑니다.

강연화: 마트에서 캐시어로 1년 반을 일했고요. 그리고 얼마 전까지 다니던 회사가 의료기 부품 생산 회사에요. 내과 외과, 산부인과에서 수술할 때 사용하는 바늘 관련 제품을 만드는 회사였어요.

남한생활 시작은 식용품 가게 계산원으로 그리고 그 다음 직장생활을 했는데요. 다니던 회사는 올해 초까지만 다니고 그만 뒀습니다. 10년 넘게 다녔던 회사였지만 일하던 내내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강연화: 뭔가 저희는 동남아를 거쳐서 남한에 오다 보면 도착하는 나라마다 적응을 하면서 살아야 해요. 그런데 아무래도 거쳐온 나라는 공산주의 여기는 자본주의 나라잖아요. 여기는 나를 위주로 살더라고요. 매 순간 마다 우리는 일할 때도 남보다 열심히 항상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뒤에서 동료들은 “뭐 한다고 저렇게 열심히 할꼬” 이렇게 수군거리는 거예요. 저희는 항상 없는 데서 살다 보니까 그냥 열심히 사는 것이 일상적인 것인데 “뭐 한다고 저렇게 열심히 하나” 이런 말을 듣게 되더라고요.

간부가 지시를 하면 그대로 수행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은 강 씨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좀 이상하게 보였나 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강 씨는 퇴사를 하고 대학진학을 합니다.

강연화: 그 계기는 그냥 나를 지키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거예요. 애들을 잃고 이러다 보니까 예민한 부분들이 조금 있죠. 우울증도 오고 아프다 보니까 신경도 예민해지고 또 제 성격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잘해야 한다. 그런 것도 있다 보니까 나를 변화 시켜서 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어요. 또 자식한테도 뭔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제가 늘 일만 하면서 살아오다 보니까 딸하고 얘기를 하다 보면 대화가 잘 안되더라고요.

북한에서 함께 온 딸은 이제 26살 성인이 됐습니다. 누구보다 엄마를 이해해 줬으면 좋으련만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습니다. 좀 더 딸과 마음 속의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안습니다. 이런 것이 강 씨를 뒤늦게 대학에 가게 했는지 모릅니다.

강연화: 많이 자극이 됐죠. 항상 딸이 엄마 하고 얘기를 하면 갑갑하다는 거예요. 딸은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놀면서 들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제가 정확하게 답변을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40대 중반에 대학 공부를 한다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닌데요. 우선 다니던 직장을 그만 뒀으니 매달 받던 월급을 못 받고 수입이 없어지니 경제생활에 압박을 받습니다. 물론 대학 등록금도 적지 않은 돈이고요.

강연화: 교육청에서 학력 인증서를 받아서 학교에 장학금 신청을 했어요. 장학금을 받으면서 토요일 일요일에는 알바를 해서 용돈을 벌어야 하고 책 같은 것은 벌어서 충당하고 알바를 하면서 공부 하려고 계획은 그렇게 잡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강 씨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올 가을 학기에 등록을 하고 대학공부를 시작했는데 조금 긴장되는 것도 있지만 마음은 즐겁기만 합니다.

강연화: 너무 재미있고요. 일단 재밌어요. 제가 원하는 것을 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재미있고 각오는 여기서 4년동안 자격증을 3개 정도 따고 마지막은 박사학위까지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기자: 이제 뭔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신 것 같아요.

강연화: 네, 이것은 저하고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노년기에 접어들기 전에 공부를 해서 뭔가 해보려고요.

기자: 남한 생활이 16년이 됐는데요. 물론 그 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지만 좋은 일도 분명 있었을 것 같아요. 어떤 것이 좋았나요?

강연화: 좋았던 것은 굉장히 많죠. 북한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을 해야 하니까요. 여기처럼 일해서 월급을 받아 쓰면 되지만 북한에서는 그게 안됐거든요. 여기서는 일해서 먹고 살잖아요. 그것이 좋았어요.

이미 지나간 과거는 아무리 지우려 해도 흉한 상처처럼 없어지질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펼쳐지는 미래는 자신이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건강도 되찾고 밝게 웃는 모습으로 내일을 맞을 겁니다.

강연화: 제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정말 꿈도 못 꿨던 일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회사를 관두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제 인생에 도전을 한다는 것과 같잖아요. 정말 좋은 거죠.

제2의 고향 오늘은 강연화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