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분지족의 삶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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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ve_woman_b 강원도 인제군과 양양군을 잇는 한계령에서 차들이 달리고 있다. (사진은 기사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자성어 중에 안분지족이 있습니다. 뜻풀이를 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알고 넘치는 욕심을 내지 않으며 자신이 처한 처지를 파악해 만족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참 좋은 말이죠? 살다 보면 욕심이란 것이 자꾸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데요. 오늘은 안분지족 하며 더 나은 내일을 기다린다는 청진 출신 김지선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지선: 북한에서 장사를 이것저것 하다가 너무 안되고 자꾸 망해서 마지막에 안되겠다 생각하던 차에 중국으로 가면 괜찮다고 해서 중국으로 넘어간 거죠.

탈북 당시 40대의 김 씨는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2000년대 초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장사를 해보지만 하는 일마다 손해를 보고는 결국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3년을 중국에 살다가 남한에 도착합니다. 아직도 눈에 선한 모습이 있는데요.

김지선: 제가 처음 인천공항에서 내려서 국정원 버스를 타고 창 밖을 보니까 나무가 너무 예쁜 거예요. 산이고 길이고 보면 산이 너무 푸르고 그게 제일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그때 2006년 봄에 한국에 왔는데 길가에 꽃도 너무 예쁘고요. 아파트 고층건물보다는 산이 너무 울창하고 빼곡하게 나무가 있는 것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요. 산에 나무하고 길가에 꽃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

기자: 북한 사진을 보면 산이 온통 벌거숭이던데 그래서 남한의 모습이 인상 깊었군요.

김지선: 그렇죠. 북한에서 우리 아이들도 보면 둘째가 5살쯤 됐었는데 밖에 나갔다 오면 길가에 나뭇가지를 치마 앞자락에 주워와서 엄마 이거 불 때라고 그랬거든요. 거기는 나무가 없어요. 길가에도 나뭇가지가 떨어진 것이 없어요. 다들 주워가서요.

남한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사람도 먹고 사는 것은 문제가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서서히 마음의 여유도 갖게 됩니다.

김지선: 이렇게 생각했어요. 북한에는 진짜 먹을 것이 없잖아요. 첫째 남한에 온 동기는 배가 고프니까 왔지 다른 것은 생각을 못했어요. 글쎄 자유도 좋지만 먹고 살기가 힘들었고 애들 굶어 죽일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탈북 했는데 남한에 와서는 하나원에서 밖으로 사회체험을 나가는 것이 있는데 제가 제일 감동 받은 것이 노숙자들에게 아침을 주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밥을 해서 먹이고 하는지 그것이 정말 감동스럽더라고요.

이제 60대 초가 된 김 씨. 건강만 허락을 한다면 좀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으련만 그게 여의치가 않습니다. 많은 탈북자가 남한에 가면 병원 신세를 자주 지게 되는데요. 김 씨도 예외는 아닙니다.

김지선: 먹고 살기 힘드니까 언제 아플 새가 없거든요. 그런데 북한에서 아팠던 것은 늑막염에 걸렸었거든요. 큰딸하고 장사 길을 떠났다가 칠보산 가는 길에서 아팠거든요. 내가 너무 아프다니까 의사가 한번 보자고 하더니 늑막이다. 매일 하루에 한대씩 마이싱을 맞으라고 하더라고요. 원래 항생제를 맞을 때는 잘 먹어야 하는데 잘 먹을 형편도 못되고 죽을 먹으면서도 병을 고쳐야 하겠다고 항생제를 맞았는데 다행이 나았어요.

기자: 그러면 북한에서부터 아팠던 겁니까?

김지선: 북한에 있을 때는 몰랐어요. 그런데 남한에 와서 아프고 지금도 신장 한쪽 기능이 한 30 퍼센트밖에 일을 못하거든요. 그래서 1년에 한번씩 검사를 받고 있어요.

김 씨는 다행이 자녀 세 명을 모두 무사히 남한으로 데려 왔고 각자 자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직장과 가까운 곳에 집을 두고 뿔뿔이 흩어져서 살긴 하지만 큰 불만은 없습니다.

김지선: 우리 큰 딸도 여기 올 때 24살에 왔는데 사회생활 하면서 우리를 다 데려왔거든요. 자기 동생, 엄마 다 데려오고 그러다 보니까 큰딸이 여기서 대학교를 못 다녔어요.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여기서 대학을 못 다녔는데 둘째는 여기 와서 명지 전문대를 다녔고요. 참 저는 여기 와서 생활하는 것을 보면 어떤 탈북자는 못살겠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제 생각은 그래요. 여기 생활이 힘들기는 힘들죠. 그런데 욕심을 부리지 않고 북한에서 살던 생각을 하면 못 살겠다는 말이 안 나올 것 같아요.

이제 자녀들도 다 성장해서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있는데도 엄마의 마음이란 것이 늘 더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착하게 잘 성장해준 아들 딸이 더 고맙습니다.

김지선: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저는 아이들 때문에 속상하고 그런 것은 없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들이 다 알아서 했거든요. 제가 해줄 것은 뒷바라지 하는 것뿐이지 앞길을 어떻게 나갈 것인가는 하는 것은 챙겨주질 못했어요. 그것이 속상하더라고요. 다른 부모들 보면 아이들 어디를 보낼 것인가 누구를 통해 뭘 하고 그러는데 저는 상의할 사람도 없고…

남한에서 가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나오는 큰집에 멋진 차를 타고 비싼 옷을 입고 사는 그런 생활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궁색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왔는데 그래도 병 치료 하면서 매일 따뜻한 쌀밥을 먹고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는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김지선: 저는 이북에 있을 때는 그냥 쳇바퀴 돌아가듯 사회 농촌지원 하고 생활총화 하고 그랬는데 이 남한에 오니까 자유잖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고 맘대로 하는데 북한은 그냥 시키는 일 해야 하고 장사를 하자고 해도 우리 있을 때는 못하게 하니까 힘들었는데 여기 오니까 자유가 있어서 좋고요. 또 내가 노력한 것만큼 다 되진 않아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살 수 있다는 것이 좋고 아이들이 지금 북한에 있었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남한에 데려오길 잘했구나. 남한에 왔으니 자기들이 보는 것도 많고 자기들 삶이 있고 한데 거기 있었으면 정말 희망이 없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자랑이 있는데요.

김지선: 네, 저는 여기 한국 와서 차를 몰았는데 북한에 있었으면 엄두도 못 내죠.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대단하구나 했는데 한국에 와 와보니까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이 있어 좋고요.

기자: 운전 한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김지선: 이제 한 5년 됐어요.

기자: 나이들 수록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잘하셨네요.

김지선: 한국은 차가 없으면 안되겠더라고요. 한국에선 차 운전이 필수더라고요. 저도 처음에는 중고차를 사서 운전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나이에 잘한 일이 운전이었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평범하게 사는 남한생활 넘치지도 않고 크게 부족하지 않은 그런 지금의 생활이 좋답니다.

김지선: 제가 좀 여유가 있다면 아이들 시집 장가 가는데 챙겨주고 싶어요. 자기들이 벌어서 간다고는 하지만 부모의 역할이 있잖아요. 북한에서 왔다고 여기 부모들처럼 잘은 못해줘도 부모로서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여유가 좀 더 되면 자기 가게라도 싶은 소망이 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청진 출신의 김지선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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