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내 앞길에 고난은 없어라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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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탈북자가 제일 많이 다니는 수영로 교회.
부산에서 탈북자가 제일 많이 다니는 수영로 교회.
사진-수영로교회 홈페이지 캡쳐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 고향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사람의 생각이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살아온 과거가 다르고 현실을 보는 시각도 달라서인데요. 오늘은 남들이 흔히 겪는 시행착오 없이 늘 생활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박은혜(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은혜: 장백은 작은 국경도시예요. 농촌인데 중국하고 조선 국경을 끼었으니까 국경도시라고 하 도시는 아니고 시골 농촌이예요.

함흥에 살았던 박 씨는 1997년 열 다섯살 된 아들과 연년생인 딸을 도강시키고 한겨울 꽁꽁 언 압록강을 넘습니다. 먼저 탈북한 아이들은 미리 약속한데로 장백현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자칫 잠시 이별이 영영 볼 수 없는 생이별이 될 수도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박은혜: 늘 밤이 되면 울면서 배불리 밥은 먹었으니 엄마 생각이 나면 울면서 마당앞에 앉아서 울고 그랬데요. 중국 압록강 건너 장백현인데 거기는 농촌이라 들어가서 농사일을 도와주면 거기 사람들은 인정도 많았어요. 밥을 먹여주거든요. 그중에는 조선족이 돈을 벌기 위해 북한 사람을 신소해서 잡아가기도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어리고 열심히 일하니까 농촌집에 들어가서 일하고 저도 또 얼음을 타고 넘어와서 수소문을 해서 애들을 찾았어요. 세 식구가 농촌집을 다니면서 일하고 밥을 얻어먹고 안쪽으로 들어왔거든요.

박 씨는 아이들을 먼저 도강 시키고 달 반만에 다시 만나 살길을 찾아 더 깊은 중국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중국공안에게 잡혀 강제북송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기 때문입니다.

박은혜: 처음 도강해서 중국에 왔을 때는 정말 살맛이 나고 살 같았어요. 중국에서 여기로 말하면 노숙자같은 사람을 만났지만 너무 행복한거예요. 일한만큼 돈을 번다는 생각을 하니까 아이들도 그 어린나이에 다 나가서 일했어요. 오히려 우리 세 식구가 일해서 우리를 보호해줄 형편도 못되는 남자를 만나서 살았는데 그 남자에게도 무서워서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는 말을 못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우리 아들이 18살부터 광산에서 일했고 딸은 16살부터 나가서 식당일을 했어요. 저도 일이 생기는데로 닥치는데로 몸을 많이 혹사했어요.

중국에서 탈북자인 것을 숨기고 조선족인 것처럼 산 것이 13년. 더는 안되겠다 싶어 결단을 내렸고 박 가족은 2010년 무사히 남한에 도착합니다

박은혜: 국정원에 들어갈땐 많이 무서웠어요. 우리를 정말 환영하고 받아들일지 걱정도 하고요. 그런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까 궁전에 온 것같아요. 그때부터 너무 좋은 거예요. 단독방에 들어가서 조사를 받을 때도 하나도 무섭지 않고 그냥 묻는 것만 대답을 하면 되니까요. 하나원에 가서는 항상 생각하는 것이 이래도 고생하고 저래도 고생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빨리 나가서 토대를 잡고 싶다는 생각에 사회로 빨라 나가고 싶었어요. 나와서도 어려운 것도 없고 그냥 행복했어요.

박 씨가 남한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이가 53살 입니다. 일반적으로 청소년이나 젊은이들보다는 중년 이후에 남한에서 새출발하는 탈북자가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 씨는 북한에 있을 때 사로청위원장도 해봤고 결혼해서는 직맹위원장 그리고 일을 그만 뒀을 때는 인민반장도 해본 경험이 있어 그런지 사람 상대함에 있어 어려움이 없었고 호탕한 성격도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박은혜: 제가 일한 곳이 자그마한 주식회사인데요. 젋은 사람이 없고 나이든 사람들이라 또 말이 통하고 하니까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저는 못알아 들으면 웃으면서 다시 물어보고 내가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고 하니까 즐겁기만 했습니다. 제가 회사생활 할때까지만 해도 어려운 것을 모르고 너무 행복했는데 지금 척추수술을 하고 일 못하고 집에 있으니까 경제적으로 조금 어렵기는 한데 제가 북한에 있었다면 풀도 못먹죠. 그렇게 놓고 보면 어려운 것 없어요. 놀사이가 별로 없어요. 봉사활동 다니고 또 교회 나가는 날이 한주에 4일  정도 되요. 그러니 즐겁고 외롭다 하는 시간이 없고 집에 들어와서도 저는 또 뜨개질도 하면서 즐겁게 삽니다.

박 씨는 일주일에 반 이상을 교회에 갈 정도로 기독교인이 됐는데요. 가장 절실했던 것을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었고 그때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랍니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이젠 기독교인이 됐습니다.

박은혜: 원래 제가 교회를 믿을 생각을 못했는데 아들이 17살부터 갑자기 이상한 병에 걸려서 29살까지 12년을 제가 아들 때문에 울면서 살았어요. 갑자기 병을 앓으면 쓰러지거든요. 그런데 캄보디아로 오면서  교회를 거쳐 오면서도 한달 반은 안 믿었는데 아들이 모범생으로 인정을 받았어요. 같이 오는 탈북자들은 아들을 천대하고 못살게 굴었는데 내가 너무 속상해서 아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우리 하나님이 진짜 있는지 기도하자 그리고 너 병도 고쳐 달라고 이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자 하면서 아들하고 울면서 약속했어요. 그때부터 제가 정신나가게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들이 그 병을 안앓았어요. 너무 감사하죠. 지금은 우리 아들 딸 며느리 손자까지 교회를 다녀요.

북한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종교를 갖게 되고 그런 믿음의 생활이 좋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강요에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 스스로 찾게 되니 신이나 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믿음 생활이 남한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박은혜: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변한 것은 짜증날 때가 있잖아요. 사람이 늘 좋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좋은 사람일수록 오해도 더 받고 나쁜 소릴 더 들어요. 오히려 어찌보면 악한말을 하고 다니고 설치고 다니는 사람이 더 잘되는 것 같아 보이고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런데 착하고 심성이 좋아서 도와주려고 하면 오해도 더 받고 뒷소리도 듣는 거예요. 그것에 대해 기도하는 거예요. 싸우지 않고 그냥 하나님한테 기도하는 거예요. 보호해달라고요. 아들도 사업하면서 속상할 때가 있는데 그때 내가 그래요. 왼쪽볼을 때리면 다른 쪽 볼을 들이대면서 하늘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절대 누가 우리 욕한다고 같이 욕하지 말고 우리는 선하게 살자. 늘 이런 얘기를 해요.

남한생활 8년동안 변한 것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식구가 늘어난 것이 제일 큰 기쁨입니다. 아들 딸은 모두 시집 장가를 갔고 아들은 손자까지 낳아 박 씨는 손자와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아직 두 살이 채 안됐는데요. 어려움 없이 살아가니 불만도 없고 사는게 즐겁답니다.

박은혜: 너무 기분이 좋죠. 애가 너무 똑똑해고 내 새끼니까 또 특별히 똑똑해 보여요. 9달 반이 돼서는 걸어다녔어요. 돌때는 떡그릇도 들고 다녔어요. 지금도 그래요. 나가는 돈이라야 집관리비, 가스비,물세 이런 것하고 혹시 사람이 살다보면 집에 대사가 있잖아요. 누가 아프면 병문안도 가고 할 때 돈이 필요하죠. 먹는 데는 돈이 많이 안들어요. 최근에는 통장에 돈이 별로 없어서 가끔 나가 알바를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아직 교회 십일조를 단 한 번도 끊어본적은 없습니다. 내가 헌금을 낸만큼 다시 돈이 채워지고 하니까 그것으로 너무 감사하죠.

제2의 고향 오늘은 함흥시 출신의 박은혜(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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