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사히, 버스운전 행복해요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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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가 운행하는 마을버스.
춘천시가 운행하는 마을버스.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어디를 가려고 하면 차를 타게 됩니다. 물론 차가 있으면 직접 운전을 해서 가겠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가 많습니다. 저렴한 요금으로 시내 전체를 운행하는 버스, 그래서 사람들은 버스를 흔히 시민의 발이라고 부르는데요. 오늘은 서울시내 버스를 몰고 있는 탈북여성 임지예(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임지예: 저는 기도해요. 모든 차들이 제차를 보면 피해만 주세요. 오늘 즐겁게 일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해요.

간절하게 이렇게 오늘도 무사히를 외치고 있는 이분은 신의주 출신으로 2001년부터 남한생활을 한 임지혜 씨 입니다. 현재 서울시내를 운행하는 버스 운전기사 입니다. 임 씨가 탈북한 것은 1997년이었지만 강제북송과 재탈북이란 과정을 거쳐 힘들게 남한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고향에 대한 기억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가 않습니다.

임지예: 처음에 탈북했을 때는 그렇게 고향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잡혀 나갔다 오니까 완전히 저주스러운 땅, 다시는 밟고 싶지 않은 땅.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숨통이 확 트이면서 정말 여기가 바로 내 고향이다. 여기서 내가 뼈를 묻고 살 고향이다 생각하니까 너무 좋았어요.

수십 명 많게는 백여명에 이르는 승객을 태우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남한의 수도인 서울 시내 노선을 운행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임 씨는 지금껏 사고한번 없이 무사고 운행을 한 것은 실력보다는 운이 좋았다고까지 말합니다.

임지예: 남자들도 버티기 힘든 것이 시내버스예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틀려요. 우리가 정장입고 넥타이 메고 하얀장갑 끼고 일하는 것이 남보기엔 좋잖아요. 그런데 순간순간 목숨을 내걸어야 해요. 내가 순발력이 없으면 안되요. 며칠전에도 갑자기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서 진짜 다른 사람같으면 그 승용차와 충돌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내가 운이 좋다는 것이 옆차로에 차가 안와서 내차를 그리 몰고 들어가 사고를 피했어요. 그날은 혼이 나가서 다리맥이 풀리고 혼났어요. 그런 일이 흔해요.

임 씨의 서울시내 운전을 평양에 비유한다면 여명거리와 모란봉 거리를 거쳐 천리마대로를 오가는 노선으로 보면 될 겁니다. 다시말해 남한에서 가장 차가 많이 다니고 복잡한 곳을 매일 운전하는 겁니다.

임지예: 저는 한바퀴 도는데 4시간이예요. 우리 종점에서 회차까지 2시간 걸려요. 거기에서 차에다  가스 넣으면서 화장실 가고 그리고 차 끌고 나와서 앞차와 간격 맞춰서 출발하면 회차 지점에서 회사까지 또 두시간 걸려요. 때로는 광화문 쪽에서 집회가 열리면 5시간 걸릴 때도 있어요. 오전에는 무조건 두바퀴 돌고 오후에는 11대가 세바퀴고 나머지는 두바퀴 돌아요. 우리 노선은 45대가 있거든요.

처음 남한에 갔을 때는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남의 집 허드렛일 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남한에서는 그런 일을 파출부 일이라고 하는데요. 그렇게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그 후에는 또 식당에서 시간제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중국에 남아있던 아들을 남한으로 데려오자면 브로커 비용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4년을 그렇게 일하다 직업을 바꿉니다.

임지예: 막 학원버스 몰때는 저녁에는 또 식당 알바를 해서 거의 200만원정도 벌어서 생활을 유지했는데 마을버스를 하니까 다른 일을 못해요. 정말 힘들어서 아무일도 못했는데 그래도 130만원 받고 1년을 꽉 채웠죠.

벌어도 그다지 좋지 못한데 왜 학원버스를 몰았냐고요? 임 씨는 목표를 시내버스 운전사로 정했기 때문에 대형차 운전 경력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처음 학원버스를 몰았고 그 다음 조금 승객을 더 태우는 마을버스로 직업을 옮겼던 겁니다.

임지예: 마을버스 1년 운전경험이 없으면 다른 곳을 못가요. 마을버스 경력이 꼭 필요해요. 그만큼 마을버스 경력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다 같이 일하던 언니가 여기 사람이니까 아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 언니한테 경기도 쪽 버스운전할 수 있도록 소개를 해달라 해서 대원고속에 취업해서 3년을 있었어요.

시내버스를 운전기사가 되기 위해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갑니다. 마을버스는 정해진 시간안에 동네를  한바퀴 돌아야 하는데 어딜가나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도심을 운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마을버스를 1년하고는 경기도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 회사로 자릴 또 옮깁니다. 당시에는 몸도 피곤했지만 그보다 정신적으로 항상 긴장을 해야해서 더 힘들었습니다.

임지예: 저녁에 와서 너무 힘드니까 내가 맥주를 한병씩 먹고 애들한테 주정을 했나봐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너무 속상해서 엄마 이것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 안돼 계속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학원버스에서 마을버스로 그리고 또 경기도 버스로 옮기고는 급여도 전보다 두 배정도 올랐습니다. 버스 크기도 커지고 임금도 마을버스를 몰 때보다 두배정도 더 받았습니다. 어느정도 목표에 근접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당시 임 씨가 느꼈던 뿌듯함과 놀라움이 뭔지 들어보시면 아마 청취자 여러분도 공감하실 겁니다.

임지예: 입사하니까 3일동안 교육을 시키는데 첫번째는 안전교육을 시켜요. 예를 들어 속도위반하면 안되고 기름절약 해야 한다고 하고 그런 안전교육  하는데 내가 그때 깜짝 놀란 것이 있어요. 나를 위해 일하세요 이러는 거예요.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일하세요 이러는 거예요. 세상에 이 회사에 취직을 했으면 이 회사를 일해야지 왜 내가 나를 위해 일해?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말을 들어보니까 내가 건강하게 일해야 내 가족이 살고 내 가족이 튼튼해야 이 회사가 산다는 거예요. 세상에 이북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하고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다가 여기 오니까 나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하니 회사가 망할려고 그러지 처음에는 그랬는데 내 건강을 챙겨서 일하면 회사도 잘된다고 하니 세상에 내가 복받았구나….

3년을 그렇게 경기도를 운행하는 버스를 몰았습니다. 당시엔 작은 아들이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요. 보통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잖습니까? 감수성 예민하고 반항적으로 변한 아들을 돌보랴 대형버스를 운전하랴 정말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업친데덮친 격으로 오랜 기간 장시간 운전운로 인한 직업병까지 얻게 됩니다. 바로 허릿병인데요. 병원에서 당장 쉬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렇게 몇 달 쉬다가 서울 시내버스 회사에 이력서를 냈는데. 운명처럼 연락이 왔습니다.

임지예: 2011년 8월에 면접을 보고 9월 말에 연락이 왔어요. 오라고 해서 견습을 탔어요. 빨리 노선을 익혀야 배차가 들어간다. 그래서 쉬는 날도 나가서 노선을 익혀서 출근해서 10일만에 세노선을 다 합격했어요. 그래서 시험을 봐서 100점을 맞았어요. 그랬더니 인사과장이 여자라고 만점을 준 것 아닌가 했더니 시험감독이 지금까지 시험 감독을 해본 사람들 중에 이렇게 차분하게 한 사람이 없었다 하면서 만점을 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회사에서도 내일부터 배차를 해줘라 이렇게 된 거예요.

기자: 허리 디스크는 완치가 됐었나요?

임지예: 그 견습받고 배차 받을 때까지 집에서 계속 맨손체조를 하고 지금도 하고 있어요. 지금 내가 입사한지 9년이 되거든요.

기자: 학원은 80만원 마을버스는 130만원 경기도 버스는 230만원 지금은 더 많이 받습니까?

임지예: 더 좋죠. 대우도 좋고 상여금도 나오고 여자월급 치고는 완전히 진짜 쎄죠.

오늘도 힘차게 서울시내를 누비고 다니는 임지예 씨. 지금이 50대 중반이니 앞으로 10년은 더 현장을 지킬 계획입니다.

임지예: 그냥 무사히 65세까지 일하면 좋겠고요. 그리고는 봉사를 하고 싶어요. 한국와서 벽돌한장 못 옮겼고 흙한삽 안떴는데 여기서 행복하게 살잖아요. 그래서 은퇴하고는 봉사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서울 시내버스 기사 임지예(가명)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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