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왕조의 실체] 비운의 여인 성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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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보내 드리는 '김씨 왕조의 실체'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수경입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 일가와 관련한 소식은 말해서도 들어서도 안되는 일급 비밀입니다. '김씨 왕조의 실체' 시간을 통해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북한 지도자들의 권력 유지와 사생활 등과 관련한 소식들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의 생모인 성혜림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얼마전 김정일 위원장의 첫번째 동거녀였던 성혜림의 묘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외곽에 방치돼 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서쪽에 위치한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성혜림의 묘는 비록 가명으로 등록돼 있었지만 묘비 앞에는 한글로 '성혜림의 묘'라고 적혀 있었고 묘비 뒷면에는 '묘주 김정남'이라고 씌어 있다고 전해졌습니다. 성혜림의 묘는 봉분위에는 무성하게 잡초가 자라 있었고 묘 주변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마치 누구도 돌보지 않는 무연고 묘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성혜림은 김 위원장의 장남 정남의 생모로 어쩌면 북한의 영부인이 될 수도 있었던 여자입니다. 그런 성혜림의 묘가 왜 머나먼 타국에서 그것도 가명으로 등록된 채 관리도 제대로 안되고 있는 것일까요? 북한에서 성혜림과 알고 지냈다는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탈북자 김영순 씨는 성혜림의 묘지가 방치된 이유는 김 위원장과 성혜림의 평범하지 않은 관계가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김영순: 성혜림하고 동창이거든요, 중국에서 공부할 때 저의 상급생이었고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때 성혜림이 5호댁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5호댁은 김일성 가계거든요.

성혜림은 6.25 전쟁 때 부모를 따라 월북한 북한의 배우였습니다. 그녀는 1960년대 찍은 영화 ‘분계선의 마을’로 당대 유명 여배우로 떠올랐습니다. 성혜림은 당시 영화촬영소를 드나들던 김 위원장의 눈에 띄어 사랑에 빠진 이후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성혜림은 김 위원장과 만났을 당시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하나 있었던 유부녀였고 나이도 김 위원장보다 5살 위였습니다. 성혜림의 남편은 당시 북한의 작가동맹위원장이었던 이기영의 장남 이평입니다. 북한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었던 김 위원장은 성혜림을 이혼하게 하고 1969년부터 동거에 들어갔습니다. 성혜림은 김 위원장과 동거한 지 3년만인1971년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김 위원장의 첫째 아들 김정남입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성혜림도 아들의 존재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아버지 고 김일성 주석에게도 손자가 태어난 사실을 숨겼습니다. 심지어 자신과 성혜림과의 부도덕한 관계가 폭로되는 것이 두려워 성혜림과 가까이 지냈던 수많은 예술인들을 수용소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탈북자 김영순 씨의 증언입니다.


김영순: 1989년도에 평양에서 내려온 고위 간부가 나를 불러 말했습니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가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것을 다시 말할 때에는 용서치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성혜림 때문에 요덕에 갔구나 확인했습니다.

성혜림은 끝내 김 위원장의 부인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김 위원장의 동생 김경희로부터 아이를 두고 나가달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김 위원장이 중앙당 타자수 출신인 김영숙과 결혼하는 모습도 그저 지켜봐야 했습니다. 당시 김 위원장에게 여자가 있는지 아들이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던 김 주석은 서른이 넘도록 결혼할 생각이 없는 김 위원장의 결혼을 다그쳤다고 합니다. 아버지 김 주석의 권유로 1974년 김 위원장은 김영숙과 부랴부랴 결혼했고 같은해에 딸 설송을 낳았습니다.

그때부터 성혜림은 극도의 불안과 신경 쇠약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남한으로 망명한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 씨가 쓴 수기에 따르면 당시 성혜림은 늘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 언제 정남이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우울증 증세를 보였습니다. 성혜림은 정남에게 동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시 임신하기도 했지만 74년과 77년 경 두 번이나 유산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후 그녀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고 정남이 유학했던 스위스와 러시아에 줄곧 머물며 요양했습니다. 1996년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서방으로 탈출하면서 그녀도 함께 망명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지만 성혜림은 계속 러시아에서 생활하다가 2002년 모스크바에서 63세로 사망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 방송 이수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