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라이터에 밀려 추억 속에서나 떠올릴 수 있는 가늘고 작은 나무 개비지만 성냥은 춥고 가난했던 시절을 이겨낸 가장 따뜻하고 소중한 우리들의 환한 불꽃으로 남아있습니다.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언제나 우리들의 생활과 함께 했던 성냥.
미국에 건너 온지 30년이 되어 가는 박승후씬 이 성냥을 사람들은 시골이든 도시든 신주단지 모시듯 대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박승후: 성냥으로는 어머니들이 부엌에서 불쏘시게로 많이 쓰고 전깃불이 잘들어왔다 나갔다 하던 시절에는 방안에 꼭 성냥이 돌아 다녔어요. 성냥통 큰 것 주먹만 한 것 사면 거기다 고무줄을 메서 천장이나 기둥에 메달아 놓고 쓰고 성냥이 가정생활에서 상당히 중요한데 불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성냥이라고 그래서 성냥이 가정생활에서 아주 필수품 중에 필수품이지...
소녀가 야자수 밑에 팔을 괴고 누워 있는 그림의 야자수 성냥 복주머니와 엽전을 그려 넣은 복표 성냥 팔각통 모양의 유엔 성냥과 기린이 그려져 있던 기린표 성냥.
이 모두는 지나간 70-80년대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들의 소망과 병을 앓지 않고 부자가 되고자 하는 소박한 바램을 그려 넣은 통성냥, 곽성냥들입니다.
엄기성: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이사를 했는데 손님이 엄청나게 오셨는데 그분들이 전부 성냥을 들고 오셨단 말이예요. 그래서 성냥이 완전히 산처럼 쌓였던 적이 있어요. 아마 우리가 다음 집으로 이사 갔을 때까지 다 못썼죠...
이철재: 지금은 다 라이터로 쓰지만 그때는 성냥개비 하나 남았을 때 두 명이 손가리고 붙였던 그 성냥 ...그리고 코로 유황 냄새가 담배 맛을 훨씬 좋게 했죠.
평범한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된 엄기성씨와 이철재씨가 기억하듯 마흔이 넘은 사람들에게 이 성냥은 언제 그리고 어느 주변에든 쉽게 볼 수 있는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유황으로 성냥공장이 번성했던 항구도시 인천 이 인천에 들어선 성냥공장에는 특히 여성일꾼들이 많아 인천에 가면 성냥공장에 다니는 처녀들이 많다고 해서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는 남성들의 입을 통해 불려지기도 합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남한은 경제개혁 5개년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가난의 고리를 어느 정도 끊었을 무렵인 1970년대를 지나 80년대 들어서며 성냥공장은 전국적으로 300개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일회용 라이터와 성냥이 없이도 전기로 불을 일으킬 수 있는 가스렌지가 등장하면서 호항을 누렸던 성냥공장들은 하나 둘씩 문을 닫게 되고 이제 남한에는 경북 의성에서 5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성광성냥 공장 하나만 남게 됩니다.
25년째 성광성냥에서 근무하는 손윤동 공장장은 한때 200 명이 넘은 젊은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일 만큼 영업이 잘됐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손윤동: 향로 성냥이라고 안에 양쪽에 나무로 습기 제거하는 것이 있는데 그 당시에 우리 성냥이 발화가 빠르고 습기에 강하고 그렇게 때문에 그 성냥이 많이 팔렸습니다. 경남 일대하고 강원도 쪽 해변가로는 우리 성냥이 다 팔렸다고 생각합니다. 알 성냥도 팔았습니다. ...요즘은 무게나 킬로수로 하지만 그 당시에는 되빡에 담아서 할머니들이 앉아서 팔고 그랬습니다.
한창 성냥이 잘팔릴때 성광성냥 공장에서는 150갑 들은 박스로 하루에 300박스 정도를 팔았지만 지금은 10분의 1정도만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손윤동: 옛날에는 성냥이 가정의 필수품이었는데 지금은 개업집이라든가 다방에서 그냥 주는 그 정도죠. 내가 생산을 하고 있지만 어디 가서 성냥을 내놓기도 그렇고 또 사용자도 없고...안타까울 뿐이죠.
1980년도에 성냥 한 갑은 쌀을 한 되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집집마다 귀한 대접을 받았던 성냥은 지금은 성냥 3-4통을 팔아야만 쌀을 한 되 살 정도가 되고 그나마 추억의 상품으로 신기한 물건이 돼버립니다.
자 이제 북한의 성냥 사정을 알아볼까요? 지난해 말 탈북해서 남한에 정착한 탈북여성 이명옥씨는 이 성냥이 남한에서처럼 귀하게 여겨지는 때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명옥: 전천 성냥이 제일 좋은 거예요. 북청에서도 성냥을 했어요. 어쨌든 전천에서부터 성냥이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 내가 살림 올땐데 지금부터 한 40년전에.. 시집올 땐데 성냥을 가지고 왔어요. 처음으로 집에 불을 지피니까 성냥을 사가는 줄 알았지 여기는 가스로 불을 피우잖아요. 우리는 아궁지에다가 불을 떼니까 처음 불을 키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성냥을 사가는가 했어요.
하지만 북한에서 최대 성냥생산 공장에서 만들어낸 성냥이 불량품이 많아 전천 성냥이 불이 잘 일지 않는다고 불평도 많았습니다.
남한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을 통해 남한 사람들에게 알려진 전천 성냥공장에 대한 풍자는 북한의 경제사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전천 성냥공장 풍자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남한의 적대분자가 비행장 근처 연유탱크에 불을 지르려하지만 전천 공장에서 만든 성냥이 불이 붙지 않아 실패를 합니다. 김정일은 전천 성냥이 불이 잘 붙었다면 큰 사고가 날 뻔 했다며 성냥공장 지배인에게 감사문을 내렸다는 내용입니다.
탈북자 강유씨는 지난 1975년 경 북한에서 있었던 전천공장 풍자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강유: 전천 성냥공장 성냥이 질이 낮아서 김일성이 직접 지배인 불러서 그 앞에서 불을 그었는데 세 번 다 불이 일지 않아서 ... 그때 인민들 속에서란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있습니다.
북한에서 매운 연기를 마시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어머니들뿐만 아니라 담배를 즐겨 피는 아버지에게도 성냥은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강유: 라이터 없을 때는 성냥을 비닐을 싸고 비를 맞아서 눅눅해 질까봐 그러고 그랬거든... 품에 안고 다니고 했는데... 지금은 북한도 중국 가스라이터가 다 나와서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작은 소나무 가지에 유황을 찍어서 딱딱하게 말린 석류황이란 것이 있었는데 성냥에 대한 일본식 표현인 인촌 대신 이 석류황을 고집하면서 바로 이 말이 빨리 발음되다 보니 성냥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집스럽게 남북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는 성냥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에 이 성냥을 가지고 놀다가 살고 있는 집을 홀라당 태워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서울 소방 방제청 통계과 김효범씨는 지난 1980년 대 후반부터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성냥은 이제 공문서에서도 조차도 사라져버렸다고 말합니다.
김효범: 성냥에 대해서는 통계가 안나옵니다. 옛날에는 화재 원인이 성냥, 양초해서 구별을 했습니다. 라이터가 없었고 2006년까지 구별을 했는데 2007년부터는 성냥은 없애버리고 담배 라이터불 이렇게 구별합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조민경씨는 방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먼지 쌓인 비닐 주머니를 발견합니다.
조민경: 몇 년 지나서 펼쳐 보니까 이 성냥갑 가게는 어디있고 누구랑 갔었고 뭘 했었고 또 뭐가 맛있었고 그때 무슨 일을 해서 기분이 나빠서 갔었고 이런 추억들이 더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제 라이터에 밀려서 쓰지도 않는 성냥이지만 저한테는 더 이상 그냥 불붙이는 성냥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성냥갑 안에는 성냥이 담긴 것이 아니라 내 오랜 기억이나 추억이 담겨있는 상자가 돼버린거죠.
성냥, 이제 성냥은 남북한의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상징하는 성냥같지 않은 성냥이 돼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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