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문화기행]찐빵과 만두-따뜻한 정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빵

최희준씨의 노래 하숙생입니다. 별명중에 가장 잘 어울리는 별명이 아마도 최희준씨의 찐빵이라는 별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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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둥글하고 편안하고 넉넉한 얼굴 모습 뿐만 아니라 그가 부른 노래마져 편안하고 따뜻한 것이 찐빵과 너무도 닮아있습니다. 최희준씨는 남한의 희극배우 구봉서씨가 붙여준 찐빵이라는 별명이 결코 싫지 않다며 본인도 찐빵을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최희준

: 그 당시에 내모습을 보면 연상이 됐었나 보죠 뭐.. 별명이라는게 상대방이 보고 느끼는 대로 보여 지는 거고….

RFA 자유아시아방송의 남북문화기행 오늘은 ‘찐빵과 만두’ 이야기입니다.

김정호

: 찐빵이라는 것은 옛날에 소위 그 만두집에서 만두하고 찐빵을 같이 쪄서 학교 앞에 주로 있죠 그 다음에 이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네거리 한 코너에 요렇게 그 수레.. 리야카라고 그러나요 그 수레위에다가 찐빵 굽는 기계를 놓고 하던 데도 많이 있었지요 그 밑에는 연탄난로가 있고..

올해 예순 여섯의 김정호씨는 아직도 학창시절 때 학교앞 혹은 네거리 모퉁이 한편에 자리잡은 손수레에 수북히 쌓인 찐빵과 만두의 추억을 잊지 못합니다. 한창 자라는 나이에 늘 허기진 배를 달래준 찐빵, 그것도 처음에는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맨 빵이었다고 합니다.

김정호

: 엄마한테 거짓말 해서 돈 쪼끔 남으면 그거 가지고.. 옛날에 대형빵이라고 있었어요 찐빵 대신에.. 속에 앙꼬가 없는.. 그게 좀 커요, 맛은 별로 없는데 허기를 달래려고 먹었죠 그때 가장 허기를 달래는데 가장 싸고 좋은 음식중에 하나였고 저희 어렸을 때 간식으로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어요. 그중에서도 찐빵을 먹는 이유는 만두는 맛은 있지만 양은 적잖아요, 옛날에는 양 위주로 먹었던 것같습니다. 호주머니에 몇푼 없으면 사먹던 게 찐빵이죠

한창 식욕이 왕성했던 학창시절, 배고픔을 달래준 고마운 찐빵에 대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김정호

: 고등학교 다닐 때 중학교 다닐 때 도시락 까먹고 나서 저녁시간까지 배가 고픕니다. 누구나 다.. 고때 고런 거 하나 먹으면 견디죠..

가수 최희준씨도 옛날 어려웠던 시절 간식이자 주식이기도 했던 찐빵은 서민들에게는 소중한 존재였다고 말합니다.

최희준

: 그당시에는 뭐 간식으로 먹을만 한 것도 그렇고.. 요즘에야 뭐 다양하고 먹을거리가 얼마든지 다양하게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안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찐빵이란게 간식도 되고 주식도 되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여러가지로 우리한테, 서민들에게 의미있었던 게 찐빵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년에 몇번 아니면 졸업식 같은 날 중국집에서 탕수육 한번 맛보는 것이 대단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흔한 짜장면이나 우동을 먹으러 중국집을 찾는 일도 어쩌다 있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김정호

: 짜장면 집이 있었는데 파리가 들어가면 한 그릇 더 주잖아요, 우동을 시켰는데 일부러 파리를 잡아가지고 물속에 집어 넣었다가 그걸 가지고 갔다가 거의 다 먹으면 그걸 거기다 집어넣고 파리 나왔다고 난리를 쳐서 한그릇 더 먹은 기억도 있고 .. 그 담에 그 중국집에서 걸음 제일 빠른 친구가 맨 나중에 나오면서 실컨 먹고 걸음 느린 놈은 먼저 도망가고 맨 마지막에 계산하는 척하고 도망가면 옛날에 그 중국집 사람들이 욕을 바가지로 하고… 그래도 그분들이 허허 웃었어요 다음에 가면은 옛날에 도망갔던 소리는 안했던 거 같아요.

1960년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후 군사정부에서는 분식을 강력하게 장려했습니다.

김정호

: 식량이 모자라니까 5.16 군사정부 막 시작하자 마자 밀가루.. 그러니까 분식을 장려했어요, 그래서 칼국수, 찐빵 이런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었었죠 혁명정부 초기에.. 분식을 장려하다 보니까 집에서 어머님들이 직접 밀가루에다 이스트를 넣어서 연탄불에 올려놔서 부풀려서 찐빵을 만들어 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

언제부터인가 큰 제빵기업이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호빵이 등장하면서 찐빵이 자취를 감추나 싶었지만 한평생 찐빵을 쪄서 팔아온 한 할머니의 노력 덕택에 예전의 찐빵 맛은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큰 대도시가 아닌 강원도 횡성군 안흥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40년 동안 찐빵을 만들어 팔아온 심순녀씨가 주인공입니다. 안흥이라는 지역이름이 붙여진 안흥찐빵은 이제 한국에서 찐빵의 대명사로 불리우고 미국까지 수출될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어린 나이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가서 무능한 남편대신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나섰던 것이 오늘의 안흥찐빵의 시작이었습니다.

심순녀

: 저는 그때 너무 너무 못살아 가지구요 애를 열아홉에 시집와서 그해 애를 또 낳았어요, 재들 아버지가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일을 잘 안할려고 그래요, 그러니 먹고 살려니 어떡해요, 맨날 애들하고 하루 한끼 먹으면 잘 먹었어요, 스물 세살에 장사를 안해 본 게 없어요 저희가 고기 장사면 사탕장사며… 심순녀 : 옛날에 집집마다 들어가다 보면 총각들이 막 휘파람 불며 그랬는데요, 그러니까 너무 뒷통새기(뒷통수)도 부끄럽고 막.. 그런 시절을 지내니까… 아휴.. 뭘 해야 먹고 사나 싶고 그때는…

심순녀씨의 찐빵가게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자 이웃집들도 너도 나도 찐빵가게를 차리기 시작해 인구 3천여명 밖에 안되는 조그만 시골마을 안흥은 그야말로 찐빵마을로 변했습니다. 오히려 안흥찐빵의 창시자인 심순녀씨보다 이웃집 찐빵집들은 최신식 설비로 대량으로 찐빵을 쪄내 찾아오는 손님들 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찐빵을 보급해 남한 어디를 가나 안흥찐빵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그러나 심순녀씨는 대량생산해서 돈을 많이 버는 쪽 보다는 일일이 옛날 방식대로 찐빵을 쪄내면서 고집스럽게 옛맛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심순녀

: 지금도 손님들이 오면 저는 모르지만 뭐라고 하냐면.. 내가 저 학교 다니고 안흥에서 고등학교 다닐때 하던… 여태 그래도 꾸준하게 건강하시다는 소리 많이 해요.. 학생시절에 먹던 사람이 벌써 시집장가가서 늙어서 머리가 희끗희끗해요, 그래서 같이 늙는다고 어제도 그랬지만…

심순녀씨는 찐빵이 맛있으려면 반죽도 잘해야 하고 팥도 달게하는 양이 잘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심순녀씨는 심순녀안흥찐빵 맛의 가장 큰 비결은 역시 손맛이라고 말합니다.

심순녀

: 비결은 뭐 손맛이죠.. 제 손맛이 비결이예요 ..

김정호씨는 찐빵이 오래도록 정겹고 따뜻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함께 나누어 먹던 빵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김정호

: 그럼요 나눠먹었죠 저희는.. 콩한쪽이라도 나눠먹는다는 얘기 굉장이 가슴에 와 닿거든요 저희들은 그렇게 살았으니까.. 아주 그 힘들게 학급비도 못내는 그런 친구들도 있었구요 그 친구들 배곯는 일은 없었어요 도시락 안싸와두요, 꼭 남겼다 주고 같이 나눠먹고 그랬지.., 그걸 당연한 걸로 알고 있었고 .. 옛날엔 돈없다 그래가지고 그 돈없는 친구를 멀리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커서 아직도 그 정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주머니 몇푼의 푼돈으로도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기에 그리고 서로가 어려웠어도 함께 나눠 먹을 수 있었던 빵이기에 찐빵과 만두의 기억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항상 따뜻한 온기로 그 시절을 보낸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 방송의 ‘남북문화기행’ ‘찐빵과 만두’ 편 제작 진행에 이장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