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문화 기행> 오늘은 <부뚜막> 에 대한 이야깁니다.
7일인 오늘, 한국의 춘천에서는 옛날의 부뚜막을 직접 재현하고 부뚜막의 기능을 체험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옛날부터 사용했던 부뚜막이 어떤 기능을 가졌고 부뚜막이 음식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연구 활동의 하나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부뚜막은 솥을 걸어두는 시설이라고 짤막하게 소개되어 있지만 부뚜막에는 짧게 설명할 수 없는 옛 선조들의 지혜와 가족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한국의 부뚜막과 음식 문화를 연구해 온 서울 한강문화재연구원의 오승환 실장은 옛 부뚜막을 발견하고 연구할 때마다 한국 고유의 독특한 부뚜막 문화를 발견하곤 합니다.
오승환 실장
: 부뚜막이라는 것은 중국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나왔고, 철기 시대에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 그 뒤로 중국에서는 부뚜막만 있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부뚜막이 구들, 온돌과 결합이 돼요. 그래서 한국만의 독특한 취사문화와 난방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가 발전하게 되는 거죠. 부뚜막을 연구 하다보니까 일본이나 중국 어디를 가도 구들과 연결된 부뚜막은 하나가 없었거든요.
부뚜막이 들어오기 전에는 끊여 먹던 음식 문화가 부뚜막이 생긴 이후 밥을 쪄서 먹는 문화로 바뀌었고, 그래서 쌀농사가 발달한 곳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부뚜막이라고 오승환 실장은 설명합니다.
흙으로 빚어 만든 부뚜막. 밑에는 불을 때는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는 윤이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는 가마솥을 걸어놓습니다. 부뚜막 옆에 도톰하게 흙을 바른 곳에는 사기 주발이 놓여 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침마다 일어나면 사기 주발을 닦고 처음 길은 샘물을 그 안에 정성스레 담았습니다. 부엌과 음식을 맡아 관리한다는 조왕신께 집안의 건강과 행복을 빌기 위해섭니다.
부뚜막의 조왕신에게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일본에서는 부뚜막을 모시는 신사가 있을 만큼 부뚜막은 단순한 주방 시설을 넘어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오승환 실장은 설명합니다.
오승환 실장
: 지금도 부뚜막을 발굴하다 보면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갈 때 부뚜막을 쓰던 여자분이 자기가 쓰던 그릇이나 비녀,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거든요. 그런 것들이 보여요.
한국과 북한의 부뚜막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부뚜막이 북한을 통해 한국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기능이나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4년 전까지 북한 평양의 아파트에서 살았던 탈북자 김연화씨도 부뚜막에 관한 많은 추억을 털어놓습니다. 대도시 평양에서도 옛날에 지은 집과 아파트에는 부뚜막이 있었습니다.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솥단지는 물론이고 식량이 부족해 쌀밥을 먹지 못했을 때는 아궁이 불에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먹던 향수에 잠겨봅니다.
김연화 씨
: 부뚜막에 대한 추억이 많죠. 평양에서도 옛날에 70년대에 지은 집들에도 부뚜막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할머니가 밥을 해서 밥이랑, 반찬들을 그 부뚜막 아랫목에다가 놨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직장 다녀온 아버지랑, 학교 갔다 온 손주들을 줬던 기억이 나네요.
부뚜막에 걸린 커다란 가마솥에 팔팔 끊인 물로 목욕을 할 때면 부뚜막 앞이 순식간에 목욕탕으로 변한 것도 김연화 씨가 기억하는 부뚜막에 대한 추억입니다.
환갑을 앞둔 한국 주부 정선순 씨도 부뚜막에 대해 묻자 어렸을 적 아버지와 어머니가 직접 흙을 빚어 만든 허름한 부뚜막이 떠오릅니다.
정선순 씨
: 옛날에는 부뚜막이 흙으로 돼 있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요. 아주 오래된 일이죠. 저희들 세대나 알지. 옛날에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서 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만들었죠. 흙에다가 볏짚을 넣어서... 흙만 쓰면 서로 갈라지니까 볏짚을 넣어서 진흙을 만들었던 생각이 나네요.
부뚜막은 솥단지를 거는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요긴하게 쓰던 주방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요리를 하거나 음식을 올려놓을 때 쓰는 조리대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추운 겨울날이면 온기가 느껴지는 부뚜막에 앉아 있기도 했다고 정선순 씨는 회상합니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이 함께 기억하는 부뚜막의 또 다른 모습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입니다. 늘 부뚜막 앞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쳤던 어머니가 마음을 쉴 수 있는 공간도 부뚜막이었습니다. 시집살이에, 세상살이에 힘들었던 어머니가 부뚜막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던 모습은 남한과 북한이 함께 기억하는 어머니의 연약함이었습니다.
김연화 씨
: 시집살이가 힘들거나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말없이 부뚜막에 쪼그리고 장작더미 깔고 앉아서 불이 튀어 오르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을 때... 어머니가 많이 울기도 하고,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뚜막은 어머님의 눈물을 닦아주고 또 흘리게 해주는 공간이기도 헀고...억울했던 것을 부뚜막에서 풀어냈던 곳이기도 했죠.
정선순 씨
: 아..그전에 불 때면서 너무나 힘들어서 어머니가 콧노래 같은 것도 부르면서 불을 때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부엌에서 울면 복이 나간다" 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던 시아버지와 남편의 정이 서려 있던 곳도 바로 부뚜막 앞이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한국의 장석남 시인이 지은 "부뚜막 방" 이라는 시는 부뚜막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합니다.
<부뚜막 방/ 장석남>
그녀가 가진 첫 방은 부뚜막이었다 한다
식구들의 잠 귀퉁이를 풀고 한반이면 고요히 부뚜막에 나앉아 불 밝혀 쓰거운 일기를 쓰고
일기에서 덜어낸 나머지를 고요히 살았다 한다.
물소리 뚝, 뚝 떨어졌을까
일기장 위에도 가끔은 떨어졌을라
그때 나는 다른 생이 하나 있어서
가을바람 소리로나
바깥 문고리에 숯불처럼 파르스름 피어났던 듯
새파랗게 시린 손을 그녀에게 건네었던 듯
아무리 보아도 도무지 그것은 남자의 것은 아니었던 듯
감자밭의 감자꽃들
장독대로 올라온 달
그녀가 가진 첫 방은 부뚜막이었다 한다.
나는 이제 자꾸자꾸 나의 무릎팍을 모두어 더듬어보고
두드려도 본다.
부뚜막 방
부뚜막 방
부뚜막에는 많은 이야기가 함께 전해옵니다. 북한에서는 집 주인이 깨끗한가, 깨끗하지 않은가를 보려면 부뚜막에 걸린 가마를 보면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부뚜막에 걸터앉거나 올라갈 때는 복이 달아난다며 심하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아궁이 앞은 항상 청결해야 한다는 말에 항상 빗자루 질을 하느라 어머니는 허리 필 새도 없었습니다. 최신식의 입식 부엌이 대부분인 한국의 주방. 주부들이 더 편리한 것을 원하고 주방도 다양한 기능을 갖춰가는 현대 시대. 지금과 비교하면 불편할 것 같은 부뚜막이 알고 보면 참 편리한 주방문화였다고 서울 한강문화재연구원의 오승환 실장은 말합니다.
오승환 실장
: 지금의 입식에 비하면 많이 불편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주방문화였죠. 왜냐하면 다른 부뚜막 문화가 없는 곳을 보면 주방이 참 열악하거든요. 그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부뚜막 문화가 편리하게 돼 있어요. 써 보면은 참 편리한 제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내려온 겁니다.
커다란 솥뚜껑이 여닫히는 소리 아궁이에 불을 땔 때면 연기가 가득했던 곳.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단지와 감자, 고구마가 익어가는 향기를 기억하는 곳. 때로는 어머니의 눈물과 추억도 깃들어 있는 곳 부뚜막.
부뚜막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가족의 건강과 사랑이 시작되고 어머니의 손 때가 묻어 있는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남북 문화기행 <부뚜막 편> 끝으로 이동원의 <향수> 들으시면서 마칩니다.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