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됐나요: 북에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를


2007.01.01

주간 기획 '어찌됐나요' 2007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북한주민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 시간에는 남한의 납북자 관련 단체 대표들로 북한에 억류돼 있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원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남한에는 납북된 어부들의 송환을 위해 활동 하는 납북자가족협의회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지난 87년 피랍된 동진호 어로장 최종석씨의 딸인 최우영씨가 대표로 있습니다. 최씨는 지난 2005년 환갑을 맞은 아버지가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기다림의 징표로 임진각 부근 소나무에 노란 손수건 400장을 달아 세계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오는 1월15일이면 동진호 피랍 20년이 됩니다.

최우영: 미국 소설에도 있는데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담아서 동네 어귀 떡갈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았다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그 노란 손수건을 보시길 바라는 마음에 400장을 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가 보고 싶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거기를 가서 나무에 영양제도 주고 손수건도 갈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밤에 노란 손수건을 보러 갔는데 나무가 사라진 겁니다.

최근 파주 시청에서는 도로 확장 공사 관계로 소나무를 이전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최우영씨는 1955년부터 2000년까지 북한에 억류된 채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있는 납북자가 모두 485명이며 이중 남한으로 돌아온 사람은 불과 10여명 밖에는 되지 않는다면서 납북자들을 그리는 마음의 상징이기도 한 노란 손수건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에 더욱 가슴이 무너진다고 말했습니다.

최우영: 20년이 됐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 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한국 정서상 쉽게 잊혀지는 부분이 있어 마음이 아픕니다.

동진호 선원 최종석씨의 아내 김태주씨, 그리고 딸인 최우영씨 뿐만 아니라 모든 남한의 납북자 가족들은 북에 억류된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들의 송환을 위해 국제적인 단체들과도 연대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납북자가족협의회 최우영씨는 무엇보다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알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을 남한정부는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납북자 문제가 남한 국민에게도 바르게 인식되어지길 원했습니다.

최우영: 저희들이 가장 힘들었던 고통 중 하나가 김대중 정권 이후로 납북자를 납북자 문제로 풀지 않고 이산가족에 포함시켜서 이 문제를 없애는 거였습니다. 정부가 이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청사진을 내놔야 합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이 문제에 대해서 성심성의를 다하는 공무원이 한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아버지가 피랍됐을 당시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였던 최우영씨는 20년간을 그리움에 젖어 살면서 그 자신도 어른이 됐습니다. 올해는 부디 가족들이 다시 만나 그동안 못했던 얘기들을 나눌 수 있으면 한다며 아버지에게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최우영: 아버지 그리고 동진호 가족 여러분 이 땅에 모셔 오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하지만 꼭 기다려 주세요. 그러면 저희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셔오도록 할 테니까 추운 겨울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남한의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전쟁 당시 납북된 이들의 남한 송환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이 단체의 이미일 회장은 북한에서는 납북자는 단 한 명도 없고 월북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남북 당국자들은 더 이상 단어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소모적인 일이 없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남북은 지난해 있었던 7차 적십자 회담에서 남측이 요구한 ‘납북자와 국군포로’ 라는 용어 대신에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 이란 표현을 쓰며 남북이 이산가족들의 생사여부와 주소 확인 작업을 위한 문제를 계속 폭넓게 협의한다고 합의한 바 있습니다.

이미일 회장은 전쟁 납북자 문제가 반세기 넘게 진전이 없는 것은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현재 이산가족의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의 나이가 70대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미일: 지난 9월 사료집이 나왔습니다. 여러 통계 자료도 있고 물증 자료도 있고 가족들의 증언 녹취록도 있고 한데 거기 보면 거의 10만에 가까운 사람이 납치된 것으로 저희가 통계를 냈습니다. 그 분들이 지금 북한에서 대부분 돌아가셨을 것이라고는 생각이 되지만...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북으로 간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명백한 납치라고 주장했습니다. 북한당국에 의한 납치였음을 밝히는 자료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습니다.

이미일: 우리가 증언을 모으고 있습니다. 현재 80건 정도가 진행이 됐는데 전부 내무서원, 북한의 정치부원, 사복이지만 붉은 완장을 찬 사람이 잠시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며 데리고 가서는 안 왔거든요. 북한정권에서 일하는 사람이 데리고 가서 안 온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분명히 납치죠.

이미일 회장은 1920년생으로 올해 86세가 되신 아버지 이성환씨가 전쟁 당시 청량리에서 유기 공장을 운영하셨다면서 반세기가 지난 아직까지도 아버님 소식조차 모르고 있다며 답답함을 털어놓습니다.

이미일: 모르죠. 그래서 지금 저희가 지금도 진행 중인 피해라고 주장 하는 겁니다. 살아 계신지, 돌아 가셨는지, 어떻게 살고 계신지 ... 남은 가족들이 애가 타고 정말 못살 정도로 괴로운 고문인데 저희는 56년 동안 그런 상황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

이미일 회장은 85세가 되신 자신의 어머니 김복남 여사는 남편을 애타게 그리며 홀몸으로 세 딸을 훌륭하게 키우셨다며 가족 상봉의 그날까지 북한에 살아계신다고 믿고 있는 아버님의 무탈을 기원했습니다.

이미일: 항상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이날 이때까지 아버님의 사랑을 한 번도 있은 적이 없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고 미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아버님을 꼭 뵙고 싶습니다. 어머니도 연로하셔서 예전 같지 않게 노인이 되셔서 기력도 많이 쇠해 지셨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 꼭 저희들 품으로 돌아오는 그 날이 꼭 2007년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아버님 가슴에 카네이션 꽃도 달아드리고 아버님을 정말 편안하게, 여생을 잘 모시고 싶습니다. 아버님 건강하시고 새해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워싱턴-이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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