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언제나 즐거운 번개팅
2024.11.18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이시영입니다. 요즘은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밖에 나갈 수 없을 만큼 겨울이 성큼 다가온 느낌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씨, 낙엽이 떨어지는 거리를 걸으면서 이곳에선 당당하게 들을 수 있는 반면 북한에서는 몰래 자주 들었던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한달 후면 올해도 지나가 나이만 늘어나지만 친구들의 위로의 한마디 한마디 덕분에 새해에 제게 찾아올 새로운 일상들이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나날이 좋아지는 현실에 나이들어가는 게 정말 아쉬운 시영이는 연말이 되어오면서 한없이 부러운 풍경들이 있습니다. 청취자님들은 아마도 추운 겨울 장작을 더 때야 하나, 구멍탄을 더 장만해야 하나, 식의주에 연연하느라 풍경이나 타령하는 시영이가 많이 한가해 보일지도 모르지만요.
이곳에서 사노라면 연말에 회사 송년회도 하고 동호회 계모임도 하지만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모임은 동창회랍니다. 중고등 동창회, 초중고 동창회, 대학 동창회 어릴적 철없던 모습, 부끄러웠던 과거, 즐거웠던 일상, 힘들었던 시간 모든 것을 알고 함께 위로해주던 친구들과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신분 사회 그곳에선 친구를 경계해야 했고 비밀을 철저히 지켰고 먹고 살기 힘든 곳에서 친구 사이에 쌀 몇 킬로를 가지고 갑과 을이 존재하고 그렇게 친구의 소중함보다는 인생의 시간에 잠깐 스쳐가는 지인 정도였죠.
‘꿩 대신 닭이다.’라는 속담에 맞게 이곳에 정착하는 탈북 여성들은 친구를 사귀는 데서 다양성이 늘어갑니다. 탈북 동기, 하나원 동기, 국정원 동기, 회사 동기, 고향 동기 그러다 보니 나이가 같은 친구는 없고 위아래 10년씩은 차이가 나지요.
시영이 친구들도 저보다 나이는 10년씩 위가 대다수고요 아래 친구들은 저를 잘 끼워 주지 않더라고요. 봉건적인 북한사회 탓도 있지만 특히 제가 그곳에서도 완전 보수적인 성향으로 자라다 보니 이곳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놀때 가끔 어린 할머니처럼 굴거든요.
솔직히 시영이는 어릴적 친구 생일놀이에 한번 가본 경험이 없이 집과 학교밖에 몰랐고 학교에서 출발할 때는 선생님이 수첩에 오늘 성적, 공부할 내용, 학교에서 출발한 시간 등을 적어 저녁에는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사인을 받아가곤 했답니다.
물론 나이가 어린 동생이 저를 친구로 대해주고 동생 친구들이 언니라고 불러주면서 친구를 대신해 주기도 하지만 제 성향이 언니들을 더 좋아하더라고요. 며칠 전 언니 한분이 시니어 모델에 도전한다고 식단관리와 운동을 병행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놀기를 좋아하는 이쁜 언니가 저의 모임에서는 분위기 메이커거든요. 그런데 그날 갑자기 회사 일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언니들이랑 번개팅을 하려고 하니 언니가 시간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번개팅은 이곳에서 미리 선약이 없이 당일 연락을 하여 가능한 사람들끼리 만나 맛있는 것도 먹고 기분이 좋으면 2차, 3차 즐겁게 지내는 깜짝만남을 말합니다. 먹을 게 많고 일상이 풍요로운 이곳이다 보니 선약도 많고 번개팅도 많고 구실을 잡으면 다양한 방법으로 모여 먹고 놀고 노래방에서 춤도 추고요.
그날도 계획 없는 번개팅에 설레어 나갔는데 이쁜 언니가 시간이 안된다니 서운하기는 했지만 이유는 궁금했죠. 알아봤더니 50이 넘으신 언니가 시니어 모델에 도전하신다면서 준비해야 하니 술을 마시지 못하고 몸매관리 차원에서 식단관리를 하신대요.
저녁에는 닭가슴살 샐러드를 드시고 운동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요? 북한이 고향인 여인들이?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을 만하다는 생각과 함께 수면제를 가지고 떠났던 언니의 탈북 노정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로 지나갔습니다.
북한에서라면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할 시니어 모델에 도전하는 언니가 참 멋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언니는 그 나이에도 건강관리, 몸매관리 키도 크고 이쁘고 인성도 좋으니 모델을 해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날 번개팅에 모인 언니들 포함 우리는 전화기 너머로 언니를 엄청나게 응원했습니다.
50살이 넘은 언니의 레드카펫 위의 런웨이를 응원하면서 그날도 우리는 탈북하기 잘했다고 이야기했답니다. 지금 북한에 산다면 모델은 고사하고 내일 가마에 넣을 옥수수 쌀을 마련한다고 머리에 혹은 등에 장삿짐을 지고 날랐을 언니가 이곳에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선택해 먹으면서 황금 노후를 꿈꾼다니 참 오늘도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번개팅에서 좋은 소식을 들었지만 아쉬운 점은 있었답니다. 모델을 준비하시는 언니 이야기를 듣고 동갑인 언니들이 전화를 끊고 서로마다 다이어트 해야 한다느니, 몸매관리 해야 한다느니, 건강관리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니 번개팅 장소부터 바뀌더라고요.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시작하려는 우리의 번개팅은 그날 건강식인 청정오리 백숙집으로 시작되었고 그럼에도 한잔을 마시지 않고는 우리의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2차는 최근에 유행하는 하이볼 식당으로 갔답니다.
청취자님들은 하이볼을 처음 들어보시죠? 하이볼은 최근 젊은이들 속에 유행되는 술인데요.
술에 탄산수와 과일즙 혹은 과일 조각과 얼음을 섞어 주는 아주 맛있는 술입니다. 알코올 도수는 6% 정도랄까요.
그날 우리는 하이볼 한잔씩 놓고 사진도 찍고 또 회사에서 아님 집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소중한 자유의 일상을 만끽했답니다. 탈북여인들이 모이고 또 나누는 이야기 속에 늘 등장하는 고향이야기, 탈북 이야기, 정착 이야기, 가족 이야기, 모든 이야기 속에는 오늘도 고생하시는 고향의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청취자님들의 걱정이 묻어있습니다.
탈북하기 잘한 우리의 인생이 고마우면서도 한쪽으론 오늘도 잠시의 여유도 없이 핍박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날씨까지 추워 더 움츠리는 몇달을 보내야만 하는 고향 분들의 일상은
행복한 우리의 일상에서 늘 아픈 손가락이며 마음 쓰이는 애절한 추억입니다. 오늘도 힘내시고 이곳에서 누리는 온전한 자유가 하루빨리 한반도 이북지역에도 퍼져나가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시영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