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화살머리 고지의 유해발굴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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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강원도 철원 지역 비무장지대(DMZ)내 화살머리 고지로 들어가는 통문 앞 한국군 상황실의 외벽에는 “조국의 품으로 반드시 모시겠습니다”라고 적인 대형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화살머리 고지는 지난 9월 19일 제5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서명된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남북이 시범적 공동 유해발굴에 합의한 장소로서 오른편 3km지점에 있는 백마고지와 함께 6.25전쟁의 격전지입니다. 이 합의에 따라 한국군이 10월 1일부터 유해발굴에 필요한 출입로 및 수색로 확보를 위한 지뢰 제거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북한군에게 전면 남침을 알리는 ‘폭풍’ 작전 명령이 하달된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였습니다. 명령 하달과 함께 북한군의 제1, 2, 3, 4, 5, 6, 12사단과 제105 전차여단 등 5만여 명의 병력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철원, 강릉 등 다섯 개 방면의 11개 지점에서 일제히 38선을 돌파했습니다. 그것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까지 장장 1,129일 동안 치러진 6.25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을 하다가 휴전협상을 먼저 제안한 쪽은 북한이었습니다. 북한은 남침 개시 후 한달 만에 경상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점령했지만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38선 너머로 패주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무렵 북한이 휴전을 제안한 것입니다. 물론, 이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지연시키면서 중국군의 참전을 기다리는 시간 벌기 전술이었습니다. 이후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다시 뒤바뀐 1951년 3월에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중국군의 펑더화이 사령관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했지만, 중국군은 이를 거부하고 4∼5월 동안 춘계 대공세를 감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군과 유엔군이 중국군의 공세를 저지하면서 전쟁은 교착되었고 중부전선에서는 밀고 밀리는 혈투가 이어졌습니다. 이 상태에서 1951년 여름 양측 간 휴전협상이 시작되었고, 최초의 휴전협상이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정전 이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공방전이 더욱 치열하게 펼쳐졌습니다. 화살머리 고지가 위치한 중부 철원평야 지역은 그 공방전의 중심지였습니다.

화살머리 고지 역시 백마고지와 함께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중부의 요충지로서 북한이 6.25 전쟁을 도발했을 때에는 주요 남침로의 하나였습니다. 화살머리 고지에서는 두 차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제1차 전투는 1952년 10월 6일일부터 10월 10일까지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병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군 제113사단을 맞아 싸운 전투였습니다. 프랑스 대대는 전사 47명 부상 144명이라는 손실을 입으면서 고지를 사수했고, 한 때 방어선이 뚫리기도 했지만 긴급 투입된 한국군과 미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섬으로써 5일간의 격전 끝에 고지를 탈환했습니다. 이 전투에서도 중국군은 약 5천 명의 전사자와 7천 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국군의 파상공세는 이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두번째 화살머리 고지 전투는 휴전을 코앞에 둔 1953년 6월에 중국군의 공세로 시작되었습니다. 철원평야에서 한국군 제2사단과 대치하던 중국군 제23군은 6월 12일에 제29사단을 백마고지에 투입하고 6월 26일에는 73사단을 화살머리 고지에 투입하여 두 고지를 동시에 탈취하고자 했고, 수적인 열세로 고전하던 한국군은 7월 9일 화살머리 고지를 중국군에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2사단이 과감한 역습 작전을 통해 7월 11일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함에 따라 중국군은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퇴각해야 했습니다. 이로서 한국군 제2사단은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방어하는 전사에 빛나는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화살머리 고지에는 수많은 젊은 죽음들이 묻혀 있습니다. 어떻게 전사한 것인지 확인조차 되지 않은 수많은 한국군, 중국군 그리고 유엔군이 무명용사가 되어 65년의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국민 모두는 이런 역사를 기억하면서 옷깃을 여미고 유해 발굴을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이 땅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한국군과 유엔군의 유해들은 정중하게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모셔져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의 의무이며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중국군과 북한군도 유해도 정중한 예우 속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자(死者)는 더 이상 적군이 아닙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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