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칼럼] 북 고위급 망명과 코마네치
그렉 스칼라튜∙ 루마니아 출신 언론인
2010.12.28
2010.12.28
한국과 국제 언론은 최근 북한 주요인물들 몇명이 망명한 것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이들중 북한과 다른 나라의 군사협력, 특히 불법 대량살상무기 수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는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에서 일하던 통역관; 김정일 일가와 다른 고위 간부들을 위해 네팔에서 외화벌이 활동을 하는 ‘평양 옥류관’이라는 북한식 식당의 책임자; 그리고 앞으로 노동당 고위관리가 될 가능성이 보이던 양강도 청년동맹의 제1비서 등입니다. 북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 망명했다는 것은 김정일 독재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냉전시대에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하던 동유럽 나라는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였습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이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하면서 북한식 1인독재, 주체사상과 독재자우상숭배에 매료돼 루마니아를 북한과 비슷한 나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들은 20년 가까이 김일성 전국가주석과 가까운 차우셰스쿠 때문에 정치탄압, 인권유린과 식량위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차우셰스쿠 정권에 반대해 목숨 걸고 루마니아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중 루마니아의 해외정보국 대장이던 미하이 파체파 장군은 1978년 서독으로 출장을 갔는데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1980년대 "붉은 지평"이라는 책에서 차우셰스쿠의 생각, 사고 방식과 행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많이 폭로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파체파 장군의 망명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지만, 사실 파체파 장군의 망명보다도 루마니아의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의 망명에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루마니아 공산정권의 붕괴를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루마니아를 탈출하여 망명한 그 선수는 바로 ‘체조의 여왕’이던 나디아 코마네치였습니다.
1976년 14살이던 코마네치는 캐나다 몬트리올 하계 올림픽에 출전해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아 ‘체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코마네치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체조 역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평균대, 개인 종합, 이단 평행봉에서 금메달 셋과 단체 종합에서 은메달 하나, 그리고 마루운동에서 동메달을 땄습니다. 지난 34년 동안 ‘체조의 여왕'이라 불리던 코마네치로 인해 여자 체조는 전 세계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코마네치는 20세기 최고의 운동 선수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제 코마네치는 루마니아의 가장 강력한 상징적 인물입니다. 코마네치의 인생도 루마니아의 현대 역사와 운명과 잘 결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코마네치는 루마니아 독재자와 그의 아내의 지시로 '사회주의노동 영웅'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언론은 코마네치의 이미지를 이용해 차우셰스쿠 정권을 해외에 선전하려고 했습니다.
국내에서 공산당 행사를 할 때마다 코마네치는 공산당 간부들 앞에서 독재자와 그의 아내에게 감사하는 말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코마네치는 자신의 감독인 벨라 카롤리와 그의 아내인 마르타가1981년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국가대표팀감독이 되면서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코마네치도 이들을 뒤따라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우려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코마네치는 반공산주의 혁명 한달전인 1989년 11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국에 와 1976년 올림픽 남자 체조 금메달을 딴 미국 선수 바르트 코너와 1996년 결혼을 했습니다. 코마네치는 남편과 체조 학교를 같이 운영하고 책을 쓰기도 했으며 '세계 체조 선수'라는 잡지를 출판했습니다.
코마네치는 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루마니아를 자유로이 다니며 루마니아 고아들과 루마니아 체조 발전을 위한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49세인 코마네치는 2006년 6월 아들을 낳으며 자신과 남편의 오래전부터의 꿈이 이뤄졌다고 했습니다.
냉전시대에 북한과 상황이 가장 비슷하던 동유럽 나라는 북한에서 ‘로므니아’라 불리는 루마니아였습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이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하면서 북한식 1인독재, 주체사상과 독재자우상숭배에 매료돼 루마니아를 북한과 비슷한 나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들은 20년 가까이 김일성 전국가주석과 가까운 차우셰스쿠 때문에 정치탄압, 인권유린과 식량위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차우셰스쿠 정권에 반대해 목숨 걸고 루마니아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중 루마니아의 해외정보국 대장이던 미하이 파체파 장군은 1978년 서독으로 출장을 갔는데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1980년대 "붉은 지평"이라는 책에서 차우셰스쿠의 생각, 사고 방식과 행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많이 폭로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파체파 장군의 망명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지만, 사실 파체파 장군의 망명보다도 루마니아의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의 망명에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루마니아 공산정권의 붕괴를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루마니아를 탈출하여 망명한 그 선수는 바로 ‘체조의 여왕’이던 나디아 코마네치였습니다.
1976년 14살이던 코마네치는 캐나다 몬트리올 하계 올림픽에 출전해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아 ‘체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코마네치는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체조 역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평균대, 개인 종합, 이단 평행봉에서 금메달 셋과 단체 종합에서 은메달 하나, 그리고 마루운동에서 동메달을 땄습니다. 지난 34년 동안 ‘체조의 여왕'이라 불리던 코마네치로 인해 여자 체조는 전 세계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코마네치는 20세기 최고의 운동 선수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제 코마네치는 루마니아의 가장 강력한 상징적 인물입니다. 코마네치의 인생도 루마니아의 현대 역사와 운명과 잘 결합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코마네치는 루마니아 독재자와 그의 아내의 지시로 '사회주의노동 영웅'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언론은 코마네치의 이미지를 이용해 차우셰스쿠 정권을 해외에 선전하려고 했습니다.
국내에서 공산당 행사를 할 때마다 코마네치는 공산당 간부들 앞에서 독재자와 그의 아내에게 감사하는 말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코마네치는 자신의 감독인 벨라 카롤리와 그의 아내인 마르타가1981년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국가대표팀감독이 되면서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코마네치도 이들을 뒤따라 미국으로 망명할 것을 우려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코마네치는 반공산주의 혁명 한달전인 1989년 11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국에 와 1976년 올림픽 남자 체조 금메달을 딴 미국 선수 바르트 코너와 1996년 결혼을 했습니다. 코마네치는 남편과 체조 학교를 같이 운영하고 책을 쓰기도 했으며 '세계 체조 선수'라는 잡지를 출판했습니다.
코마네치는 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루마니아를 자유로이 다니며 루마니아 고아들과 루마니아 체조 발전을 위한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49세인 코마네치는 2006년 6월 아들을 낳으며 자신과 남편의 오래전부터의 꿈이 이뤄졌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