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자 실체: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을 잡기까지 (1)

주간기획 '김부자 실체' 이번 시간부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어떻게 권력을 장악하게 됐는지 그 과정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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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봄, 김일성 종합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정일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처 참사실에서 근무하면서 정치 수업을 받기 시작합니다. 김정일의 첫 근무처였던 당 중앙위원회 비서처라는 곳은 당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김정일은 당 조직부장이였던 숙부 김영주의 도움을 받아 당 내부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년 동안 당에서 근무한 김정일이 다음으로 옮겨간 자리는 내각 제 1부수상 참사실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이곳에서 정부 행정의 전반적인 업무를 배우게 됩니다.

그가 2년 동안에 걸쳐 당과 내각에서 업무 파악을 한 후 맡은 직책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 지도부 중앙기관 지도와 책임지도원'이란 요직입니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스물 네 살이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수령의 아들인 김정일은 자기 밑에 수명의 지도원들을 거느리며 중앙기관과 당 조직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함께 김정일은 김일성의 현지 지도에도 함께 동행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김정일은 1974년 32세의 나이로 당 정치 위원회 제5기 중앙위원회 8차 회의에서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 기반을 완전히 닦고, 80년 6차 당대회에서 당 정치국 서열 4위, 당 비서국 서열 2위, 당 군사위원회 서열 3위로 호명되면서 후계자 지위를 공식화했습니다. 지난 2003년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 김철혁(가명)씨는 김정일은 후계자가 되기 위해 김일성의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철혁: 김정일은 1980년 10월 10일 당 대회 6차 대회때 정식 후계자로 선포됐습니다. 그는 아버지 후광에 얻으려고 악착스럽게 자기 기반을 닦았습니다. 80년대쯤 들어서서 후계자 선정에 대두되니까 이미 김정일의 세력은 김일성을 흔들 만큼 세져 있었습니다.

김정일의 권력 장악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가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기까지 몇 차례 어려운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는데요, 그 첫 번째 장애는 1967년 일어난 소위 '갑산파 사건'입니다. 김일성의 직계는 북한내 공산당 계열인 갑산파와 빨치산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국방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추진하려고 했는데 갑산파는 경제우선정책을 요구하며 이를 반대했습니다.

갑산파는 또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대신 당내 서열 4위였던 박금철을 김일성의 차세대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박금철의 업적을 선전하는 영화 '일편단심'을 만들었습니다. 김일성은 갑산파의 이러한 움직임을 부자간 권력 세습의 필수적 요소인 개인숭배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갑산파 숙청을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대규모 숙청은 2년 동안 계속됐고 갑산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맙니다.

한편, 갑산파 사건은 김정일이 영화예술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갑산파들이 영화예술분야에 많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알고 갑산파들이 이 분야에 끼친 '반당적 해독'을 뿌리 뽑을 것을 지시했는데, 당시 유독 영화를 좋아?던 김정일은 이일을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김정일은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승진되었고 이 때부터 소설이나 영화를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하는 등 '사상부문'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만든 영화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등은 김일성 우상화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김일성은 이들 영화를 보고나서 김정일의 능력을 인정해 줬다고 합니다.

워싱턴-이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