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전수일 chuns@rfa.org
한 탈북남성이 남한의 트로트 여가수와 무대에 함께 서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박성진씨. 남한에서 인기 절정에 있는 트로트 가수 장윤정씨의 최신곡에 소해금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 서울지국을 찾은 박성진씨를 전수일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첫사랑)
장윤정씨의 ‘첫사랑’의 전주곡을 듣고 계십니다. 배경에 흐르는 이 애절한 선율의 악기는 바로 탈북자 박성진씨가 켜고 있는 소해금입니다. 북한 평양예술대학교에서 9년간 소해금 연주를 공부한 박씨가 남한 최고의 트로트 여가수와 함께 무대에 서게 된 사연부터 물어봤습니다.
남한에는 2005년도 12월에 도착해서 지인을 통해 장윤정씨 [기획사] 사장을 알게됐다. 그때부터 노래, 보칼, 피아노등 트레이닝 받고 소해금을 들여왔다. 장윤정씨 작년 6월 3집 앨범을 내면서 그때 첫사랑 비롯해 다섯 곡 정도 소해금 연주를 했다. 그래서 작년부터 장윤정씨 콘서트 할 때마다 같이 했다.
박성진씨는 노래하기를 무던히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남한노래를 11살에 들어간 예술대학교시절부터 듣고 좋아했는데, 결국 그게 화근이 되어 북한을 탈출하게 됐다고 합니다.
박성진: 큰 일이 났어요. 선전대로 간부들이 나를 찾아서 갔다. 나를 데리고 가는데 차를 태우자 마자 족쇄를 팔에 채우더라. 그래서 보위사령부에 들어가 사형선고 받고 2달 정도 감옥에 있다가 살아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한에서는 한국노래를 부른 자나 들은 자나 똑같더라. 나를 처단하면 거기 있던 사람들도 모두 들은 자들이 되어 처단 받게 되니 자기들 살자고 나를 살려준거다.
스무살에 대학교 졸업후 인민군에 입대해 군 선전대에서 활동하면서 군 간부들 파티에 자주 불려가 악기도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당, 군, 정 고위급 간부들이 모인 한 파티에 불려가 그들의 흥을 돋구기 위해 신나게 노래를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남한 노래를 불러버린 것입니다.

비록 사형은 당하지 않았지만 황해남도 금광 교화소에서 8개월간 노동을 하고 나와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예술단원으로 연주활동을 했는데 2002년에 또 일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박성진: 2002년 아리랑축전 집단체조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당시 관객이 8,9천명 됐었다. 노래를 했는데 7곡 정도 이후 앵콜이 나왔다. 흥이 나서 [북한노래의] 본을 잊어 버린거다. 갑자기 마이크가 꺼지더니 ‘가수는 무대위로 올라오시오’라는 지시가 나왔다. 밑에서는 아이들이 ‘뽑혀간다’고 떠들고. 난 그때 알았다. 또 걸렸구나 라고. 또 죽었구나 하고 올라갔더니 그런 식으로 노래부르지 말라고 경고 받았다. 거기에서 내가 강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노래를 사랑하고 부르고 싶고 연주를 하고픈데 내가 북한에서 할 수 있는 음악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허무해 지더라. 그때부터 정신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박성진씨는 어머니와 당시 평양에서 대학교수였던 아버지와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고 남한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원래 박성진씨 부친은 남한 경상도 마산 태생으로 조부모가 일찍이 중국 동북삼성지역에 자리잡고 살다가 1960년대에 북한으로 가서 살게 됐다고 합니다.
남한태생의 재중교포 출신으로서 비록 대학 교수였지만 북한 사회에서 출세는 더 이상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박씨의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가는 게 무슨 죄겠냐’면서 탈북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누나들과 함께 2003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갔다가 2005년 남한에 입국했습니다. 하지만 가족 몇 명은 도중에 체포 북송돼 아직도 북한에 있다고 합니다.
이제 자유롭게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던 연주와 노래를 할 수 있으니 북한에서의 꿈은 이뤄진 셈입니다. 하지만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남한에서의 꿈을 이루는 일입니다.
박성진: 저는 항상 음악이다. 가깝게는 이것이 일종의 극악이라서 한국의 극악단과 연주하고 싶고. 최종적으로 노래를 위해 여기온 것 아닌가. 꼭 앞으로 가수가 되려고 한다.
박성진씨는 기자의 청에 흔쾌히 기타를 들고 노래를 들려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