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말살의 현장, 평남 개천 14호 관리소

서울-장명화 jangm@rfa.org

어머니가 죽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슬퍼하지 않았던 아들. 벗어나면 좋을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 악몽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26살의 청년. 태어나면서부터 고문과 처형에 익숙해져야 됐던 한 탈북자 청년의 기구한 삶은 북한수용소의 잔인함과 인간 말살을 증언합니다. 오늘과 내일 정치범 수용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생활한 탈북자 신동혁씨를 만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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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탈출해 지난해 남한에 입국한 신동혁씨 - RFA PHOTO/장명화

그는 여전히 두렵습니다. 제 갈길 바쁜 사람들 속에서도, 혹시 누가 자신을 감시하지 않나 자꾸 휘둘러봅니다. 정치범 수용소를 탈출해 남한에 온지 일년하고도 한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북한인양 착각합니다.

(신동혁)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다니고, 자유롭게 보고 먹고 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도 들고요, 아직은 내가 완전히 자유롭고 내 죄가 없어졌다, 내가 북한수용소에 있을 때 짊어지고 있던 죄가 없어졌다 이런 생각이 아직 안 들구요.

신동혁씨는 태어나자마자 ‘정치범’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한번 수용되면 영원히 사회로 복귀할 수 없는 종신수용소인 평남 개천의 14호 관리소. 젊어서 이 수용소에 끌려온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해 낳은 악질분자였기 때문입니다. 악질분자였기 때문에 그는 북한정권에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북한사람들과는 달리 주체사상 교육도 받지 않고 어린시절부터 강제노동에 투입됩니다.

(신동혁) 우리는 선생님들이 보위부 지도원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총 찬 상태에서 우리는 공부 배웠어요. (기자: 선생님들이 학생들 공부 잘하면 칭찬도 해주고 그래요?) 공부를 잘해서 칭찬받는 것보다도, 일 잘하면 칭찬해줄때가 가끔 있었어요. 우리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까요. 인민 학교 때나 공부해보고 중학교서부터는 공부라는 것 없이 그냥 일만 다녔거든요. 일 작업만 하고 다녔으니까...

어린시절 그가 겪은 고통은 그를 낳아준 부모에 대한 증오로 바뀝니다. 인간사회에 있어서 가장 밑바닥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아무 죄도 없는 이 어린아이 신동혁의 가슴에 칼로 벤 아픈 자국을 낸 겁니다. 그의 어머니와 형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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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철책을 넘다 다리에 난 상처들 - RFA PHOTO/장명화

(신동혁) 내가 북한사회나 북한에서 보위지도원들에 대한 분노보다도 나를 낳은 엄마나 아버지에 대한 나쁜 감정이 더 쌓여있었어요. 엄마가 나를 낳고, 또 우선은 나를 그런데서 낳게 해준데 대해서 원망스럽고, 일단 나를 낳아주었어도 엄마나 형이나 처음엔 저들만 살겠다고 도망치다가 잡혀서 총살당해서 우릴 고생시키고 그랬으니까 그게 더 원망스럽지...

5살 어린이에 비친 것은 도시의 아이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듯,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총탄을 맞고 죽어가는 이른바 공개처형. 처형이라기보다는 볼거리로 보면서 성장했습니다. 참 이럴 수가 있나하는 자괴감으로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신동혁) 그냥 총살당하면 잘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들 호기심이 나서 구경하러 가거든요. 호기심으로. 솔직히 관리소에 달리 구경할게 없으니까, 우리는 누가 총살당한다! 그러면 저녁마다 시간 맞춰서 가려고 하거든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나 자체도 그랬어요.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을 나도 보려고.

그러나 그가 이런 고통을 남의 것인 양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즐길 수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자신이 희생자였습니다. 인터뷰를 하다 벌떡 일어서서 들어올린 배와 등.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썩은 나무의 껍데기와 같은 피부색깔. 다시 바지를 걷어 올린 그의 정강이에는 전기철책을 넘다 전기에 살이 익은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신동혁) 내 신체에 있어서는 여름에도 옷을 제대로 못 입고 다니거든요. 반바지도 못 입고.. 편안히 입고 다니질 못해요. 다른 사람들같이. 내가 96년도에 14살 때 나이로 불 고문을 당했다고 하면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10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신동혁씨가 증언하는 북한 수용소 생활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합니다. 이 지구상에 아직도 이런 잔인한 폭력이 무고한 인민들을 향해 행해지고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절로 듭니다. 신동혁씨는 믿건 말건 자기는 그것을 봤고, 그것에 희생됐고, 그것 때문에 태어나서부터 20대, 아니 앞으로 남은 인생도 큰 타격을 받게 됐다면서, 그러나 그것 역시 운명으로 받아들이려는 담담함을 보입니다.

(신동혁) 태어났어요. 내가 현재 한국에서는 내가 사실대로 말해봤자, 수긍하는 분들도 있고 인정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 나를 비판하는 분들도 있고. ‘거짓말’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구요. 그렇지만, 내 자체가.. 어떤 분들은 나한테 말씀하실 때 마치 내가 돈을 바라고 그러는가하시는데, 저는 그게 가장 마음이 아프구요. 차라리 내가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탈북 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수용소에서 낳아서 자라서, 도망쳐나와 이렇게 나왔는데, 와서 내가 이것을 묻어두고 살자니 지금생활하고 거기 생활하고 너무 다르고, 마음도 아프고, 그래서 한두 마디씩 말하기 시작한 게 오늘날까지...

그는 굳이 인권이니, 자유니 평화니 하는 단어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잔인하게 짓밟혔던 과거로부터 헤어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는 신동혁씨의 오늘을 내일 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