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해: 고향 황해도 재령서,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나누고파

워싱턴-장명화 jangm@rfa.org

지난 주 ‘전국노래자랑’ 일편에 이어서, 오늘은 인간 ‘송해’를 알아봅니다. 서울에서 장명화 기자가 송해씨를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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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옆에서 원고를 검토하고 있는 송해씨 - RFA PHOTO/장명화

김옥희: 송해오빠가 그전에 78년도 노래자랑에서 전라도에서 열렸는데 제가 갔었거든. 반가워서 아는척한거예요. 송해오빠!!! 안녕하세요. (기자: 올해 몇 살이세요?) 지금. 66세. (기자: 영원한 오빠이신가봐요) 네. 송해오빠 화이팅!! (웃음)

김성규: (기자: 전국노래자랑 자주 보세요?) 자주 보죠. (어떤 게 가장 재밌으세요?) 아유, 송해선생님 나와서 하는 게 가장 재밌죠.

사회자 송해가 없는 ‘전국노래자랑’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남한국민들이 잘 이용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 가면 “송해가 만약 죽으면 전국노래자랑은 어쩌죠?”라는 질문까지 올라와 있을 정돕니다.

'전국노래자랑‘이 올해로 27년째로 최장수 프로그램, 그리고 음악 프로그램 중 단연 시청률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송해씨의 집착에 가까운 프로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서울 강서구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 여름 막바지 땡볕 더위에도 불구하고 녹화 시간 5 시간 전부터 나와 잔뜩 긴장한 출연자들과 호흡을 맞춰봅니다.

송해: 이런 기회가 내 평생에 다시 올지 안 올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멋지게 뽐내란 말이야. (넷, 알겠습니다.) 이 노래 하나는 나 이상 하는 사람이 없다, 알았죠? 노래자랑의 장점이 뭐냐면, 우리네 삶을 그대로 옮겨논다는 것, 잘 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좋은 직업, 나쁜 직업,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다 나오는 게 우리 프로예요. 그러니까 자신을 가지시라고. 네? 인생은 다 마찬가지지. 가졌으면 몇 푼 더 가졌어. 잘 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데.. 내가 최고다. 알았죠?

송해: 입고 나온 것 보니까 범상치 않다. (출연자가 자기소개 다 함) (송해) 혼자 다해, (출연자가 \x{cad2}아가 말림) 그럼. 한번 뒤로 돌아볼래? 왜 올려, 올리긴. 거 누구 것 빌려 입었어? (출연자) 시장 가서 5,000원 주고 샀습니다. (송해)머리도 그렇고, 의상도 그렇고, 조금 놀겠어? (출연자) 네. 놉니다! (출연자가 직업이 없는 백수임).

자그마한 키에 작업장에서 금방 나온 사람처럼 검붉게 그을린 얼굴. 그의 능청과 애교를 고희를 10년이나 넘는 노인이 노는 모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젊고 매력 있게 보입니다.

기자: 송해선생님이 청춘을 이 '노래자랑'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참 오래해오셨는데요, 건강상의 비결 있으세요?

송해: 뭐 특별한 비결은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현장에 가야되기 때문에, 가고 오는 움직임이라는 게 나를 도와주는 건강입니다. 우리 조국이 삼천리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라는 말을 하겠지만, 전국곳곳을 가보면, 맘에 안 드는 고장이 없습니다. 다 아름답고 또 거기서 묵고 싶고, 추억을 만들고 싶고, 그래서 그냥 그 취향으로 살다보니까, 건강은 그냥 따라오는 것 같아요.

지금껏 국민들의 사랑과 박수를 받으며 살아왔지만, 송해씨에게도 삶이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졌던 젊은 시절이 있습니다. 해방 후 배고팠던 시절, 부모님도 결사반대하는 음악도의 길을 선택한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기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해주 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국립극단 단원으로 취업해, 북한전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합니다. 그러다가 터진 6.25전쟁. 송해씨는 부모형제를 황해도 재령 고향땅에 놔두고 혼자 남한에 옵니다.

송해: 제가 악극을 하다가, 쇼무대에서 사회를 보기 시작했죠. 그때는 일인 일역 가지고는 도저히 식생활을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일인 삼역도 하고, 그러니까 쇼도 하고, 코미디도 해야 되고, 악극도 해야 되고, 뭐 이런 면의 경험을 쌓다보니까, 요새는 정말로 보는 분들의 취향이 달라져서 텔레비전이다, 이런 세상이 왔기 때문에 더 활동하는 무대가 넓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악극단 가수로, 텔레비전 희극배우로, 방송 진행자로 직업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그의 소망은 여전히 하납니다. 죽기 전 북한전역을 돌아다니며, 전국 노래자랑을 진행하는 일입니다.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듯이, 결부분에 도달한 지금, 고향땅을 돌면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강해집니다.

송해: 내 인생이라는 게 나팔꽃 같은 신세가 되서 우리 작곡가 신대성 선생이 곡을 만들어 주셔서 ‘나팔꽃 인생’이라는 노래에 안녕하세요가 있습니다. ‘(노래 부르기 시작)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일요일의 남자, 송해송~~~~~~~~~” 등 제가 노래를 한 90곡 불렀죠. 추억의 노래를 섞어서. 그랬는데, 정말 국내에 계신 분들은 끊없는 사랑을 주셨고, 또 아시아권에서 이 방송을 듣는 우리 동포여러분들, 용기내십시오.

그저 우리는 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하나 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변해가는 세상, 좋아지는 세상, 안녕들 하시고, 또 고향에 계신 여러분들, 참 오래간만입니다. 그런데 금강산 첫배가 갈 때 배안에서 여러분들 모시고, 참 눈물이 더 많은 노래를 더 많이 부르고 그랬습니다만, 모란봉에서 공영하면서는 정말 여러분들 댁에 가서 소주한잔 나누고, 밥 한 끼 국 한 그릇 나누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했습니다. 다음번에 갈 때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저 통일되는 그날 고향에 계신 여러분들, 또 재령 남우리벌에 야단법석으로 차려놓고, 한번 놀아보십시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