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중국의 탈북자에게 보내는 편지
2006.04.26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한민의 탈북자가 만나본 탈북자’ 순서입니다. 오늘은 함경북도 G군에서 살다가 2001년에 탈북하여 2006년4월 현재 중국의 모처에서 은신중에 있는 김현옥(가명)씨가 자신처럼 중국에서 방황하는 다른 탈북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나라도 없고 호적도 없는 이국땅에서 설움안고 살아가는 탈북동포들에게 이 편지를 보냅니다.
저는 함경북도 G 군에서 살다가 5년 전에 한 많은 원한을 품고 두 번째로 두만강을 건너와 중국의 오지에서 숨어사는 30대초의 여자입니다. 중국공안에 붙잡힐까봐 가슴 죄며 살아가는 저의 처지지만 제가 겪었던 비참한 현실을 또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을 막고 싶은 심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라도 북조선의 악마들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전합니다.
북조선에서 솔직히 자백하는 탈북자는 용서해 준다는 말을 절대 믿지 마세요. 1997년 겨울에 당장 굶어죽을 것 같은 우리집 식구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저는 20대의 나이에 60이 거의 되는 어머니와 함께 두만강 건너와 중국 농촌에서 죽을 힘을 다해 일하여 3개월 만에 중국돈 2000원과 쌀15킬로그램, 식용유 5킬로그램을 가지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집으로 가려는 우리 모녀를 보며 중국사람들은 “ 북조선에 다시 가는 것을 심중하게 생각해 봐라”고 하며 가지 말 것을 진심으로 만류하였지만 우린 그래도 보위부도 사람들인데 먹을 것을 구하러 잠시 갔다 온 우리를 조금 혼내주고 용서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끝내 두만강을 건너 북조선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그 땅을 밟은 첫 시작부터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국경경비대에 단속되어서 저의 집사정과 중국에서의 생활을 솔직하게 다 자백 했습니다. 어머니는 1년 전에 굶어죽은 아들에 대한 슬픔으로 엉엉 울면서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져간 쌀과 식용유는 하루 동안 조사받는 과정에 어디간 지 모르게 없어졌고 저의 몸속 깊이 감춰둔 중국 돈 2000원만 가진 채로 함경북도의 남양보위부로 호송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보위부에 끌려와 조사를 받게 되니 온 몸이 떨렸고 보위원들은 하나같이 저희를 몹쓸 짐승 대하듯 했습니다.
오가는 보위원마다 우리 모녀를 구두 발로 잔등이며 뒷머리를 축구공 차듯 걷어차며 지나갔고 “썅간나새끼들 중국가서 남조선놈들 만났던 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면 여기서 죽여버린다!” 고 소리치군 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조사하는 보위원들이 아들벌되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며 온갖 욕된 말을 퍼부었습니다.
여러 명의 남자 보위원들 앞에서 우리 모녀가 빤쯔도 못 입고 홀딱 벗긴 몸으로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당할 때 정말 저는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도저히 상상해 볼 수도 없었던 그런 참혹한 모욕을 당하면서 우린 그들에게, 그 악마 같은 짐승들에게 고분고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저와 어머니의 알몸을 막대기로 여기저기 희롱하기도 하고 감춘 것이 없나 하면서 음부와 항문을 들여다 보던 그들의 행동은 차마 글로 적는 것마저도 치가 떨립니다. 그들에게도 어머니가 있을 것이고 여동생이 있겠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일상처럼 하는지...
후에 알게 ?지만 보위부에선 그 정도도 괜찮은 정도라고 합니다. 10일간 보위부에서 초 죽움이 되도록 조사받고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농포집결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보위부에서 거의 탈진상태가 되어 집결소 오는 과정에 집으로 보내졌고 저만 집결소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97년 4월입니다. 나라 전체가 굶주림에 직면했던 그시기에 조국반역죄를 진 사람들을 수용하는 집결소안의 식량사정은 최악에 달했습니다. 소금국에 절인 배추 몇 토막과 손가락만한 염장무우 한쪽, 콩, 강냉이, 보리를 섞어 삶은 100 그램 정도의 한 끼 식사였습니다.
중국에서 피를 말리며 벌어온 돈은 집결소에서 1개월이 되면 모두 거덜납니다. 너무 굶주리니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주고 빵이나 떡, 혹은 김밥 한 줄 아니면 사탕10알 등과 바꾸어 먹습니다. 저 역시 어떤 일이 있어도 돈만은 안 쓰려고 했던 결과 얼굴이 해골이 되어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영양실조로 죽고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죽으면 가마니에 말아서 집결소 옆에 있는 시멘트공장 뒷산에 묻어버립니다. 말뚝도 없는 그 묘지들은 날이 밝으면 개들이 파헤쳐 내장을 뜯어 먹느라 사방에 널려지군 합니다.
당시에 농포리 집결소에 수용되었던 탈북자들이 수백 명이 되는데 그 사람들 모두가 산 증인들입니다. 그 후 3개월 만에 거주지담당 보안원이 저를 데려 갔고 거주지에 가서 또 그곳 보위부와 보안서에 불려가 며칠을 조사받고 제가 사는 군 노동단련대에서 6개월간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노동단련대 6개월 기간에 노예적 굴욕을 받으며 살아남기 위한 저의 처절한 몸부림은 제가 중국에서 벌어왔던 중국돈 2000원 중에 1000원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힘든 일감을 면제 받기 위해 현장감독지도원에게 뇌물로 바쳤고 저도 사람인지라 다른 애들이 면회하며 몰래 들여온 빵을 1개에 중국 돈10원씩 주고 사먹었습니다.
결국 중국 돈 1000원을 품고 집에 나왔을 땐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고 오빠와 남동생은 중국으로 탈북했는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집도 없었습니다. 그날 밤, 고향의 밤하늘을 쳐다보며 저는 야산의 풀밭에 누워 한없이 울었습니다.
몇 년전 까지만 해도 오늘같은 비참한 상황을 상상도 못했던 단란했던 우리 집이 지금 수난을 당하여 갈기갈기 찢겨졌습니다.
왜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기의 젊은 시절을 깡그리 수령을 위해 충성만 했고 한평생 당 앞에 머리를 숙이고 고분고분 양처럼 살아오셨건만 그 하늘처럼 떠받들어 모셨던 당과 수령은 말끝마다 “우리인민은 참 좋은 인민입니다.”고 하면서 이렇게 까지 잔인하게 학대한단 말입니까!
당에서는 인민들에게 자력갱생혁명정신으로 살라고 하는데 사실 인민들이 자기가 소유한 것이 뭐가 있어서 자력갱생한단 말입니까!
전체 인민을 도적으로, 전체 인민군대가 강도로 전락된 오늘의 현실은 우리가 어젯날 “위대한 장군님 모시여 가장 행복한 우리조국!”이라고 목이 터져라 부르짖던 그 모든 것이 거짓이란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북조선이라는 저 지역은 영도자 개인의 취향이 곧 국가정책이 되는 반인륜적 폭압지대이며 마땅히 세계지구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중국에 있는 탈북동포 여러분! 우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눈물을 뿌리며 두만강을 건너온 우립니다. 오고파서 온 중국도 아닙니다. 좋은 옷 입고 흰쌀밥 먹을 때마다 고향에서 오늘도 굶어 죽어가는 우리의 부모형제, 자매를 잊지 맙시다. 그들을 위해서 우린 죽지 말고 살아서 좋은날 오면 고향에 달려가서 쓰러져 지친 그들을 우리가 일으켜 줘야 합니다.
그날까지 절대 중국공안에 잡히지 말고 북조선에서 “용서해 주겠으니 돌아오라“는 기만에 속지 마십시오. 탈북자라면 너도 나도 다 겪어본 참혹한 그 현실을 남한과 세계인민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우리북조선인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세계에 알려야 합니다.
여러 죽을 고비를 넘기며 2001년 겨울에 저는 다시 중국으로 왔습니다. 이번에 두만강을 건널 때는 “조선이 개방되지 않으면 다신 돌아오지 않으리라 ”고 결심하였습니다.
저와 같은 수난을 당한 사람이 수천 명이 될 것이므로 북조선에서는 이 편지의 주인공을 식별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알기엔 모녀가 알몸으로 조사받은 것도 수백 명이 된다고 하며 딸만 집결소로 보내지고 어머니는 중도에 병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진 사례도 또한 많았으며 나 같은 상황에서 노동단련대에서 고생한 비슷한 유형도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에 있는 탈북동포 여러분!
지금이 가장 식량사정이 어려운 4월입니다. 6월 하순 올감자 나오기 전까지 산판의 새싹을 뜯어먹다가 쓰러져 죽을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들이 억울하게 죽었습니까!
문명의 21세기에 세상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때 한줌의 강냉이에 목숨을 거는 불쌍한 우리인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날은 언제면 올까요? 타국에서나마 희망을 잃지 말고 굳세게 삽시다.“
2006년4월15일 중국 흑룡강성 00시에서 김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