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의 편지: 북한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2006.08.09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탈북자의 편지’ 순서입니다. 오늘은 1992년에 탈북하여 한국에온 김병찬씨가 북한에 사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보고싶은 딸에게!
헤어진 지 14년이란 세월이 흘렀구나. 모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금 장마철이라서 여기 한국에도 비가 많이 와서 물난리가 났다. 이럴 때면 자연 북에 있는 가족걱정을 하게 된다. 조그마한 비가 와도 낡은 집은 없어지던 우리 동네인데 그곳에도 비가 많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피해가 생겨도 외부에 공개되는 일이 없는 땅이어서 더욱 긍금하다.
얼마 전 너의 소식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아빠가 보고 싶다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중국으로 갔으나 너무 실망하고 돌아섰다. 왜, 무엇 때문에 북한당국은 딸까지 동원해서 나를 붙잡으려고 하였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들이 너를 얼마나 고통을 주었으면 그들의 부탁대로 아빠를 유인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슬프다. 우리 서로 보고 싶어도 참고 다신 소식 알려고 노력하지 말자. 그것이 마음 편할 것 같다.
여기 남한에 온 북한출신들 모두가 북한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다. 어제까지 북한의 평범한 인민이었을 그들이 사아가기가 너무 고달파서 앉아서 굶기보다는 차라리 자유를 찾아 떠나자고 맘먹고 떠나온 선량한 사람들이다. 북한에서 주민 교양할 때 우리 같은 남한에 온 사람들을 가리켜 < 수령님을 배반한 자>, < 가족도 버리고 자기만 잘 살아보겠다는 더러운 인간쓰레기>라고 한다는데 잘 가려서 판단해라. 그런 식의 무지한 교육만 받다나니 오늘날 국제거지나라가 됐다고 생각된다.
사랑하는 딸자식도 믿지 못하게 만든 나라에 무슨 미련을 두겠냐! 난 너를 이해한다. 아빠는 남한에서 많은 사람들의 격려를 받으며 인권활동을 하고 있다. 생존을 짓밟히는 비극이 지속되는 것은 인류의 수치란 걸 남한에서는 어린애들도 알고 있어.
너에게 아빠를 유인하도록 시킨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진심으로 그들을 동정한다. 그들도 정신을 빼앗기고 살기에 그런거다. 그들의 속임수에 절대 속지 말기를 바랄뿐이다. 그건 충성이 아니야. 얼마 전에 금강산에서 남한의 어머니와 북한의 아들이 상봉했는데 그들을 동정하려던 세계의 눈길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변했단다.
아들이 자기 어머니앞에서 연극을 놀고 있다는 걸 세상 사람들은 보았다. 그리고는 북한체제를 다시 한번 저주했다. 기본적인 양심의 기준마저 저버린 북한에 사람들은 더 이상 동정하지 않을거야. 그 속에서 신음하는 주민들이 더욱 불쌍한거야. 나도 이 땅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고 있단다. 처음엔 영어글자 하나도 몰라서 거리에서 헤맨 적도 많았다.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여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저축하려고 노력한다. 북에 있는 자식들을 위해 내가 쉴틈없이 일하는데 딸자식인 넌 아빠를 붙잡으려는 사람들과 공모하다니 안 될 말이다. 다신 그런 자들의 속임수에 놀아나지 말아라. 이 아빠는 열심히 억눌린 자들의 인권을 위해 뛰어다닌다. 남한이라고 지상낙원은 아니다. 자유롭고 민주화되면 자랑할만 한데 어디가나 사회적 문제점들은 있기 마련이야. 탈북자들이 남한에 가서 모두 인간쓰레기 취급당하면서 죽어간다고 북한에서 말한다는데 남한에 와 있는 탈북자 치고 그런 불행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 하다. 주위에서 도와줘도 본인이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 뿐이다. 상당수는 행복하게 잘들 살고 있단다.
내가 너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 가지만 강조하련다.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는 북한 주민들이므로 그 안에서 듣고 보는 것이 전부로 알겠지만 사실 세계는 북한의 정치를 저주한다. 19세기에 성행했던 왕권통치가 지구상에 유일하게 북한에만 남아 있단다. 수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외부에 대한 증오심을 국가통치사상으로 되어 있는 북한을 두고 세계는 바로 보지 않는단다.
아마 북한주민들은 < 장군님없으면 조국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런 게 아니고 그만큼 주민들이 정신적으로 노예화 되었다는 걸 말하지. 나도 청춘시절 15년간을 인민군에서 근무하면서 수령이 운명의 구세주인줄 알았었다.
훗날 허위와 진실을 알고 보니 수령만큼 인민에게 죄악을 끼친 자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걸 깨우치니까 이제야 나도 자주적인 사회적 인격체로서 삶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내가 자유를 찾았다는 증거야.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게 된 보람도 있는데 아직도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슬픔이 마음을 누른다. 그 땅에서 살아 본 사람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고통을 너무나 잘 알지.
너도 이젠 다 자랐는데 사회적 현상을 객관적으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인민을 억압하며 세계흐름과 담을 쌓고 병영통치를 하는 북한은 분명히 오래 갈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라크도, 네팔도 뿌리 깊은 왕권독재가 인민들에 의해 무너졌다. 사랑하는 딸에게 선동하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의 진리를 아빠로서 알려주는 거다.그리고 이 아빠가 남한으로 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힘든 일 많아도 조금 참고 이겨내길 바란다. 나도 당분간은 그전처럼 너를 보고 싶어 두만강 근처로 가지 않겠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열심히 일을 하겠다. 부디 몸성히 잘 있거라. 통일될 그날까지 안녕히. 2006년7월20일. 남한에서 아빠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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