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기획 “중국 경제 개혁과 교훈” - 개혁 당시 경험담


2005.04.25

주간 기획, “중국의 개혁, 개방이 주는 북한에 대한 교훈”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중국의 개혁, 개방이 한창이던 1980년대 베이징에서 살았던 재미 중국인 리 씨 경험담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진행에 양성원 기자입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국인 리(Li) 씨는 당시 중국 베이징에 사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이 한창 꽃피우기 시작하던 지난 90년대 초 가족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현재 그는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의 한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기억해보면, 중국에서 개혁, 개방의 물꼬를 튼 시기로 통상 거론되는 지난 1979년보다 훨씬 이전인 1976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면서 그 해가 바로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마오저뚱 주석 등 핵심적인 중국 지도자들이 사망한 해였다고 말합니다.

Li: 우리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덩샤오핑이 다시 집권하자 베이징에서는 큰 환영 행사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76년 이전 적어도 두 번 이상 권력에서 밀려났었던 덩샤오핑은 중국 경제를 어떻게 이끌어갈 지 아는 자오즈양과 후야오방 같은 인물을 등용해 개혁 정책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리 씨는 이처럼 권력의 핵심에 오른 덩샤오핑이 개혁 개방을 진두지휘하면서, 중국은 80년대에 들어 서서히 경제도 발전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수도인 베이징 주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졌다고 말합니다.

Li: 76년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 동안 중국 경제는 급격히 발전했고 여러 가지 변화가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베이징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점점 높아졌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주민들이 흑백텔레비전과 더 나아가 컬러텔레비전까지 소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는 꼭 보고 싶은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이 있으면 공무원이시던 어머님이 일하셨던 정부 건물로 가서 거기 있는 큰 흑백텔레비전을 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70년대 후반부터는 사람들이 직접 텔레비전을 집에 사다 놓고 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가격이 상당히 비쌌습니다. 당시 보통 노동자의 6개월 치 월급을 가지고 소형 흑백텔레비전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3-4년 쯤 지난 80년대 중반이 되자 사람들 집에는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 화면 크기도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는 또 다른 당시 생활상의 변화로 배급표가 사라진 점을 꼽으면서 중국 사람들 사이에는 개인 소유가 좋은 것, 특히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Li: 점점 배급표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오저뚱 시대에는 한 가정이 생활하는데 식량에서부터 의복 등 갖가지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급표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점차 높아지자 이 배급표는 없어졌고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필요한 식량과 물품들을 제한 없이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덩샤오핑 집권 초기 그는 모든 이론과 사상은 실생활에 적용해 봐야만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만큼 실용성을 중시한 것이었습니다. 또 마오저뚱 시대에는 개인이 뭔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나쁜 것으로 취급됐습니다. 하지만 덩샤오핑 집권기에는 개인소유를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을 크게 장려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리 씨는 덩샤오핑이 중국 농촌에서부터 개혁을 시작했는데 우선 농민들에게 경작할 땅을 임대해 줘서 농사를 짓게 했고 그 농산물을 직접 팔아 일부 농민들은 꽤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 도시에서도 경제가 점차 발전하자 중국 당국은 국영기업을 점차 해체하는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소위 잘 먹고 잘 살게 된 중국 주민들은 덩샤오핑의 자본주의식 개혁 노선에 대부분 지지를 보냈다고 리 씨는 설명합니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마오저뚱 집권기와는 달리 국제사회로의 문호도 활짝 열게 됩니다. 리 씨는 80년대 영국의 한 대중 가수가 베이징에서 공연을 했던 것도 기억합니다.

Li: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나서 베이징에는 외국 사람들이 활보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또 서방기업들이 중국에 들어와 중국 당국은 이들과 협력해 경제개발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80년대 중반에는 영국의 밴드 ‘웸(WHAM)’이 베이징에서 공연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팝송이라고 불리는 서방 유행가들이 홍콩과 대만을 통해 중국 본토로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이러한 팝송을 따라하는 것이 크게 유행이었습니다.

하지만 리 씨는 덩샤오핑도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할 정도의 서방사조 유입에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Li: 덩샤오핑도 중국의 걷잡을 수 없는 변화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권을 유지하면서 중국 국민들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모든 서양 이념이 중국에 들어오면 정권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덩샤오핑은 중국의 민주화 진전을 주장한 반체제인사 웨이징성을 16년간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리 씨는 북한도 중국처럼 개혁, 개방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국제사회가 북한을 고립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감싸 안아 북한 사람들이 북한 바깥의 상황을 점차 알게 되면 북한 내부에서 뭔가 변화의 움직임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Li: 북한과 중국은 1당 독재체제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북한의 경우 당이 아니라 한 개인의 독재라는 측면에서 더 나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국제사회는 북한을 고립시키기 보다는 감싸 안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봅니다. 만약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방의 고립정책으로 인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면 어떤 일을 저지를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국제사회가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의 상황을 알게 해준다면 북한 내부에서부터 뭔가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북한은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서보다는 안에서부터의 힘으로 깨질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됩니다.

주간기획 중국 개혁, 개방이 주는 북한에 대한 교훈. 오늘은 중국이 개혁, 개방에 본격적으로 나섰던 1980년대 중국에서 살았던 재미 중국인으로부터 당시 변화된 생활상 등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중국이 개혁, 개방에 나섰던 당시와 현 북한의 경제상황에 대해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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