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일가족 탈북 성공한 여만철씨 별세

1994년 일가족 5명의 탈북 귀순으로 화제가 됐던 여만철씨가 17일 사망했습니다. 여씨는 남한에 정착한 뒤 이런저런 사업을 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으나 끝내 병마에 쓰러졌습니다. 귀순에서 남한 정착생활에 이르기까지 생전의 여씨의 면면을 살펴봅니다.

지난 1994년 4월 30일, 가족과 함께 남한 땅에 첫발을 디딘 여만철씨. 당시 여씨는 막연히 따뜻한 남쪽 나라를 그리워해서 나선 게 아니라 자유를 찾아 남한에 가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북한을 떠난 최초의 ‘귀순가족’임을 자부했었습니다. 올해 1월 남한생활 10년을 기념해 가진 자유아시아방송과의 인터뷰 내용을 들어보시죠.

여만철: 대한민국에 가겠다고 하고 온 것은 우리 가족이 1번입니다. 심양에 한 달 반 있다가 홍콩을 경유해서 김포공항에 입국했습니다. 중국에서 한국대사관에 들어갔고 그 다음부터는 (남한)정부의 보호를 받았지요. 남한의 반응이 대단했고요. 기자들도 한 4백 명 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1998년까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강연 계속 다니고, 둥둥 떠다녔죠.

북한에서 사회 안전부 정치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남도 함흥에서 사회 안전원으로 18년간 근무했던 여 씨.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경찰에서 추방되고 이에 따라 자녀들이 대학에 가는 것이 불투명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북한의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워져서 여씨는 마침내 북한을 탈출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여만철: 1994년부터 배급이 중단됐거든요. 당시 내가 안전기관에 있었는데 1987년에 제대를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탈북을 했지요. 풍서군에 있었는데 19세에 인민군에 나가서 함경남도에 계속 살았죠. 함남 시군단 지구에 있었습니다.

5년을 벼른 끝에 압록강을 건너 여 씨 가족은 중국에 진출해 있던 남한 기업체의 천주교신자의 도움을 받아 남한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찾은 이듬해에는 천주교에 입교해서 여 씨는 ‘프란치스코’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부인 이옥분씨, 장녀 금주씨, 장남 금용씨, 차남 은용씨도 모두 천주교에 입교했습니다. 이에 대해 여씨는 분단 50년 만에 탈북자로서 가족이 모두 천주교에 입교한 것도 처음일 것이라며 생전에 매우 자랑스러워했었습니다.

여 씨는 서울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1998년에 ‘여만철의 발룡각’이란 작은 북한 음식 전문점을 내고, 그 다음해에는 분점도 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잘됐지만, 1999년 말에 확장개업을 했다가 큰 낭패를 봅니다.

부인 이 씨는 냉면 뽑는 기계에 두 손가락을 잃었고, 여 씨는 사업실패의 충격으로 뇌졸중과 언어장애 증상을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01년에는 세 번째의 식당 ‘하내비’를 대구에 개업했습니다. ‘하내비’는 할아버지의 함경도 사투립니다. 여씨의 생전의 말을 들어보시죠.

여만철: 돈도 좀 벌었습니다. 식당을 원래 면목동에서 ‘발룡각’이라고 식당을 내고 이북국수를 팔았거든요. 그러다가 장안동에 식당을 확장했다가 돈을 까먹었죠. 그리고는 대구에 내려가서 장사를 했죠. 대구서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함흥냉면, 만두, 순대 등을 팔았습니다. 뇌졸중 걸려서 내가 말을 전혀 못했어요. 나는 거기 가서 계산대에 앉아서 돈만 받고 그랬죠.

큰딸도 남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유치원 보조 교사로 일하던 중 남한 남성과 결혼했습니다. 현재는 아들 둘을 낳고 행복한 주부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큰아들 금용 씨는 남한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중국으로 연수를 가서 만난 한족 여성과 결혼해, 현재 중국에서 딸을 낳고 살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막내아들 장가보내려고 돈을 모아야한다고 열심히 일했던 여씨는 그러나 최근 건강이 악화돼 검진을 받았다고 큰딸 금주씨가 19일 자유아시아방송과의 통화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위암말기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금주: 아빠가 올해 연세가 59세에요. 내년에 환갑이거든요. 젊었는데 원래 좀 한국에서 자식들하고 살아보시겠다고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까 몇 년 전에 중풍이 왔었거든요. 그래서 약간 좀 몸도 불편하고 아픈 상태였는데, 저희도 아빠가 중풍만 조심하면, 혈압만 조심하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저희는 차마 암으로 돌아가실 줄은 몰랐죠.

중풍으로는 여기저기 약같은 것 먹고 했는데, 암일 줄은 모르고 그냥 아파도 참고 있다가, 중풍 때문에 그러겠거니 하고 참고 있다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니까 이미 암이 위에서 식도까지 전이가 돼서 병원에서도 장이나, 간, 신장 같은 데에도 암이 전이돼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여 씨는 병원에 입원한지 일주일인 지난 17일 저녁 6시께 사망했습니다. 일가족의 집단 남한입국으로 남한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여 씨. 여 씨는 평소 본인의 뜻에 따라 화장된 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금호동성당의 납골당에 안치됐습니다. 한편, 여 씨가 세상을 떠난 17일 남한 언론들은 그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을 주요뉴스로 다루었습니다.

장명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