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옥고, 10년 연금 딛고 일어선 ‘인동초’

‘인동초’,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 자신을 추운 겨울에도 잎과 줄기의 푸름을 지키는 덩굴풀 ‘인동초’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인동초'처럼 그의 인생사는 파란만장한 형극의 세월을 이겨낸 뒤 대권 도전 4번 만에 제 15대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기 때문입니다.

6년 옥고, 10년 가택연금,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정치 역정을 이수경 기자가 정리해 드립니다.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섬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 전 대통령. 바다를 보며 자란 소년 김대중은 해운회사와 목포일보를 운영하는 건실한 청년 실업가로 성장합니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29세의 젊은나이에 무소속으로 목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가로서 첫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두 차례 선거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셨지만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다시 도전해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된지 사흘만에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해 국회가 해산됐고 그는 의사당 문턱도 밟지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본격적인 중견 정치인으로 자리매김 한 것은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부터입니다. 이어 197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의 경쟁자이자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 지명 선거를 치루며 비로소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합니다. 당시 '40대 기수론'을 내건 김영삼 전대통령과의 대결에서 2차투표 끝에 불과 37표의 차이로 대역전극을 펼치며 야당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화려하게 등극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 당을 더 한층 밝게 하고, 발전의 길로 이끌고,,”

이어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처음으로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불과 90만 표 차이로 아쉽게 패하긴 했지만 박정희를 맞수로 선전했다는 수확을 거둡니다.

그러나 이후부터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은 시련을 맞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도 자주 했습니다. 대선 한달 뒤 연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지원 유세를 다니던 도중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타고 있던 승용차가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맞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다리를 심하게 다쳐 이때부터 지팡이에 의지하게 됩니다. 두 번째 죽을 고비는 유신 때였습니다.

교통사고 치료를 위해 일본에 머물던 김 전 대통령은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하자 일본에서 귀국하지 못한 채 바로 망명 생활을 시작합니다. 유신을 반대하며 일본에서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섰던 김 전 대통령은 1973년 동경 시내 한복판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또 다시 죽음의 문턱을 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 폭력으로 제압 당하고 마취제를 써서 의식을 잃게 만들어가지고 자동차에 강제로 실려서 .. “

이후 김 전 대통령은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투옥과 가택연금을 반복하며 정치적 탄압을 받습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김 전 대통령은 잠시 정치적 봄을 맞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곧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 음모죄 혐의로 내몰려 1981년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세 번째 죽을 고비였습니다. 다행히 세계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으로 가까스로 죽음의 그림자를 피한 김 전 대통령은 1982년 미국으로 두 번째 망명길에 오릅니다.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2월 12대 대통령 총 선거를 앞두고 전격 귀국했지만 곧바로 가택연금 됩니다. 그는 1987년 6.10 민주화 항쟁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사면 복권된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두 번째 대선에 도전합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고 당시 김영삼 후보와 단일화를 못해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훗날 자신이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회고했습니다.

1992년 김 전 대통령은 세 번째 대선에 출마하지만 결과는 역시 패배. 세 번째 대권 도전 실패는 김 전 대통령에게 최악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는 선거 다음날 정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지방승리를 계기로 정계로 복귀했고 1997년 12월 18일 마침내 4수 끝에 대한민국15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건국 이후 최초의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오늘 우리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여야 간 정권교체라는 위업을 이룩했습니다."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김 전 대통령은 언제나 소수파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야당, 지역적으로는 호남, 학력으로는 상고 출신이라는 말이 늘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6년 간의 감옥살이, 10년 간의 가택 연금, 몇 차례의 죽을 고비, 두 차례의 망명, 그리고 정계 은퇴와 복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인동초처럼 시련을 이겨내고 대통령의 꿈을 이뤘고 평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한 민주 투사로, 그리고 한반도 평화의 수호자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