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의 보금자리 - 국군포로 아내 유영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삶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남한의 보금자리’, 오늘은 탈북여성 유영순 씨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2003년 남한에 입국한 유 씨는 남편이 국군포로출신이라는 이유로 지난 97년 탈북 전까지 탄광 일을 해야 했으며 북한에서의 생활은 감시와 굶주림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서울에서 이진서 기자가 북한에서의 국군포로 출신 가족의 생활에 대해 유영순 씨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탈북여성 유영순 씨는 지난 97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탄광 일을 했습니다. 남편이 국군포로였기 때문에 모든 가족이 보위부의 감시를 받으면서 살아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자식들까지 대를 이어 탄광 일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유영순: 국군포로 있고 의용군이 있는데, 남한에서 인민군에 입대해서 전투에 참가해서 온 사람은 너는 전라남도 어디 책임 비서다 뭐 이런 임명장을 줬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군당 학교라는 곳에 보내서 통일되면 남쪽에서 일정 지역을 맡으라고 임명장을 줍니다. 그런데 국군포로는 개 취급을 받지요.

유 씨는 남편 안영낙 씨가 국군포로 출신이었다는 사실만 알뿐 남편이 6.25전쟁당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가 포로가 됐다는 사실은 남한에 입국한 뒤 알게 됐다면서 북한에서는 남편이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외톨박이 생활을 했다고 말합니다.

유영순: 난 하나도 몰랐어요. 아이들 생각해서 말조심 하라고 그랬죠. 남편은 술도 안 마셔요. 술을 마시다 말실수 할까봐서요. 그저 담배만 피웠어요. 우리 남편은 말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집에 찾아와도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지 말을 안했어요. 그저 아이들이 잘되면 자꾸 울어요. 특징이 그거예요.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통일되면 고향에 같이 가자고 이 말은 쎄게 했어요.

국군포로 출신 남편은 50세가 넘어서야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캐는 일에서 벗어나 탄차를 수리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땅속에서 30십여 년을 일하다 이제 땅위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97년 배급이 모두 끊긴 상태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시달렸던 남편은 더 이상 삶을 이어가지 못하고 자연사하고 말았습니다.

유영순: 우리영감이야 굶어서 돌아갔죠. 우리 아들이 오전 11시에 탄광 일을 하고 돌아왔었어요. 아버지가 아랫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는 윗방에 누워 있고요. 아버지가 불러서 아들이 들어가 봤는데 그냥 쳐다보기만 해서 아들이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고 담배를 말아서 불을 붙여주고 잤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깨우니까 숨이 넘어 갔단 말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담배를 한모금도 빨지 못하고 담배를 문대로 있더란 거지, 담배가 축 처졌더라고.

당시 유 씨 집안의 형편은 그저 텅 빈 집에 허기진 노인과 젊은 아들과 딸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유영순: 우리 영감이 6월 14일 사망했는데, 집에 아무것도 없어요. 가마 두개를 빌려다 걸어 놓고, 이부자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비닐을 덮고 자고 하니까 아들도 등판이 헐고...

남편이 사망하자 모든 가족은 먹고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고 중국에서 남한에 입국하기 까지 7년이란 세월을 숨어 살게 됩니다.

유영순: 큰 딸은 97년 8월 25일 중국으로 건너오고, 작은 딸이 9월 24일 건너오고. 그해 추석이 9월 17일이었는데 아버지 사망된 것을 작은 딸은 장사를 하느라고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버지 제사를 지내놓고 딸이 24일 날 중국 건너왔어요. 그리고 내가 아들하고 10월 14일 중국 건너왔어요.

북한을 탈출해 비록 숨어 살아야 했던 중국에서의 생활이지만 먹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고 더욱 놀라운 변화는 남한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었다고 유씨는 고백합니다.

유영순: 처음 중국 땅에 넘어와서는 그렇게 북한에서 헐벗고, 멸시를 받았어도 김일성, 김정일 욕하는 것이 듣기 싫더라고요. 그런데 거기서 6.25 전쟁도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 먼저 쳤다고 조선족들이 말하더라고요. 그리고 중국에서 남한 방송 ‘사랑이 무엇이길래’를 봤는데 거시서 대발이 아버지가 조금 남은 치약도 절약 하면서 통일하자, 북한 사람들을 돕자,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우리 듣기에 북한에서는 남조선 사람들이 통일을 반대해서 통일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 씨는 지난 60여 년간의 북한 생활을 돌이켜 보면 정말 어떻게 살았는가 신기할 정도라고 말합니다. 북한에서는 당에서 지도하는 것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유영순: 사람이 먹고, 입고 이것이 부족한 것은 둘째 치고 백성들한테 거짓말 하지 말고 백성들한테 온전히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자 이런 식으로 말해야지 자기는 백성들이 잘사는 것처럼 허위 선전하고, 다른 나라가 잘되는 것은 전부 깎아 내리고, 나쁜 선전만 한단 말입니다. 여기 와보니까 그런 것이 없잖아요. 언어자유가 있고, 북한에서는 한마디 말을 잘못해도 본인이나 온 가족, 죄에 따라서 끌어가고. 이렇게 험악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요?

남한생활 2년째가 되는 유 씨는 함께 탈북한 아들과 서울에 살고 있으며 유 씨는 단순노동 일을 그리고 유 씨의 아들은 경비관련 일을 하며 착실히 남한 정착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이진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