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과연 미국이 탈북자들의 미국 재정착을 도울 진정한 의지가 있느냐는 짊문에 미국 관리들도이젠 한결된 'YES(예스)'로 답해야 한다고 믿는다." (In light of the Act, I trust the consistent answer of U.S. officials confronted with similar questions must now be an emphatic 'yes'.) -북한인권법 공동 발의자, 짐 리치 의원
북한 인권법, 부시 정권의 본격적 북한 인권 강경책의 출발
2004년 10월 18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미국 상하원을 만장일치로 통과한 북한인권법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법률로 공식발효 됐다. 많은 논란을 둘러 싸고 발효된 미국 “북한 인권법”, 바로 부시 행정부의 본격적인 북한 인권 강경책의 출발로 새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발효가 당시 진행되고 있던 6자회담의 지연을을 불러 왔다고 비판받기도 하였고, 또 대북적대정책의 압박 수단일 뿐이라는 강한 논란도 지속되었다.
남한 북한 관련 인권 단체들과 탈북 단체들은 인권법 발효를 반기고 북한인권법안을 통해 북한의 민주화가 앞당겨지기를 기대하였다. 북한 인권을 위한 한인교회 연합(KCC)을 중심으로 한 미주 지역 목회자들은 환영의 기색을 보였다.미국 북한 관련 인권 단체들은 더 나아가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환영 하는 동시에, 중국에게 압력으로 사용되길 바라며, 또한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경계의 메세지도 잊지 않았다.
반면, 남한 정부 일각에서는 북한의 정치적 상황에 의한 인권문제도 중요하지만, 대다수 주민들의 경제적 인권문제가 더 우선돼야 한다고 말하며 남한 정부의 북한포용정책과 상치됨에 대한 우려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또한, 전문가들의 일각에서는 북한인권법안이 미국의 상원과 하원을 모두 통과되었다고 해서, 미국 국토안보부가 가까운 시일 내에 북한주민들의 망명이나 재정착요구를 과연 소화해낼 수 있을 지 장담할수 없다고 하며, 중국의 국경 강화라던지의 오히려 부작용이나, 남한에 법적으로 정착한 탈북자는 받아 들일 수 없는 등의 한계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북한인권법 2가지 주요 내용
북한 인권법의 내용을 보면 크게 주목해 볼만한 2가지 점이 있다. 첫째, 북한인권법은 탈북자를 미국에 난민지위로 받아들이는절차를 촉진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이의 추진을 위해 특별히 북한인권 특사를 임명토록 하였으며, 2005년 8월에 특사로 제이 레프코위츠(Jay Lefkowitz)가 임명되었다. 미 대통령은 북한 인권 증진을 위해 2005년부터 4년간 연간 2,400만 달러의 예산을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그 중 탈북자 지원을 위해 매년 2000만 달러를 사용해 북한 난민, 망명자, 이주민 등을 지원한다고 명시 되어 있다. 또한, 북한 난민을 위해 활동하는 NGO단체에게는 매년 200만 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하도록 배정되었다.
탈북자 미 망명 허용 진행 상황
그렇다면, 북한인권법 주요 정책 중의 하나인 ‘망명정책' 제안 이후, 과연 실제적으로 미국에선 어떤 망명들이 이루어 지고, 실패 하였을까?
2006년 5월 5일, 북한 인권법 제정 후 최초 탈북자 6명

최초로 미국 망명이 이루어진 사례로, 2006년 5월 5일, 미국의 북한 인권법 제정이후 최초로 탈북자 6명이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를 거쳐 미국에 도착하였다. 이는 북한인권법 이후 무려 1년 6개월이나 흐른 후 이루어진것이라, 매우 큰 주목을 받았다. 북한 인권법 발효 이후 몇번의 망명 시도가 있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해 가명을 사용하였는데, 알아 보자면 아래와 같다.
나오미씨는 (당시 34살) 극심한 식량난으로 지난 1998년 탈북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1년 중국인과 결혼했으나 임신 8개월 때 중국공안에 체포됐으나 가까스로 풀려나기도 했다. 신찬미씨 (당시 32살)는 2001년에 탈북했다가 강제북송당하고 다시 재탈북하였다. 이 와중에서 중국 남성에게 성폭행당하고, 중국화폐 5천위안에 팔려 다른 남성과 강제로 결혼 한 바있다. 신찬미씨의 친동생 신요셉는 인민군 3군단에서 근무하다 질병으로 인해 제대했다. 1997년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친척집을 방문하고 돌아왔으나 남한노래 테이프를 소지한 혐의로 노동단련대에 수용됐다고 한다. 1998년에 탈북에 성공했지만, 2000년에 체포된 후 북송됐으나, 다시 탈북했으나, 또다시 체포돼 갖은 고초를 겪다가 2004에 재탈북했다.
또, 데보라씨 (당시 25살) 는 지난 2004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한족남자에게 속아 감금상태에서 지냈다. 한나씨 (당시 36살)는 소학교 교사 출신인데, 장사를 하자는 학부모의 꾐에 빠져 중국에 탈출했다. 이후 인신매매단에 걸려 갖은 수모를 당하였다.신요한씨는(당시 20살)는 수재들만 다니는 제 1고등중학교에 재학 중 1999년 기숙사를 빠져나와 국경선을 넘었다가 3일만에 중국공안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이렇게 첫 입국한 탈북자들은 6개월가량 미국 정착교육을 받은 뒤 민간단체의 지원 아래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국에는 한국과 달리 정치적 난민에게 현금을 지원하는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력과 그 이후 그들의 미국 정착 생활기는 RFA 기사들에서 자세히 다루어 졌다. (왼쪽 링크를 참조)
2006.5월, 중국 선양 미국 총영사관 통해 미 입국 3명
2006년 5월 중국 선양의 남한 총영사관을 이탈해 미국 총영사관으로 담을 넘어 들어간 탈북자 4명 가운데 3명이 미국에 입국하였다. 이들 탈북 남성 3명과 여성 1명은 중국 선양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들어가 한국행을 요구하다, 2006년 4월 19일, 한국 총영사관 공관직원을 포박한 뒤, 옆에 위치한 미국 총영사관으로 넘어가 미국 망명을 요구하였다. 미국 국무부와 국토안보부 당국자들이 선양 총영사관으로 가, 이들 탈북자 4명의 탈북 동기와 경위 등을 조사했으며, 3명만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정리하였다. 이 사건은 탈북자들이 중국 내 미국 공관을 통해 직접 미국으로 간 첫 사례로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중국 내 미국 공관 진입은 그 효과와 활용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지만, 현실적으로 실현되는데 중국 공안의 협조가 이루어 지지 않아 그 안타까움을 사던 중이라, 이 망명의 의미가 컸다.
2007.2.8, 태국 통해 3명 미국 입국

북한 탈북자들이 태국 정부로부터 미국행 출국허가를 받고 대기하던 탈북자 16명가운데 여성 3명이 정치적 난민지위를 얻어 2월 8일 미국에 입국했다. 16명 가운데 일부는 한국행을 희망했고, 미국행에 차질이 생긴 나머지에서도 추가 미국 입국자가 몇 명 더 나올지는 불분명한 상태로 마무리 되었다.
2007. 2.28, 미입국 탈북자 12명
동남아시아 국가에 머물던 탈북자 12명이 미국에 입국하였다. 당시 천기원 목사는 이들 12명의 탈북자들은 남자 2명과 여자 10명이며, 나이는 7세에서 55세 사이로 다양하다고 했고, 또한 이들 가운데 한 명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남한 대사관에서 1년 가량 생활했다고 전해졌다. 천목사는 이번에 12명의 탈북자들이 미국에 입국함으로써, 2004년 제정된 미국의 북한인권법에 따라, 미국에서 망명을 하려는 탈북자들의 수가 30명으로 늘어났다고 전했다. 그 중 5명은 미국 루이지빌에 정착한 것으로 밝혀졌고, RFA와의 인터뷰에서 취재하였다. (왼쪽 링크 참조)
수많은 망명 불허 사례들, 높은 미국의 벽 보여줘
그렇다면, 왜 아직 발효 2004년 10월 부터 3여년이 지난 지금 망명 허가 수가 30명에 그쳤을까? 신청이 그만큼 밖에 안된 것일까? 여기서는 미국 망명 거부 사례를 간단히 살펴 보자. (개별 망명 불허 사례들 왼쪽 링크 참조)
남한 시민으로 정착했던 탈북자들
미국의 북한인권법은 남한에 일단 정착한 탈북자의 경우 미국 망명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남한에 살다 미국에 밀입국해 들어와 망명을 신청하더라도 남한에 돌아갈 경우 당국의 박해를 받는다는 것을 입증해보이지 않는 한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2006년 11월 미국 서부 워싱턴 주의 주도인 시애틀의 한 이민법원은 망명을 신청했던 임천용 씨에 대해 한국에 정착해온 기간이 길고 한국여권을 가지고 있어 북한 사람으로 보기 어렵고, 또 고문 박해를 받았다는 주장을 입증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망명 신청을 기각했다.(개별 망명 불허 사례들 왼쪽 링크 참조)
보위부 출신 탈북자들
앞서 언급한 2006.5월 선양을 통해 미국에 망명한 탈북자의 경우, 원래 신청한 탈북자 4명의 탈북 동기와 경위 등을 조사하여, 미국이 3명만 수용했다. 미국 관리들은 나머지 한 명의 탈북자에 대해서는 북한 내에서 주민 동향을 감시하고 정치범 수용소 업무를 관장하는 ‘국가보위부’ 출신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급독재에 물들어 속아 충성해왔고, 또 그 사회에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충성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죄를 뉘우치고 자유민주주의사회에 기여하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 미국 법도 이를 고려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미국의 탈북자 수용, 왜 30명 밖에 안되었나?

남한의 경우 최근 탈북자 만 명 시대를 맞았지만, 미국에 들어온 탈북자들은 2007년 2월 들어온 12명 탈북자를 합해, 30명 정도에 불과한 것에 그쳤다. 실제로 정상적인 법적절차를 마치고 미국 입국을 한 탈북자들의 수는 많지 않다.
북한 탈북자 수용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세가지 정도로 축약 될 수 있다.
첫째, ‘날로 까다로워지고 있는 미국의 난민 수용 심사와 현황’이다. 국제난민보호 기관인 레퓨지 인터내셔널(Refugees International)의 조엘 차니(Joel Charny) 부대표도 자유아시아방송과의 통화에서 “미국 당국의 난민 심사 과정이 9.11 테러 사건 이후 안보 이유로 난민 심사가 까다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둘째, 중국정부의 비협조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탈북자들의 미국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당국의 탈북자에 대한 강경책과 경비로 탈북자들이 미국 외교 공관을 통한 망명 신청이 힘들다. 하지만, 미중간의 안보, 외교를 고려할때 미국이 중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가장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레프코위츠 특사도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등의 강력한 압박은 RFA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분명히 반대한 바있다. 대조적으로, 미국 의회 일각과 비정부 기구에서는 미국의 중국 강제 송환 등에 대한 압박을 강력히 촉구하는 소리를 점점 더 키워가고 있다. (강제 송환 반대 운동 왼쪽 링크/슬라이드쇼)
이러한 조건 하에서 미 행정부가 탈북자 난민수용 과정을 간소화하는 구체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된다. 또한, 북한인권법 추진을 사실상 이끌어야 하는 레프코위츠 북한 특사의 활동도 그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스캇 스나이더 아시아 파운데이션 선임 연구원도 “지난 1~2년 동안 북한 인권 담당 특사의 활동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가 그동안 북한 인권 문제를 중요시하던 정책을 거꾸로 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셋째, 미국에의 정착 등의 문제 등이 남한 정부 등과 비교를 했을때, 현저히 떨어 진다는 실질적인 생활고 문제도 미 북한 인권법 망명 수용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러한 걸림돌이 법 시행 후 3년간 전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채, 아직 미국 내 탈북자를 수용은 그 진척 상황이 매우 더디기만 하다. 켈리 라이언 (Kelly Ryan) 미 국무부 인구, 난민, 이주 담당 부차관보 (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population, refugees, and migration)는 워싱턴의 외신기자클럽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법 시행 1년 6개월이 지난 2006년 6월 19일, 법규상 당해 탈북자 수백명 수용이 가능하다고 발표 하였다. 하지만, 또 다른 일년이 지난 현재 2007년 9월, 아직 30여명의 탈북자만이 미국 땅에 허용되었을 뿐이니, 그 사이 어떠한 정책상 어떤 진전이 있었던 것인가?
북한 인권법 2400만 달러, 집행은 커녕 예산처도 밝혀 지지 않아, 출발 당시의 북한 인권법의 계획은 오리 무중
4년간 연간 2,400만 달러의 집행 가능 예산 중 탈북자 지원을 위해 매년 2000만 달러를 사용하여, 현재 애초의 수백명 망명 수용 계획의 십분의 일도 안되는 '30여명'만을 비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면 예산들은 다들 어디에 쓰인 것일까? 엄청난 예산이 아직 어디 쓰여져 있는지도 알려 진바 없고, 얼만큼 언제 집행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3년 동안 30명이라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면 북한 인권법의 진행 상황이 본래의 예산 집행 계획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 국무부는 법이 발효된 2004년 10월 이후, 미국의 민간단체인 프리덤 하우스의 북한인권세미나 예산으로 200만 달러를 제외하고는 다른 단 한 항목의 예산도 배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를 북한 인권법에 깊게 관여한 허드슨 연구소 호로위츠 선임연구원, 그리고 미국 공화당 의원으로 국무부의 예산을 관장하는 하원 세출소위원회의 위원장인 프랭크 울프 등이 수차례 비판한 바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 유일하게 공표 예산 배정되었다던 200만 달러 상당의 자금을 지원받는 미국내 최대 인권 단체 중 하나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 는 자금 문제로 북한 인권 관련 사업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놀랍게도, 폴라 쉬리퍼(Poula Schriefer) 프리덤 하우스 인권옹호국장은 지난달 31일 자유아시아방송에 북한 인권 문제를 맡아왔던 3명의 전담직원을 다 내보내는 등 지난 6월30일자로 북한 인권 관련 사업을 사실상 정리한 상태라고 밝혔다. 그동안 유일하게 북한 인권법 예산 뒷받침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앞장서 제기해 온 민간 인권 단체가 예산 부족으로 활동을 접은 것은 북한 인권법 예산 집행 의문을 더욱 크게 한다.
북한 인권법, 이제 어디로
2.13 합의 이후, 빠른 속도로 6자회담, 그리고 북미 양자 회담이 진전됨에 따라, 거꾸로 인권 문제에 관한 미국의 목소리는 한층 완화되고 있는 듯하다. 북한 인권법이라는 미국 대북 인권 정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예산문제과 미국 북한 탈북자 망명이 둘다 오리무중 상태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는 정책상의 우선순위 문제, 즉 핵이 해결 될때 까지 우선 핵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추후 북미 관계 정상화 시점에서는 아마 다시 인권 문제를 다루지 않겠냐 하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6자회담,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해 미 정부가 정신 없이 달려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리고 더욱이 북한의 핵 불능화와 핵 폐기 조치 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미국의 북한 인권법의 어디로 가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북한 인권법을 앞세워 미국이 고집했던 대북인권 강경정책이 존속 될지의 여부는, 바로 미국 북한 인권법이 정치적 도구색이 짙은 단기적인 쇼냐, 아니면 진정한 북한 인권을 위한 지속적인 미 대북인권정책이었냐를 판가름할 것이다.
웹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