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남한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이해연 : 북한에서 장애인은 개인적으로 다친 사람과 나랏일을 하다가 다친 사람이 있는데, 공적인 일로 다친 사람은 국가적인 혜택이 있긴 합니다. 그렇다고 그 혜택을 공평하게 베푸는 게 아니라 주로 평양에 사는 사람들이 혜택을 받아요. 북한에서 영예군인에게 집도 주고 휠체어도 새로 장만해 주었다는 보도도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면 방송에 나오는 한두 명의 영예군인이 혜택을 받는 거지 모든 영예군인들이 다 받는 건 아닙니다.
북한에서 귀한 휠체어, 어렵게 구해도 무용지물
박소연 : 선전을 통해 전체 영예군인(복무 중 부상으로 장애를 얻은 퇴역 군인)을 지원해주는 것처럼 보자기를 씌우는 거예요, 포장하는 거죠. 지방에 있는 일반 영예군인들은 국가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삽니다. 남한에 오니까 장애인들을 ‘사회적 약자’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약자는 힘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야 남한도 장애가 있다고 약자라고 하는구나’ 북한과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좀 다른 의미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요. 차별을 위해서가 아니라 배려를 위한 것이었구나...
사람이 장애가 있다고 해서 차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존중하고 배려해 줘야 한다는 게 남한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이고 정부, 사회 역시 주민들이 이렇게 인식하게끔 합니다.

이해연 : 이런 부분은 정말 좋습니다. 북한의 경우에는 나라에서 안 해주기 때문에 살기 위해 일반 사람들에게 화풀이하는 거잖아요. 예를 들면 영예군인들은 기차를 탈 때 표도 안 사고 안내원에게 자리하나 내달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해요. 안내원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양해를 구해서 자리를 내줍니다. 그러니 사람들도 좋게 보지 않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 입장에선 어찌 보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혜택이니 난폭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스스로 찾아서 누리려고 하는 거죠.
박소연 : 북한에도 휠체어나 보청기가 있기는 하죠. 그런데 다 개인 부담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오른쪽 귀가 안 들리셔서 중국 보청기를 비싸게 샀어요. 보청기는 해외로 파견된 노동자들이 외국에서 사서 들여오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래서 북한에는 러시아 보청기와 중국 보청기가 제일 많아요. 보청기를 낄 만하면 사실 잘사는 집인 거죠. 휠체어도 영예군인공장에 가면 있는데, 바퀴가 잘 안 돌아가고 높이도 안 맞는답니다.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재간 있는 개인에게 따로 주문 제작합니다. 목발도 예전에는 평안남도의 영예군인 공장에서 만들었는데, 길이가 맞지 않아서 겨드랑이가 너무 아프대요. 그래서 돈을 더 많이 내고 맞춤형으로 제작 의뢰해서 본인 돈으로 사는 거죠.
이해연 : 보청기나 휠체어가 워낙 비싸요. 그러니 지갑에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이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박소연 : 보세요. 남한은 도로가 농촌인데도 집 앞까지 다 아스팔트예요. 휠체어도 쉽게 끌고 다닐 수 있는데, 북한은 시내에서 살아도 동네로 들어오면 다 비포장도로잖아요. 동네에서 휠체어를 탄 분이 집 앞에서 큰길까지 나가는 데 울퉁불퉁한 오르막을 못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면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밀어줍니다. 이렇게 한 번씩 큰길까지 나가려면 정말 많은 품이 들어야 하니까 휠체어를 집에다 세워놓고 잘 안 나가요.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니까 알아서 안 나가는 거예요. 이런 환경 때문에 장애인들이 이중 삼중으로 고생한다는 말이 맞아요.
“내 꼭 소래를 머리에 이고 장마당에 나가...”
이해연 : 저도 북한에서 휠체어 타시는 분들을 봤는데 힘들어 보이더라고요. 남한은 도로도 좋지만, 손가락으로 조작하면 자동으로 움직이는 전기식 휠체어가 많거든요. 그러지 않아도 몸이 힘든데 울퉁불퉁한 길을 팔로 바퀴를 굴려야 하니 더 사용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박소연 : 그런데 요즘 조선중앙티비 보도를 보면, 평양은 도로가 잘 돼 있어서 그런가 항상 보통강변의 버드나무 밑에 휠체어를 탄 영예군인들을 자주 보이는데 지방은 다르죠. 자동차 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돼서 밖을 못 나가는 인민학교 동창생이 있었어요. 장애가 있지만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팔았어요. 그 친구는 집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넋 놓고 바라보며 반찬을 바구니에 담아 장마당에 나가 팔면 돈을 많이 벌겠는데, 그냥 집에 앉아서 파니까 많이 못 번다고 자주 푸념 했던 기억이 아닙니다.
이해연 : 장애가 있으신 분들은 밖에 나가질 못하니까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담당하고, 밖에 나가서 파는 건 가족 중에 누군가 한 분이 하는 식으로 해서 그나마 집안일을 돕는 경우가 많죠.
박소연 : 해연 씨, 탈북할 때 우리가 중국을 꼭 경유하잖아요? 중국에 살 때 일인데 중국 할머니들이 오토바이 비슷한 걸 타고 다니는데 처음에 장애인 줄 알았어요. ‘중국에는 잘 사는 나라인데 왜 이렇게 장애인 많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글쎄... 내리는데 두 발로 서는 거예요. 중국은 두 다리가 있어도 저렇게 전기 오토바이를 마음 놓고 타는데 북한은 두 다리가 없는 사람들도 저런 게 없어서 못 타는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그리고 휠체어 얘기를 하다 보니 3~4년 전에 시청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가 생각납니다. 바로 제 옆에서 일하던 분이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20대 장애인 공무원이었어요. 그 직원이 일하는 자리는 휠체어가 의자가 돼요... 솔직히 처음엔 장애인이 시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남한의 공공기관에서는 장애인을 전체 고용인원의 3.8%를 뽑아야 한다는 장애인 채용 의무 규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청에는 장애인들이 일하는 카페가 있었어요. 그곳에서 장애인 2명과 매니저 이렇게 셋이 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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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연 : 시청 같은 경우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니까요, 그분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나 편견 같은 건 없었어요?
박소연 :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디나 좋은 사람과 안 좋은 사람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시청에서 제일 복잡한 부서인 종합민원실에는 ‘존중해주세요. 공무원에 대한 폭언 폭행은 범죄행위입니다’라는 글이 붙어있습니다. 공공기관을 찾는 사람들은 서류를 빨리 떼야 하니까 마음이 조급한 거예요. 그런데 장애인 공무원에게 서류를 의뢰하면 휠체어를 돌려서 뒤쪽에 있는 프린트에서 출력물을 갖다줘야 하니까 좀 느리거든요. 그럴 때마다 업무처리가 늦다고 짜증 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일을 하다 보면 책상 위에 있는 서류가 바닥에 떨어질 때가 있는데, 휠체어가 높아 바닥에 손이 안 닿아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될까 도와 달라는 얘기를 안 하거든요. 일하면서 살짝 보면 떨어진 서류를 줍느라 가쁜 숨소리가 들려요. 그 사람이 뭘 떨구면 재빨리 주워 주려고 제 시선이 그분한테 항상 가 있는 거예요. 장애인을 위한 제도가 좋아도 본인만이 겪는 고충이 따로 있더라고요. 또 점심시간 같은 경우에는 다들 구내식당을 가야 하는데 빙빙 돌아서 다른 건물에 있다 보니 시간이 걸려요. 그게 불편하니까 이분은 도시락을 싸 와서 혼자서 휴게실에 가서 먹는데 그 뒷모습이 정말 짠하더라고요. 한번은 제가 물어봤어요. 왜 식당에 안 가느냐, 내가 휠체어를 밀어줄 수 있다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게 싫다고 하시더라고요. 주변에 장애우가 있으면 배려해야겠다, 그리고 내가 성한 두 다리가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하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차별이 일상이면 생기는 일들
이해연 : 저도 이번에 청각 장애인에 관한 주제를 찾아보면서 장애인에 대한 국가적 배려도 잘돼 있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줄이고 존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게 제일 중요한 부분 같습니다.
박소연 : 북한에서 차별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돈 많은 사람은 잘살고 돈 없는 사람은 못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서, 차별은 할 수 없는 거로 생각하고 살았어요. 남한에 와서 탈북민들도 정착 초기에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한다고 느꼈잖아요. 면접 때 얼굴 보고는 당장 직원으로 뽑을 것처럼 하더니, 말투를 듣고는 인원이 꽉 차서 못 뽑는다며 히뜩히뜩 말을 뒤집는 거예요. 그렇게 당한 차별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도 정의롭지 못하다는 걸 남한에 살면서 느낀 것이지 처음부터 느낀 건 아니었어요. 북한에서 우리가 받은 차별들이 부당했다는 걸 남한에 와서 느끼게 된 거예요.
이해연 : 북한 같은 경우에는 사람이 태어난 그 자체, 물려받은 토대 그대로 결정하는 그 제도가 제일 나쁜 것 같습니다.
박소연 : 정말 그래요. 예를 들면 할아버지가 1950년대 월남했어요. 손자가 태어났는데 이미 월남자 가족이 돼 있는 거예요. 토대가 나빠 좋은 학교도 못 가고 공부를 잘해도 아무것도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북한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운명이 결정돼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불공평한 사회인 거죠.
이해연 : 가족 중에 어느 한 명이 행방불명됐어도 남아있는 가족들만이라도 잘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한 명이 없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나머지 가족들이 뭔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꼭 그렇게 해야만 사회주의를 지키는 건가, 회의가 들고... 오히려 그 반대인 것 아닐까요?
박소연 : 차별은 계급적 토대를 중시하는 북한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불공평한 제도라고 봐요. 살다 보면 다양한 이유로 차별당하는 일도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어느 순간에 장애인인 될 수도 있잖아요. 갑자기 차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병으로도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한 대우와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한에는 이런 내용이 이미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클로징] 남한의 장애인인권헌장에는 ‘장애인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와 사회는 장애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을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남한은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환경이 잘 마련되어 있지만, 지난해 출근 시간, 서울 지하철에서 벌어진 장애인 단체의 시위가 있었고 큰 사회적 논란이 됐는데요. 이 얘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갈게요.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전하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