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이승재입니다.
한국에서 5월 8일은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모여 식사도 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꽃 카네이션과 함께 선물을 드리는 어버이날입니다. 북한의 어머니 날과 비슷하죠. 대부분 고향의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탈북민들은 이 날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현장음) 오늘은 어버이날인데 좀 먹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여느 때 좀 줄이면 되지 뭐.
(현장음) 오늘은 어버이날이라 케이크를 한 점씩 맛보고 즐기다 가시는 게 어때요? 오늘 선물도 있는데 여기 유정란은 강화도 모 회원님이 선물하신 거고요. 박수!
옆 사람의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이곳, 여긴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몇 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식당입니다. 1, 2층을 꽉 채운 손님들 가운데 한 자리에 15명 남짓, 탈북민들이 모여 있네요.
김대광: 남북하나재단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이 화합하고 소통하게 하기 위해, 지역마다 만들어준 모임이거든요. 고향 떠나신 분들이 이런 모임을 통해서 외로움도 덜 느끼고 생활의 활력도도 높이려는 취지에서 만든 모임입니다.
모임의 이름은 ‘학마을 자조회’. 서울 양천구 학마을에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모였네요. 자녀와 부모님은 곁에 없지만 같은 북한 출신끼리 모여, 따뜻한 국밥을 먹으면서 어버이날을 서로 축하하자는 뜻에서지요.
김영옥: 북한에 있을 땐 어버이날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한국 오니 ‘어버이날’ 하면 자식들이 선물도 주고 카네이션도 주고 용돈도 주고 하니까 이모저모 좋은 날 같아요.
특히 한국에서 ‘어버이’는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게 쓰는 말이라는 것을 처음 듣고 놀랐던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북한에선 함부로 쓸 수 없는 말
김덕자: 북한에선 수령에게만 어버이라는 말을 붙이거든요. 한국에 와 보니 우리가 다 어버이가 됐잖아요. 거기에 너무 감동받았고 오늘 같은 날, 나이 있는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이렇게 세대차이 없이 음식을 먹으니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이대웅: 거기(북한)는 어버이라는 호칭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한테만 씁니다. 어버이날이라는 건 여기 와서 알았어요. 그런 표현은 함부로 못 쓰거든요.
이렇게 모임에 참석한 탈북민들은 적어도 5~60대, 곧 70에 가까운 장년 세대들이었는데요. 이들이 처음 한국에 와서 또 하나 정말 놀란 것은 북한과는 다른, 노인들에 대한 인식이었답니다.
김영옥: 북한에선 나이 들면 천대를 받는데 여긴 나이 들수록 대우 받는 느낌? 보상 받는 느낌? 그리고 어버이날이 되면 내가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 천대를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였을까요?
김영옥: 아, 대한민국엔 장애인도 우대를 하고 어르신 우대도 있고 공경의 마음도 있는데 거긴 아직 그게 부족하고요.
김덕자: 북한에선 부모라고 해도 연세가 많아지면 빨리 세대 교체를 해야 된다는 식으로 부담을 주고요. 만약 노인들이 어디 볼 일이 있어서 다니다가 넘어지면 젊은이들은 일으켜줄 생각도 안 하고 ‘늙으면 집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집이나 지키고 있지 왜 저렇게 넘어지면서 볼품없이 노냐’하고 웃거든요. 그런데 이 나라는 아니잖아요.
노년의 인생을 한국에서 맞게 되어 다행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사람들, 가족이 곁에 없어도 이젠 옆에 있는 탈북민들이 그들의 형제이고 또 부모입니다. 탈북민들은 서로의 식사를 챙겨주면서 덤으로 얻은 노년의 인생을 격려해 줍니다.
(현장음) 소주 한 잔 사줄까? 한 잔 할래?
(현장음) 청양고추 좀 주세요. 깍두기 국물 넣어서 먹으면 맛있어. 우리가 저쪽에서 이렇게 먹는 걸 알았나? 다 여기서 배웠지.
(현장음) 대표님 빨리 식사하세요. 왔다갔다 사람들 챙기지 마시고.
(현장음) 여긴 어버이가 아랫사람들도 챙겨. 어버이들이 어버이날 되면 돈도 잘 쓰고. 북한의 어버이는 자기만 챙겨 달라 그러는데 여기 한국은 안 그래. 아 땀나! 너무 잘 먹었다. 오늘 도가니탕은 그대로 피와 살이 되겠네.
많은 탈북민들이 명절이나 생일, 이 날 같은 어버이날에 유독 가족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하는데요. 이분들 중 일부는 가족과 함께 한국에 정착해서 행복한 어버이날을 보내는 분들도 계시네요.
김덕자: 뭐 사위들도 일이 많고 딸들도 일이 많아서, 저번에 어린이날 있잖아요. 그날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겸해서 밥도 먹었고 그러니 애들이 조금씩 용돈도 주고 그러더라고요.
김영옥: 자식들이 용돈도 주고 어제 식사도 같이 하고, 여기 어버이날은 자식들이 막 효도하는 것 같고 화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같아요.
관련기사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
사실 탈북민들은 쉽게 한자리에 모이기가 힘듭니다. 가뜩이나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저마다 자리 잡고 적응해 살아가는데 힘쓰다 보니 서로를 돌아보기도 너무 어렵다고 하네요. 오늘도 30여 명의 학마을 자조회 회원들이 다 모일 수 없어서, 일부는 다음 기회에 모이고, 또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께는 소수의 회원들이 아침 일찍 직접 찾아뵙고 꽃과 선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사실 이 학마을엔 100가구가 넘는 탈북민들이 살지만 서로서로를 알아보지도 못 한다네요. 그래도 탈북민 김도정 씨는 모두에게 고향을 등진, 같은 아픔이 있는 걸 알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합니다. 새로운 탈북민이 보이면 수시로 찾아가서 도움줄 것을 찾는다고요.
김도정: 나도 탈북민이지만 탈북민들을 위해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게 참 좋고요. 우린 죽지 말고 다 살아서 고향으로 같이 가야 하거든요. 물론 연세 드셔서, 작년에 예쁘게 옷 입고 걸어오셨던 어르신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 들었을 때 맘이 제일 아팠지만, 또 우리가 병문안 가면 안 잊어버리고 알아봐주시고 반겨주시고 이럴 때 ‘나도 누군가를 살릴 수 있구나’ 이런 걸 깨닫게 됩니다.
이상연: 제가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태어난 인생을 살면서, ‘여기선 우리를 왜 이렇게 잘 대해 주지?’ 이런 생각이 들어 대한민국 헌법을 봤는데요. 헌법엔 북한 주민들도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게 너무 감동이었어요. 이렇게 제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고 이 어버이날을 뜻 깊게 보낼 수 있다는데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학마을 자조회, 북한의 인민반처럼 한 동네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에 함께하는 작은 모임인데요. 방송을 마치며 모임의 대표 마순희 씨가 청취자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네요.

마순희: 안녕하세요. 학마을 자조모임 대표 마순희 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라 이렇게 큰 식당에서 함께 식사도 하고 케이크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어버이날을 처음 들었을 땐 다소 생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탈북민들도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님을 위해 평상시보다 더 마음을 쓰고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금 되새기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고마운 일이죠. 저도 아침에 딸들이 찾아와 꽃도 달아주고 또 못 오는 딸은 꽃바구니와 선물과 용돈을 보내와서 오히려 딸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내가 부모 노릇을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북한의 어르신들께도 이 자리를 빌어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함께 명절은 즐기지 못하지만 아프지 마시고 꼭 건강을 챙기시면서 잘 지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네.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들도 모처럼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해보며 감사 인사를 드리는 오늘 하루를 보내시면 어떨까요? 지금까지 <여기는 서울>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