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로 보는 북한] 김정은은 왜 민심을 ‘유리 쟁반 위에 전등알’처럼 다루라 주문했나?

진행자 :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 바로 청취자 여러분이 살고 계신 북한입니다. 내부 문서를 통해 오늘의 북한을 만나보는 [문서로 보는 북한] 진행에 안창규입니다. 오늘도 김지은 기자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지은 기자 : 안녕하세요.

진행자 : 오늘 다뤄볼 문서는 꽤 두껍습니다.

김지은 기자 : 네, 무려 31페이나 됩니다. 맨 위에 김정은 세 글자가 써있고 작은 제목은 “일군들은 창당의 리념과 정신을 체질화한 공산주의혁명가가 되여야 한다”로 2024년 10월 10일 발표한 당 창건 79주년 기념 담화로 <노동신문> 1면 기사에 실었던 것을 책으로도 출판한 것입니다.

31페이지, 김정은 명의의 개인 담화는 무엇을 담았나

진행자 : 저도 오랜만에 보지만 그 형식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이런 담화문은 노작으로 분류돼 책으로 출판해 기록으로 남기고 간부, 당원, 일반 주민들에게 학습도 시킵니다. 이번에 찾아보니 지어는 유튜브에서 영상으로 만들어 올려 놓았더군요. 형식은 조금씩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이런 글이 목적으로 하는 건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입니다.

김지은 기자 : 특히 이번 담화는 기관명이나 직책명 없이 ‘김정은’을 내건 개인 담화 형식으로 노동신문에 실렸는데, 김정은 개인 명의 담화는 집권 초기 몇 차례를 제외하곤 매우 드뭅니다.

당 창건 79주년 기념 담화
당 창건 79주년 기념 담화 2024년 10월 10일 발표한 당 창건 79주년 기념 담화 “일군들은 창당의 리념과 정신을 체질화한 공산주의혁명가가 되여야 한다” 영상 캡처 (RFA/조선중앙텔리비죤)

진행자 :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문서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김지은 기자 : 네, 담화문의 제목처럼 전체 담화 내용은, 무엇이 창당 리념과 정신인지 정의하고 그런 창당 리념과 정신을 체질화한 공산주의 혁명가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이 담화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원을 위한 ‘사상교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가는 “수령에 충실한” 혁명가이며 여기서의 수령은 김일성, 김정일이 아닌 ‘김정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담화문 첫 부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계승’입니다.

당의 핵심구호인 “창당의 리념과 정신을 계승하여 새시대 당건설의 위대한 전성기를 열어나가자!” 를 제기하였고 지금의 김정은 정권은 “1세대 혁명가들의 리상과 신념, 정신과 기풍을 숭고한 높이에서 이어나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김정은은 “수령의 혁명사상이 유일한 지도적 지침”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제국주의연합세력의 무력침공을 격퇴하고 공산주의사회를 실현하는 원동력이라고 제시했습니다.

특히 일군들이 창당이념과 정신을 완벽하게 체현한 공산주의혁명가가 될 때 김정은 혁명사상의 핵심요소인 ‘새시대 5대 당건설노선’이 관철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놓고 맡길만한 ‘준비된 일군’이 적다고 일갈합니다. 그러면서 ‘간부육성사업’을 결정적으로 개선해야 하며 그런 이유로 조선노동당 중앙간부학교 사업을 최대중시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부 일군들은 당 정책을 관철한다고 하면서 도리여 비속화하고 지어 정책적선에서 탈선하여 왜곡집행하는 것과 같은 심중한 결함들을 발로시키고 있다”고 간부들을 질책했고 “일꾼(간부)들의 도덕품성 문제는 당의 권위와 직결되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라며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축재 행위는 우리 당의 창당 이념, 창당 정신에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주되는 투쟁대상”이라며 경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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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언론에서는 담화 중에서 바로 이 부분, 김정은 위원장이 간부들을 강하게 비판한 내용을 주목해 보도했는데요. 지방발전 정책 추진, 수해복구 등에서 나타난 당 간부와 일꾼들의 기강해이, 복지 부동에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또 이번 담화가 수해 등 민심 이반이 심각한 상황에서 나온 점에 주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담화문은 당 일군들의 당성, 혁명성, 인민성을 주문하며 당의 고유 본태가 있고 절대의 집권력이 있는 ‘인민대중제일주의’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새시대 당건설로선에 대한 당중앙의 의도를 심장 깊이 새기고 5대당건설로선에 대한 학습에 나설 것을 강조, 독려하며 글을 마치고 있습니다.

노동당 창당 리념과 정신
노동당 창당 리념과 정신 당 창건 79주년 기념 담화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노동당 창당 리념과 정신’을 거듭 강조한다. (RFA/조선중앙텔리비죤)

진행자 : 문서에 자주 언급되는 ‘노동당의 창당 이념과 정신’이라는 말은 과거에 없었던 표현으로 기억합니다.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김지은 기자 : 2024년 5월 21일 진행된 노동당 중앙간부학교 새 청사 준공식에서 한 김정은의 기념 연설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입니다. 당시 연설 제목은 ‘창당 리념과 정신에 충실한 새시대 당간부들을 키워내라’였습니다. 이번 담화에서는 창당 이념을 ‘근로하는 인민과 이 나라를 끝까지 책임지고 공산주의에로 갈 수 있는 혁명의 강위력한 전위대를 꾸리자’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먹는 문제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북한 당국이 ‘공산주의’를 운운하니 누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쌀은 곧 공산주의라고 했던 북한 당국은 1990년대 미공급이 시작되고 수백만 명의 대량 아사 사태가 발생하자 다시 쌀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라고 한 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뭡니까. 사회의 모든 주민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며 잘 먹고 잘사는 사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현재 북한은 어떻습니까. 김정은과 몇몇 측근들만 쌀을 먹는 세상입니다. 이러고도 당 일꾼들에게 창당 이념 정신을 주장하니 이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지난 15일 완공된 북한 노동당 중앙간부학교 건물 외벽 양쪽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대형 초상화가 설치돼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지난 15일 완공된 북한 노동당 중앙간부학교 건물 외벽 양쪽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대형 초상화가 설치돼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연합)

“저 사람들이 마음이 우러나서 만세를 부르는게 아닙니다”

진행자 : 담화를 읽으면서 다시 드는 생각이지만 ‘말’만 화려합니다. 자화자찬에 주장만 존재할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지은 기자 : 그렇습니다. 담화에서 주장하는 ‘사회주의와 계승론’은 사실과 완전히 대립되는 이론입니다.

사회주의는 봉건왕조주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이 사회의 공동체를 이루고 골고루 평등하게 사는 것을 이념의 최고 기치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북한은 김씨 왕조가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습 승계 체계가 ‘사회주의’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권리를 누가 주었습니까. 인민대중은 세습통치를 반대합니다. 김씨의 혈통만이 통치하는 세습제도는 그 자체가 반사회주의적인 이론입니다.

또 담화에는 “우리당의 혁명적 본성과 존재방식을 규정짓는 창당의 리념과 정신을 순결하게 계승하고 당건설과 당활동에 철저히 구현해 나가는 바로 여기에 존엄높고 강위력한 조선로동당의 백년, 천년 미래와 무궁한 발전이 기약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지만 북한 사람 누가, 이렇게 굶주리고 자유가 없는 체제에서 백년, 천년, 자신의 자식들이 대를 이어 살기를 원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창당의 리념과 정신을 순결하게 계승’하려면 김정은 자신부터 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조선노동당의 총비서라면 자신부터 공명정대하게 당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 당원들과 당일꾼들이 김정은을 향해 박수를 치는 것은 당을 받들고 수령을 받드는 자세라기 보다 강제적인 조치로 인해 표현되는 행동입니다. 일부 주민들은 국가행사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 역시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과거 김정일과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이 함께 이동하며 행사 대열에 선 사람들이 목청껏 만세를 외치자 그 장면을 본 김정일이 정주영 회장에게 ‘저 사람들이 마음이 우러나서 만세를 부르는게 아닙니다. 나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김정은도 행사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진짜 마음, 민심의 이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런 담화를 통해 현실에 눈을 가려보려 하겠지만 문제는 생계 문제가 가장 큰 주민들 누가 이 담화를 읽고 학습하겠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의미없는 글일 겁니다.

김정은 시대 ‘지도자와 당에 충성’이 강조되는 이유

진행자 : 가장 열심히 읽는 사람들은 저희 같은 기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김 기자도 언급했지만 담화에 나오는 ‘창당 이념과 정신을 잊지 말라’는 말은 과거 수령에게 충성했던 혁명 1세, 2세들처럼 김정은, 본인에게 충성하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지도자와 당에 충성하라’는 말은 수십년 전부터 반복된 구호이지만 김정은이 등장한 이후, 특히 최근에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현재 북한에 김정은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충성하는, 다시 말해 김정은의 지시를 철저히 관철하는 간부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또 과거에 비해 북한 사회가 지도자의 뜻을 받들고 충성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다…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김 기자는 어떻게 보십니까?

김지은 기자 : 그렇습니다. 북한의 간부들도 김정은의 사상과 이론이라고 하는 당의 사상을 잘 따르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특히 김정은 시대는 간부의 수난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가 과제 수행 결과에 따라 간부들을 처벌하고 부정부패 행위를 단죄한다는 명목 아래 간부를 처벌합니다. 간부 처벌에 대한 보도도 부쩍 늘었습니다. 인민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희생양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정권 즉 김정은을 향해 있는 인민의 불만과 분노의 끝이 간부를 겨누도록 만드는 겁니다. 그러나 간부들 대부분이 국가에서 나오는 배급, 월급이 아닌 뇌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간부들이 과연 ‘창당 이념과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혁명의 전사가 될 수 있을지,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진행자 : 그렇지만 담화는 간부들에게 “인민에 대한 옳은 관점과 태도를 가질 것”도 강조합니다. 민심을 다루는 사업을 “유리 쟁반 위에 전등알을 담고 달리듯이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목이 바로 지금 북한 민심의 척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조건 내리 먹이는 식의 사회에서 ‘민심의 관리’를 요구하는 사회로 변화, 여기서 다시 민심이 권력의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되야 비로서 위대한 시대가 탄생하지 않을까요. [문서로 보는 북한] 오늘 준비된 소식은 여기까집니다. 김지은 기자, 수고했습니다.

김지은 기자 : 고맙습니다.

진행자 :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안창규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