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이들 탈북자는 캐나다에서 어떤 절차를 거쳐 얼마 만에 난민인정을 받게 됐는지 본인들로 부터 솔직한 심정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탈북 후 중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캐나다에서 식당일을 하면서 새롭게 인생을 펼쳐가는 이야기 전해 드립니다.
이진서 기자가 캐나다 토론토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올해 1월 캐나다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장서희 씨는 북한에 있을 때 남편이 중국을 드나들며 장사를 한 것이 탄로나 결국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고 전 재산을 몰수당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장 씨는 더는 북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2006년 4월 두만강을 넘습니다.
장 씨는 탈북을 6개월 정도 준비했으며 가족 중 한 명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면 남은 가족의 인생도 끝난다며 당시의 심정을 '마지막에 사람이 정신상태가 고도로 오르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라며 탈북의 절박했던 심정을 털어놨습니다.
장 씨는 탈북해서 남편이 도움을 받았던 선교사의 사역장을 찾았습니다. 남편이 보위부에 끌려가기전 남편이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을 몰래 숨겨 뒀었고 그 안에는 중국 내 연락처가 있었던 겁니다.
캐나다의 한적한 공원에서 장 씨에게 캐나다로 오기 전 중국에선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부터 들어봤습니다.
기자: 중국의 사역장에는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장 씨: 약 30명 있었습니다. 애들부터 노인까지 있었는데 밖에는 못 나가고 단체 생활합니다. 아침 5시30분이면 일어나고 기도하고 밥 먹고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자유 시간은 7시 이후에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북한 사역장은 탈북한 이들이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성경을 배우면서 안전한 제3국으로 갈 때까지 대기하는 장소입니다. 장 씨도 이 북한 사역장을 거쳤습니다. 그곳의 하루 일과는 단순합니다. 기도와 성경공부가 전부입니다. 장 씨도 어쩔 수 없이 갈 곳이 없는 처지라 북한 사역장을 찾긴 했지만 30년 이상 북한에서 살던 사람에게 기독교는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특히 돌아가며 기도하는 것은 장 씨를 난처하게 만들기 일쑤였습니다.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데 내 순서가 되면 심장이 떨려서 말이 안 나왔습니다. 눈을 떠보면 다른 사람은 눈을 다 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는 말이 연결돼야 하는데 그 다음에는 말이 나오지않더라고요.
잠시 중국에 있는 북한 사역장이라고 불리는 곳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곳의 생활은 철저히 비밀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중국은 잠시 거쳐 가는 곳으로 중국 땅에는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인 사람들끼리도 믿지를 못해 개인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집니다. 어느 날 누군가 보이지 않으면 그저 다른 교회로 갔다고 말할 뿐 더는 설명도 없고 묻지도 않습니다. 장 씨에게 종교란 물에 빠진 사람이 살기 위해 부여잡은 마지막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밴쿠버에 내려서 다시 토론토로 왔습니다. 그땐 너무 긴장해서 말이 안 나왔습니다. 너무 두려워서 비행기에 탔을 때는 기도가 막 나왔습니다. 내 마음속으로 기도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것이 30분 동안 막힘없이 줄줄 나오더라고요.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말로 막 터져 나왔습니다.
장 씨가 아무 연고지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캐나다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왔을까? 기자가 아는 탈북자 대부분은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이어서 영어권인 캐나다행을 결심한 장 씨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면서 장 씨가 특별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생활력이 강한 북한 여성중 한 사람,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시련을 겪어 더 강해진 사람임을 알게 됐습니다.
남편이 올려 뛰고 내리뛰고 해도 난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것만 바라보진 않았습니다. 남편은 중국을 드나들고, 농사짓고 짐승 기르고 하는 것은 다 내가 했습니다. 여기 와서도 정신을 차리고 옷 수선하는 일을 하려고 재봉틀도 사고 했는데 돈이 안 되더라고요. 식당일을 하면 돈이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3월에 와서 2007년 6월부터 식당일을 시작했습니다.
장 씨는 캐나다 정부에서 한 달에 1천 캐나다 달러를 지원받습니다. 생활이 어려운 이들에게 지원하는 정부의 생계보조비입니다. 그 금액은 미화로 환산하면 1천 달러가 조금 못 됩니다. 그리고 장 씨가 식당일을 하면서 버는 돈이 있습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두 아들에게 들어가는 학비가 아직 없어 절약하면 저축도 가능합니다. 그는 힘들게 버는 돈이 너무 귀중하게 생각돼 쓸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축하는 돈은 한 달에 2천 달러 정도.
1년이면 2만 달러가 넘는 금액입니다. 이렇게 억척스럽게 장 씨가 저축하는 이유는 미래를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제 계획이 8개월 정도 더 일해서 옷 수선 하는 가게를 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옷수선이 문제가 아니고 영어가 문제입니다. 말이 안 통하니까.
외국에서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특히 북한 출신으로 난민인정을 받아 사는 장 씨에게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엇보다 필요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 아들을 잘 키워야 하는 부모로서의 의무감도 장 씨가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도록 했지만, 그보다는 일하면 그 대가를 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장 씨가 신바람 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식당일을 하기 전까지는 너무 몰랐습니다. 식당에 들어가서도 2달 동안은 동료와 말을 안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문은 조금씩 열렸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저를 위로해줬습니다. 처음엔 자신감도 없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주급을 받을 때마다 기분도 좋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이제 캐나다에서 난민인정도 받았고 영주권 신청도 한 상태로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장 씨.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아니 지워버리고 싶었던 고통스러운 북한에서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장 씨는 남편 생각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제가 남편을 자주 욕합니다. 그러면 아들이 제게 왜 아버지를 욕하느냐고 합니다. 내가 아버지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됐지만 아버지까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냐 하고 말합니다. 부부 정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더 생각이 납니다. 내가 70년생이니까 마흔으로 남편 사랑도 많이 받고 살 때인데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좀 살 만하고 여유가 있으니까 남편 생각이 더 나고 밤에 잠을 못 이룰 때도 있고 솔직히 여기 와서 술을 반 병 먹어봤는데 그 후유증이 일주일 갔습니다. 먹은 것을 다 토하고…
장 씨는 난민인정을 받고 나서 바로 영주권 신청을 했습니다. 영주권을 받으면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캐나다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국적이 캐나다가 되는 겁니다. 큰아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취미로 하는 유도에 소질을 보이면서 나가는 대회마다 메달을 따오고 막내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자신도 올해 안에 옷 수선 가게를 열어 자영업을 할 계획도 세워놨습니다. 그러면 식당 종업원으로 매주 주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만큼 모두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사장이 됩니다. 그러면 남들이 타고 다니는 차도 한 대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대중교통인 지하철이나 버스가 잘돼 있지만 아이들과 주말여행이라도 떠나려면 아무래도 자가용이 있어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생각뿐이지만 장 씨는 이룰 수 있는 꿈이라고 믿기에 행복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북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제가 캐나다까지 성공적으로 왔습니다. 지금은 행복합니다. 자식에게는 부모가 힘들게 살았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할겁니다. 그리고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들이 해주길 바라면서 내 자식들이 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저는 엄마로서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탈북자들, 두 아들과 탈북해 캐나다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장서희 씨의 얘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북한 강원도 출신으로 캐나다에서 난민인정을 받고 현재 토론토에 사는 김영민(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