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캐나다에 사는 탈북자들 – 김영민 ②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09.09.16
2009.09.16
오늘은 김 씨가 한국이 아닌 캐나다를 새로운 정착지로 선택한 이유와 함께 캐나다에서 하고 있는 생활을 자세히 들어봅니다.
이진서 기자가 캐나다 토론토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캐나다 동부 토론토에 보금자릴 꾸린 김영민 씨 가족은 매주 일요일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아직 영어가 서툴러 현지 적응에 어려움이 있는 김 씨는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이곳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답답함을 해소합니다.
김영민: 이젠 하나님 자체가 생활 일부가 된듯합니다. 제가 여기 온 것도 교회 도움이었고 직접 체험한 것도 있으니까요.
(배경음악) 찬송가
기자는 김 씨가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숨어 살다 캐나다행을 선택한 과정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한국으로 가면 정부의 지원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캐나다를 택한 이유는 뭔가요?
김영민: 한국에 가면 아무래도 편하다는 것 압니다. 말도 통하고 같은 민족으로 이질감도 없으니까요? 저도 한국 가는 것 적극 추천합니다. 한국 가면 더 빨리 정착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일부는 제3국인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는데 제 솔직한 심정은 여기 생활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영어를 써야 의사소통이 되니까 집 구하고 서류 접수 시키고 하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도 생활 보조금 지급해 주고 애들 학비도 면제고 영어도 가르쳐 주고 그런 면도 있긴 합니다.
중국에서 토굴 생활을 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기에 태평양을 건너 이곳 캐나다까지 올 수 있었을 텐데 김 씨는 과연 어떤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일까?
김영민: 저는 첫째로 자유아시아방송의 도움이 컸고 교회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 선교사가 탈북자를 많이 도와줍니다. 대부분 그분들의 도움으로 3국으로 갑니다. 저도 우연히 기회가 와서 조선족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왔습니다.
그는 이어서 중국에서 북한사역을 하는 교회라고 해서 전부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처음엔 탈북자라고 동정심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공안에 발각이 되면 벌금을 내야하고 고초를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는 탈북자를 반기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또 중국에서 만나는 탈북자들 역시 순수한 탈북자인지 아니면 탈북자를 가장한 북한의 특무인지 알 수 없어서 서로 만나도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힘들다는 말도 했습니다.
한국보다 영어권인 캐나다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하는 김영민 씨 그런데도 그는 어째서 외국을 선택한 것일까 ?
김영민: 선택한 것은 한국에 대해선 반감은 없지만 북한에 가족이 있고 제가 북한에 있을 때 한국에 간 분들의 정보가 유출돼서 북한의 가족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기에 차라리 3국으로 가면 그런 걱정은 없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가족과 연락은 합니까?
할 수는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분을 이용하면 되지만 제가 사는 곳이 북한 내륙이어서 비용도 많이 들고 성공할 확률도 낮고요.
김 씨가 캐나다에 온 때는 2007년. 벌써 2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아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을까? 이 또한 궁금했습니다.
2년 동안 뭘 했나요?
김영민: 처음엔 일자리를 찾느라 집에 있었고 지금은 커피 전문점에서 일합니다. 거기서도 평생 일할 곳은 아니니까 여기서 일하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9월부터 학교에 다니기로 했습니다. 그다음엔 대학에 가서 기술을 배우려고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준비하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은 힘들지 않은가요?
김영민: 힘듭니다. 전 가정이 있고 가족을 부양하면서 공부하자니 힘듭니다.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공부하고 하니까요. 그런데 힘든 만큼 보상이 있으니까 참을 만 합니다. 이 나라는 교육체계가 잘돼 있어서 하는 만큼 돌아오는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김 씨는 세 살 된 딸과 한 살이 된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캐나다에서 낳기 때문에 캐나다 시민권잡니다. 보통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자면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있어 경제적 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야 비로소 정착에 성공했다고들 말합니다. 직업의 문제 즉 스스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김 씨의 몫. 큰 어려움은 없어 보입니다.
캐나다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에게 지원하는 금액은 얼마나 됩니까? 현재 4식구인데요.
김영민: 저희는 다 합해서 1천500달러 좌우로 나오고 자원봉사비까지 해서 1,700 정도 받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자원 봉사를 하는데 봉사하고 나서 그 확인서를 시 정부에 청구하면 교통비를 돌려받습니다.
생활비는 충분한가?
김영민: 그냥 절약하면서 집 임대료 내면 살 수는 있습니다. 외식을 한다거나 쇼핑을 할 때면 돈지갑 열길 주저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일하는 겁니다.
캐나다 물가는 어떤가요 ?
김영민: 제가 사는 임대 아파트는 싼 편입니다. 한 달에 700달러, 전기료가 두 달에 한번 나오는데 60달러, 전화비가 50달러 그리고 인터넷과 텔레비전 요금이 합해서 70-80달러 지출합니다. 제 경우 절약을 한다 해도 한 달에 1천 달러는 씁니다.
김 씨가 교회에서 하는 봉사 일이란2천 여명이 한꺼번에 예배가 끝나고 몰려드는 교회 식당일. 빈 그릇을 치우고 정리하는겁니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여러 명이 함께 하는 일입니다. 봉사 시간은 대략 1시간 정도, 이때 김 씨도 점심을 해결합니다.
이렇게 봉사를 하고 나면 교회에서 확인서를 발급해주고 그것을 시정부에 청구하면 교통비를 환급받게 됩니다.
그러나 정부의 생활보조금 이외 수입은 김 씨가 다른 사람들처럼 일해서 버는 돈입니다.
김영민: 커피 전문점에서 하는 일은 손님에게 주문받고, 팔고, 계산하는 겁니다. 아침에 미리 준비를 하고 빵을 굽고 준비합니다. 일은 쉬운데 영어를 쓰니까 힘들었죠.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숙련이 돼서 괜찮습니다. 일은 밤에 하고 낮에는 공부할 수 있어 좋습니다.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일하고, 9시 부터 학교 시작 그리고 좀 자다가 일 나갑니다.
김 씨가 부지런히 학교에 다니며 일할 때 김 씨의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합니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교회를 함께 다니고, 교회에선 아는 사람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배경대화)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김 씨를 아는 사람이 김 씨에게 빌려갔던 컴퓨터 운영체제 제품을 건네주며 김 씨에게서 설명을 듣고는 사라졌습니다.
김영민: 제 취미는 컴퓨터 하는 겁니다. 조금 인터넷을 알고 하면 찾지 못할 정보가 없습니다. 영상 같은 것은 제가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17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적당히 살이 오른 모습. 바쁘게 살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인상을 한 김영민 씨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마저 보이는 듯했습니다. 과연 그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김영민: 그말을 하기 전에 여기 살아도 가끔은 악몽을 꿉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추격을 받고, 잡혀 나가고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악몽에 시달립니다. 자주 북한에 있는 가족 생각도 합니다. 여기서 시민권 따고 나면 북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신학도 배우고 전도사가 돼서 돕고 싶기도 하고요.
북한에서 25년 중국에서 2년 그리고 캐나다에서 2년의 삶. 김영민 씨는 이렇게 각기 다른 나라에서 무엇을 보고 느낀 것일까? 그가 새롭게 정착한 캐나다는 김 씨에겐 기회의 당이 될 수 있을까? 직접 들어봤습니다.
김영민: 일단 가장 첫인상은 중국에 들어가니까 뭐든 것이 달라 보였습니다. 거리 풍경 사람 옷, 습관 다 달랐고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자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순간이었고 여기는 사람 살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이었으니까요. 캐나다는 사람 살기 완벽한 곳입니다. 인권이 보장돼 있고 열심히 살면 어느 정도 살 수 있고 하니까요. 제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둘도 없는 행운입니다.
김영민 씨는 예정된 시간대로 교회에서 봉사 일을 하고 기자와의 짧은 만남 후 집으로 향했습니다. 김 씨가 캐나다에서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김 씨는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자면 차가 필요해 샀다며 7인승 승합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절약하면서 살고 또 필요하다면 일을 해서 무엇이든 장만할 수 있는 생활. 그것이 김영민 씨가 캐나다에서 즐기는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다음 시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다시 캐나다에서 난민신청을 하고 판결을 기다리는 탈북자 김영철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이진서 기자가 캐나다 토론토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캐나다 동부 토론토에 보금자릴 꾸린 김영민 씨 가족은 매주 일요일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아직 영어가 서툴러 현지 적응에 어려움이 있는 김 씨는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이곳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답답함을 해소합니다.
김영민: 이젠 하나님 자체가 생활 일부가 된듯합니다. 제가 여기 온 것도 교회 도움이었고 직접 체험한 것도 있으니까요.
(배경음악) 찬송가
기자는 김 씨가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숨어 살다 캐나다행을 선택한 과정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한국으로 가면 정부의 지원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캐나다를 택한 이유는 뭔가요?
김영민: 한국에 가면 아무래도 편하다는 것 압니다. 말도 통하고 같은 민족으로 이질감도 없으니까요? 저도 한국 가는 것 적극 추천합니다. 한국 가면 더 빨리 정착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일부는 제3국인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는데 제 솔직한 심정은 여기 생활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영어를 써야 의사소통이 되니까 집 구하고 서류 접수 시키고 하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도 생활 보조금 지급해 주고 애들 학비도 면제고 영어도 가르쳐 주고 그런 면도 있긴 합니다.
중국에서 토굴 생활을 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기에 태평양을 건너 이곳 캐나다까지 올 수 있었을 텐데 김 씨는 과연 어떤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일까?
김영민: 저는 첫째로 자유아시아방송의 도움이 컸고 교회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 선교사가 탈북자를 많이 도와줍니다. 대부분 그분들의 도움으로 3국으로 갑니다. 저도 우연히 기회가 와서 조선족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왔습니다.
그는 이어서 중국에서 북한사역을 하는 교회라고 해서 전부 믿을 수는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처음엔 탈북자라고 동정심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공안에 발각이 되면 벌금을 내야하고 고초를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는 탈북자를 반기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또 중국에서 만나는 탈북자들 역시 순수한 탈북자인지 아니면 탈북자를 가장한 북한의 특무인지 알 수 없어서 서로 만나도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힘들다는 말도 했습니다.
한국보다 영어권인 캐나다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하는 김영민 씨 그런데도 그는 어째서 외국을 선택한 것일까 ?
김영민: 선택한 것은 한국에 대해선 반감은 없지만 북한에 가족이 있고 제가 북한에 있을 때 한국에 간 분들의 정보가 유출돼서 북한의 가족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기에 차라리 3국으로 가면 그런 걱정은 없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가족과 연락은 합니까?
할 수는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분을 이용하면 되지만 제가 사는 곳이 북한 내륙이어서 비용도 많이 들고 성공할 확률도 낮고요.
김 씨가 캐나다에 온 때는 2007년. 벌써 2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아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을까? 이 또한 궁금했습니다.
2년 동안 뭘 했나요?
김영민: 처음엔 일자리를 찾느라 집에 있었고 지금은 커피 전문점에서 일합니다. 거기서도 평생 일할 곳은 아니니까 여기서 일하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9월부터 학교에 다니기로 했습니다. 그다음엔 대학에 가서 기술을 배우려고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준비하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은 힘들지 않은가요?
김영민: 힘듭니다. 전 가정이 있고 가족을 부양하면서 공부하자니 힘듭니다.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공부하고 하니까요. 그런데 힘든 만큼 보상이 있으니까 참을 만 합니다. 이 나라는 교육체계가 잘돼 있어서 하는 만큼 돌아오는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김 씨는 세 살 된 딸과 한 살이 된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캐나다에서 낳기 때문에 캐나다 시민권잡니다. 보통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자면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있어 경제적 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야 비로소 정착에 성공했다고들 말합니다. 직업의 문제 즉 스스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김 씨의 몫. 큰 어려움은 없어 보입니다.
캐나다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에게 지원하는 금액은 얼마나 됩니까? 현재 4식구인데요.
김영민: 저희는 다 합해서 1천500달러 좌우로 나오고 자원봉사비까지 해서 1,700 정도 받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자원 봉사를 하는데 봉사하고 나서 그 확인서를 시 정부에 청구하면 교통비를 돌려받습니다.
생활비는 충분한가?
김영민: 그냥 절약하면서 집 임대료 내면 살 수는 있습니다. 외식을 한다거나 쇼핑을 할 때면 돈지갑 열길 주저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일하는 겁니다.
캐나다 물가는 어떤가요 ?
김영민: 제가 사는 임대 아파트는 싼 편입니다. 한 달에 700달러, 전기료가 두 달에 한번 나오는데 60달러, 전화비가 50달러 그리고 인터넷과 텔레비전 요금이 합해서 70-80달러 지출합니다. 제 경우 절약을 한다 해도 한 달에 1천 달러는 씁니다.
김 씨가 교회에서 하는 봉사 일이란2천 여명이 한꺼번에 예배가 끝나고 몰려드는 교회 식당일. 빈 그릇을 치우고 정리하는겁니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여러 명이 함께 하는 일입니다. 봉사 시간은 대략 1시간 정도, 이때 김 씨도 점심을 해결합니다.
이렇게 봉사를 하고 나면 교회에서 확인서를 발급해주고 그것을 시정부에 청구하면 교통비를 환급받게 됩니다.
그러나 정부의 생활보조금 이외 수입은 김 씨가 다른 사람들처럼 일해서 버는 돈입니다.
김영민: 커피 전문점에서 하는 일은 손님에게 주문받고, 팔고, 계산하는 겁니다. 아침에 미리 준비를 하고 빵을 굽고 준비합니다. 일은 쉬운데 영어를 쓰니까 힘들었죠.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숙련이 돼서 괜찮습니다. 일은 밤에 하고 낮에는 공부할 수 있어 좋습니다.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일하고, 9시 부터 학교 시작 그리고 좀 자다가 일 나갑니다.
김 씨가 부지런히 학교에 다니며 일할 때 김 씨의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합니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교회를 함께 다니고, 교회에선 아는 사람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배경대화)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김 씨를 아는 사람이 김 씨에게 빌려갔던 컴퓨터 운영체제 제품을 건네주며 김 씨에게서 설명을 듣고는 사라졌습니다.
김영민: 제 취미는 컴퓨터 하는 겁니다. 조금 인터넷을 알고 하면 찾지 못할 정보가 없습니다. 영상 같은 것은 제가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17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적당히 살이 오른 모습. 바쁘게 살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인상을 한 김영민 씨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마저 보이는 듯했습니다. 과연 그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김영민: 그말을 하기 전에 여기 살아도 가끔은 악몽을 꿉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추격을 받고, 잡혀 나가고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악몽에 시달립니다. 자주 북한에 있는 가족 생각도 합니다. 여기서 시민권 따고 나면 북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신학도 배우고 전도사가 돼서 돕고 싶기도 하고요.
북한에서 25년 중국에서 2년 그리고 캐나다에서 2년의 삶. 김영민 씨는 이렇게 각기 다른 나라에서 무엇을 보고 느낀 것일까? 그가 새롭게 정착한 캐나다는 김 씨에겐 기회의 당이 될 수 있을까? 직접 들어봤습니다.
김영민: 일단 가장 첫인상은 중국에 들어가니까 뭐든 것이 달라 보였습니다. 거리 풍경 사람 옷, 습관 다 달랐고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자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순간이었고 여기는 사람 살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이었으니까요. 캐나다는 사람 살기 완벽한 곳입니다. 인권이 보장돼 있고 열심히 살면 어느 정도 살 수 있고 하니까요. 제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둘도 없는 행운입니다.
김영민 씨는 예정된 시간대로 교회에서 봉사 일을 하고 기자와의 짧은 만남 후 집으로 향했습니다. 김 씨가 캐나다에서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김 씨는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자면 차가 필요해 샀다며 7인승 승합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절약하면서 살고 또 필요하다면 일을 해서 무엇이든 장만할 수 있는 생활. 그것이 김영민 씨가 캐나다에서 즐기는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다음 시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다시 캐나다에서 난민신청을 하고 판결을 기다리는 탈북자 김영철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