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이 말하는 중국생활]② 중국에서 팔려 다니는 북한 여성들

서울-이진서 leej@rfa.org
201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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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겪었던 인신매매와 인권 유린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왼쪽은 칼 거쉬먼 미국 국립민주주의기금 회장.
2010년 9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겪었던 인신매매와 인권 유린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왼쪽은 칼 거쉬먼 미국 국립민주주의기금 회장.
RFA PHOTO/박정우

MC: RFA 자유아시아 방송 3부작 기획특집 탈북자들이 말하는 중국에서의 생활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많은 수의 북한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또는 가족의 생계를 돕고자 도강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의지와는 달리 인신매매에 팔려가게 됩니다.

오늘은 중국에서 팔려 다니는 북한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진행에는 이진서 기잡니다.

1990년대 말 시작된 북한의 경제난. 국가의 재난은 가족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탈북여성 김순실(가명) 씨입니다.

김순실: 눈물 나는 일이 어째 없겠습니까? 자식들도 굶어 죽게 하고 남편과 두 아이는 탈북하다가 총에 맞아 죽고, 그 설움을 어디 말할 곳도 없고, 고향 얘기 하니까 눈물이 납니다.

무산 출신으로 1998년 두만강을 넘었던 김 씨의 당시 나이는 30대 후반이었습니다. 이미 북한에 아는 사람이 얼마 남지 않 은 상태에서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야밤에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김순실: 사실 북한 사람들이 중국에 오게 되면 다 팔려갑니다. 팔려 가는데 장애인이나 중국에서도 돈이 없고 못사는 시골에다 팔아먹거든요. 중국 사람들 그게 나빠요. 돈을 받고 팔지만 온전한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주면 좋은데 장애인이나 못사는 사람에게 파니까 그게 마음이 아프죠. 저도 그런 대로 시집을 갔다가 그곳에서 두 번 잡혀 북송 당했거든요.

중국에서 한족을 만나 살게 됐는데 죽다가 살아난 목숨이라 또 북한에 남은 가족 생각에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지만 남편만 보면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김순실: 그 남자는 머리 감을 줄도 모르고 이빨 닦을 줄도 모르는 이런 남자거든요. 정말 막말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죠. 일 년이 가도 옷을 벗어 빨아 입는 것을 못 봤어요. 그래도 남편 된다고 내가 팔려갔으니까 참고 살았는데 나중에는 머리가 깨인 거지요. 그래서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기자: 그분과는 얼마나 사셨나요?

김순실: 한 4년 정도 살았습니다. 그러다 내가 도망갔거든요.

배우자가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리고 환경이 그처럼 처참하지만 않았더라도 원망이 지금처럼 크진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니 원망이라기보다 안타까움이란 표현이 더 적당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김 씨는 4년여 동안 두 번씩이나 동네 이웃의 신고로 북송 당했지만 다시 탈북해서는 그 집밖에는 갈 곳이 없었다는 말에 인생이 더 서글퍼집니다.

김순실: 너무 못 사는 집이예요. 흙집에서 살았어요. 거기서 농사를 지으면서 시장에 나가 장사도 좀 하고 해서 돈을 좀 벌어서 고향집에도 좀 보내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두 번씩이나 잡혀 나가면서도 왜 그 집에 또 갔는가 하면 첫걸음을 디딘 집이거든요. 한족이었거든요. 그 집에서 중국말도 배우고 또 일하면서 돈을 조금씩이나마 벌어서 북한 집에 보냈잖아요. 그때는 엄마가 살아 계셨었거든요. 그 마음이 있어서 두 번째 잡혀 나갔다가 왔어도 다시 갔거든요.

또 다른 탈북여성 이옥순(가명) 씨. 그는 2000년 20살 때 강을 건넜습니다. 중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4번 강제북송을 당합니다.

기자: 중국 하면 어떤 기억이 떠오릅니까?

이옥순: 북한 사람들이 중국에 팔려가잖아요. 저도 두 번을 팔려갔으니까 그게 생각납니다. 사람 취급을 못 받고 물건이나 같아요. 중국 사람이 북한 사람에게 중국 돈으로 2천원에 샀다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4천원에 팔고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운이 좋으면 한, 두 번에 되고 운이 안 좋으면 몇 번을 넘겨 가서 마지막에 중국 한족이 살 때는 만원에서 만 8천원이 되는 거죠. 나이가 어릴수록 금액이 올라가는 겁니다. 나이가 많으면 중국 돈 500원에도 팔려갈 수 있고요.

기자: 본인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거죠?

이옥순: 당연히 몰랐죠. 처음에는 몰랐는데 팔려간 다음에 보니까 도망을 못나가는 겁니다. 한 아파트에 모아 놨는데 내가 갔을 때도 거기 6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고장에는 팔지 않아요. 서로 언어가 통하면 말 맞춰서 도망간다는 거죠. 팔려갈 때 넘기는 사람이 전화번호를 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네가 살다가 살기 싫으면 우리에게 전화를 해라 그럼 장소를 정해 자기들이 빼준다는 거죠. 그러면 또 다른데다 팔고 우리한테는 중국 돈 2천 원 정도 준다는 약속을 하고 팔려가는 겁니다.

기자: 당시 팔려간 곳을 기억합니까?

이옥순: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요녕성 조양시라고 하는데 동서남북이 다 산이고 산에 집 아홉 채 있는 곳으로 팔려갔습니다. 거기는 수도가 없어서 우물물을 길어 먹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저 혼자 북한 사람이었어요.

기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나요?

이옥순: 말을 모르니까요. 한 마을이 전부 친척입니다. 사돈이든 사촌이든 다 아는 사람입니다. 도망갈 수가 없어요. 감시를 받고 살아요. 동네를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기자: 얼마나 그곳에 있었나요

이옥순: 저는 거기서 1년을 살았습니다.

탈북한 모든 여성이 중국에서 팔려 다니거나 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신매매의 대상이 됐던 것은 물론 아닐 겁니다. 단, 법이나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많은 수의 남한입국 탈북여성이 한때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옥순 씨는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은 하지 않는 경험을 여러 차례 하게 된 겁니다.

기자: 공안이 들이닥쳐서 잡혔을 때 그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이옥순: 죽었구나, 나 죽었구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이면 여기서 죽자.

기자: 그것을 4번이나 경험했잖습니까?

이옥순: 네, 마지막 잡혔을 때는 2004년인데 이제 나가면 그전에 문건이 많이 남았으니까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무서웠습니다. 97년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또 돈만 좀 주면 또 나오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죠.

기자: 2004년에는 중국말도 좀 아니까 좀 봐 달라 이런 말은 안 해보셨나요?

이옥순: 그런 말이 안통해요.

현재 30대 초반의 또 다른 탈북여성 김설희(가명) 씨. 그는 북한 여성이 중국으로 팔려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중국 땅을 밟게 되면 도망치겠다는 맘을 먹고 브로커에게 갔습니다.

김설희: 그때 제가 도망치려고 계획을 해서 그 시골 이름을 기억합니다. 요녕성 조향춘이었는데 거기 아오지아프로향이란 시골이 있습니다. 팔려갔는데 저는 안 간다고 막 그랬는데 중국 남자들이 북한 여자 보려고 엄청 많이 왔어요. 그때 20대는 만원, 30대는 8천원, 40대는 2천원이었어요.

기자: 실례지만 그때 나이는?

김설희: 저는 20대여서 중국 돈으로 만 원이었어요. 팔려 안 간다고 하니까 주위에 북한 여자가 와서 저를 설득했어요. 저는 도망치고 싶다. 집에 돈을 벌어서 보내야 한다. 이랬더니 일단 시집가서 정을 조금 붙이는 척 하다가 도망쳐라 안 그러면 죽는다.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살아야 겠다 생각을 했지만 솔직히 시골에서 오는 남자들 보려야 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예요. 머리를 언제 감았는지 떡이 됐고 여자를 보러 오는데 바지도 쭈글쭈글 그런 것을 입고 오거든요. 진짜 눈에 안차더라고요. 제가 안 간다고 하니까 뚱뚱한 남자가 칼을 가지고 와서 죽인다고 하더라고요.

기자: 그 남성은 몇 살이나 됐었나요?

김설희: 당시 그 남성분은 38살이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인신매매는 범죄에 속하며 이에 가담한 자는 엄벌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불법으로 도강한 북한 여성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중국입장에서 보면 초대받지 못한 손님 즉 불청객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설희 씨는 함께 살던 남자로부터 도망쳐 심양으로 간 후 돈을 모아 남한으로 갔습니다. 심양에서 남한행을 결심하기 까지 4년이 걸립니다.

기자: 그때 위성 텔레비전으로 통해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산다 이런 사실을 몰랐습니까?

김설희: 중국에서 한국 텔레비전를 봤지만 한국 간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내가 가면 북한의 가족이 무사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을 안했습니다. 그 후 소식을 듣고 심양에 알아봐서 2008년 한국에 왔습니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금도 일부 북한 주민은 깊은 밤 강을 건너고 있고 중국 땅에서는 이들을 잡아 강제북송 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MC: RFA 자유아시아 특집방송 탈북자들이 말하는 중국에서의 생활 오늘은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했던 탈북여성들의 증언을 전해드렸습니다.

내일은 마지막 시간으로 인권의 사각지대와 중국당국의 탈북자 강제북송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진행에는 이진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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