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여 안녕, 북·쿠 동맹의 위기] ➃ 영웅과 반역자, 조국의 떠난 사람들
2024.04.25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없다
쿠바와 헤밍웨이 그리고 북한.
어울리지 않은 듯한 세 단어에 흥미로운 조합을 확인하기 위해 세계적인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살던 집을 방문했습니다.
(기자) 위험하지 않을까, 회사에서 위험한 행동하지 말라고 했는데
(쿠바인/안내) 코코 택시는 위험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오토바이라 부르는 모터사이클을 변형해 뒷자리에 3명이 앉는 쿠바의 명물 ‘코코 택시’를 타고 11킬로미터를 달려 도착한 곳이 코히마르(Cojimar) 마을입니다.
바다가 멀리보이는 한적한 숲 속에 저택이 있습니다.
(쿠바 안내인) 이 집은 1888년에 지었어요. 헤밍웨이는 1939년 임대로 지내다가 1년 후 이 집을 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여기에 살았어요.
미국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무기여 잘있거라’ 등의 명작을 남겼고 특히 쿠바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쓴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이나 자주찾던 술집과 식당, 낚시하던 곳 등은 쿠바를 찾는 외국 관광객의 주요 방문지가 되었습니다.
헤밍웨이는 북한에도 널리 알려진 미국 소설가입니다.
북한 손전화의 전자책방에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가’가 소개된 것으로 전해지고 북한 백과사전에는 헤밍웨이를 “사회적 진보와 정의를 옹호하는 정신”의 독특한 창작수법을 발휘했다며 높게 봅니다.
헤밍웨이가 당시 쿠바의 지도자였던 피델 카스트로의 유일한 미국 친구라는 점도 북한이 헤밍웨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다른 이유로 보입니다.
헤밍웨이 저택에는 침실과 서재, 부엌, 손님방, 거실, 사냥도구와 박제 동물을 전시한 공간이 본채와 별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기자) 헤밍웨이가 왜 쿠바를 좋아했나요?
(쿠바 안내인) 취미 때문이었어요. 낚시, 독서, 사냥을 좋아 했습니다.
낚시를 좋아했던 헤밍웨이는 코히마르 마을의 어부들과 어울리며 쌓은 인연으로 명작 ‘노인과 바다’를 씁니다.
늙은 어부의 고독한 싸움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려낸 내용으로 퓰리처 상과 노벨 문학상을 받습니다.
하지만1960년 쿠바에 살았던 헤밍웨이가 2024년으로 돌아온다면 그의 명작 ‘노인과 바다’는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기를 잡으러 자유롭게 바다로 향했던 어부들도, 고깃배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기자) 아바나 주민들이 즐겨찾는 유명 관광지 말레꼰 해변입니다. 하지만 저 넓은 바다에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습니다.
쿠바 북쪽 바다인 플로리다 해협을 건너 미국으로 가려는 망명 시도를 막기 위해 쿠바 정부는 고기배나 유람선 등이 먼바다로 나가는 것을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으로 망명해도 고향과 가족을 방문을 허용하는 쿠바
쿠바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의 미국 마이애미 국제공항.
쿠바 아바나행 비행기 탑승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항공사 직원) 쿠바 아바나로 여행하려는 승객은 쿠바 입국 비자나 쿠바 여권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쿠바로 가는 비행기에 미국인과 쿠바인 그리고 쿠바로 출장이나 여행가는 다른 나라 여권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탑승합니다.
미국에서 쿠바로 건너가는 하늘길에는 까다로운 검색도 질문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워싱턴에서 평양으로,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아바나행 항공기에 올랐습니다.
(항공사 승무원) We would like to be the first to welcome you to Havana, Cuba, where it's currently 3.45 pm.
쿠바 화폐로 환전을 하지 못한 기자는 아바나 택시를 타고 이동할 때 미국 달러로 계산해도 되는지 옆자리에 앉은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중년 여성 대신 그 옆에 앉은 십대 딸이 대신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말을 튼 김에 쿠바 방문의 목적을 물었습니다.
(기자) 쿠바에 어떤 일로 방문하나요?
(쿠바계 미국인 딸) 할머니를 방문합니다. 엄마 고향집을 갑니다.
소녀의 엄마가 미국으로 망명해서 정착했는데 일 년에 한번씩 고향의 부모집을 방문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있을 예정이냐고 물으니 일주일이라고 답했습니다.
쿠바 출신의 모녀와의 대화는 탈북민의 현실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 장면은 쿠바 출장을 전한 RFA방송에도 인상 깊었던 순간으로 전했습니다.
(기자) 쿠바와 북한이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있는데요. 먼저 여권이 비슷합니다. 외국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해도 여권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 깨끗한 상태로 돌아옵니다. 입출국때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는다는건데요. 쿠바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신 쿠바에 들어갈 때 비자 카드라는 길다란 쪽지에 제 정보를 적습니다. 그리고 입국할 때 그걸 보여주고 나올 때도 그것만 쿠바 출국심사대에 반납합니다. 여권은 가지고 있는 것만 확인하지 거기에 도장이나 흔적을 남기진 않더라구요. 그리고 들어가는 비행기에 앉았습니다. 제 옆에 아주머니 한 분 그리고 옆에 딸로 추정되는 한 중학생 정도의 소녀가 앉았는데요. 바로 옆에 아주머니가 쿠바를 떠난 망명 출신이었습니다.
조국을 떠난 쿠바 망명인들이 쿠바 경제를 살린다
(쿠바 안내원) 현재 쿠바의 제1 수입원은 송금입니다.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들이 가족에게 보내는 송금과 물자 그것이 쿠바 경제의 버팀목입니다. 그 다음이 관광으로 벌어들이는 돈입니다. 그리고 의료 수출, 예를 들어서 의사나 간호사를 파견한다든지,,
미국에 살고 있는 쿠바계는 200만명에 이릅니다. 남미계로는 멕시코, 도미니칸 공화국, 살바도르 다음으로 많습니다.
쿠바 전체 인구 1천100만명의 20%에 이릅니다.
미국에 정착한 쿠바 이민자들이 쿠바의 가족에게 보내는 돈은 연간 30억 달러에 이릅니다.
쿠바인의 탈쿠바 행렬은 피델 카스트로가 공산정권을 세우면서 시작됐습니다.
1965년까지 35만 명이 미국으로 망명했고 1980년 피델 카스트로는 조국을 배신할자는 떠나라며 항구를 개방하자 수 십만명이 플로리다 해협을 건너 미국으로 갔습니다.
2024년 현재, 미국에 정착한 탈쿠바 이민자들은 미국 여권으로 자유롭게 고향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가족을 둔 쿠바인은 주위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의약품이나 생필품, 컴퓨터나 전화기도 미국의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 얻습니다.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에 정착한 탈북민는 3만 4천여명입니다.
2005년 통과한 북한인권법에 의해 미국에 정착한 탈북민은 230여명입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은 북한에 있는 가족에 매년 22만 달러 정도를 송금한다고 합니다.
나고 자란 정든 땅에서 살기 어려워 새로운 살 길을 선택한 탈북민은 고향 방문고 가족 상봉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쿠바인들은 어떻게 볼까요?
아바나 대학 출신으로 외국인 관광 안내원인 죠 씨는 탈북민의 처지를 듣고 “말도 안된다”고 답합니다.
(쿠바 관광안내 죠) That’s crazy. Because everyone can have the right to travel if they can afford it.
일상이 된 정전과 무너진 배급체계, 화폐개혁 실패, 텅빈 선반의 약국과 상점 그리고 미국의 제재까지… 쿠바와 북한은 여러모로 닮았지만 조국을 떠나 새로운 선택을 한 이민자들에 대한 태도와 인식은 크게 달라 보입니다.
RFA 특별기획 <동무여 안녕, 북한-쿠바 동맹의 위기> 4편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제작, 진행에 자유아시아방송 김진국입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