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취재: 탈북아동 문제 이대로 좋은가] ② 남한에 왔지만 '또 다른 이별이...'
서울-이진서 leej@rfa.org
2009.12.26
2009.12.26
RFA PHOTO/ 이진서
MC: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2009년 연말 특집으로
북한을 떠나 제 3국에 사는 북한 아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중국과 남한 두 곳의 현지 취재를 통해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탈북해서 단독으로 남한에 간 북한 출신의 미성년자는 성인이 될 때까지 남한 정부가 인정해 준 ‘청소년 보호 시설’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들 일부는 가족이나 친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생활을 원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남한에서 북한출신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탈북아동 문제 이대로 좋은가?’ 오늘은 그 두 번째 순서로 ‘남한의 그룹홈’편을 전해 드립니다. 취재 보도에는 이진서 기잡니다.
( 문소리 …)
연말을 맞아 경찰청에서 북한 아이들이 사는 그룹홈에 쌀 10Kg 짜리 20포가 전달돼 몇 달간 식량 걱정을 덜게 됐습니다. 이렇게 남한에선 연말이면 온정의 손길이 각지에서 옵니다.
성북구에 있는 상가건물의 꼭대기 층. 현재 이 집에는 다섯 명의 북한 출신 아이들과 이 집의 가장인 김태훈 씨 이렇게 6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남한의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30대 중반의 김 씨와 아이들은 함께 살게 된 이유도 살아왔던 배경도 모두가 다르지만 지금은 한가족이 됐습니다. 공동생활가정이라고 부르는 탈북청소년 그룹홈은 어떤 아이들이 사는 곳일까? 올해 열다섯 살로 이 집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하룡이. 함경북도에 살다 2004년 엄마와 탈북해 남한에 갔지만 엄마와는 떨어져 공동생활 가정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기자: 어머니와 같이 왔는데 어떻게 태훈이 형하고 같이 있나요?
하룡: 어머니가 일 때문에 항상 바쁘셨습니다. 식당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집에 혼자 있었습니다. 삼촌(김태훈)이 자원 봉사를 하면서 수녀님과 저희 집을 방문 했습니다. 그때가 2006년이었습니다. 엄마와 같이 있질 못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오실 때도 있고 그랬습니다.
커서 한의사가 되겠다는 하룡이는 현재 중학교 1학년입니다.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또는 보호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남한에서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한 탓으로 잠시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올해 열일곱 살인 덕수는 탈북해 아버지와 함께 남한에 살았지만 보호시설로 옮기면서 지금은 아버지를 회피하고 있었습니다.
덕수: 북한에서도 아빠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중국에서도 3년 동안 맞았습니다. 남한에 와서는 더 심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때릴 땐 어떻게 때립니까? 가죽띠로 때리고 머리가 두 번 정도 터졌습니다. 약주를 많이 드셨나요? 아니요. 연락은 합니까? 안 하고 싶어요.
아이들의 보호자인 김태훈 씨는 덕수와 함께 살게 된 배경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태훈: 아버지가 감정 조절을 잘 못하고 알콜 의존성이 심하고 정신 이상 때문에 자기 몸이 아프다고 하는데 병원에선 아무 이상도 없다고 합니다. 아동 보호 기관과의 협조하에 덕수 아버지의 동의를 받아 아이를 보호 하고 있습니다.
남한에 한해 입국하는 탈북자 중 청소년의 비율이 13퍼센트 열 명 중 한 명 꼴로 보호자가 필요한 미성년입니다. 또 이중 부모 중 한쪽만 남한 입국에 성공한 경우가 절반 정도고 아무런 연고자 없이 홀로 남한으로 간 경우도 탈북 청소년의 25퍼센트를 차지합니다. 다시 말해 간 북한 출신 아동 4명 중 1명은 대리 보호자가 있어야 된다는 해석입니다.
탈북 청소년은 이미 북한에서 가정해체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남한에 가서도 제일 우선해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임에도 자칫 어른들의 무관심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또 다른 구성원인 열일곱 살 원혁이와 열 다섯살 인 원일이 형제. 이 둘은 탈북할 때 헤어졌다가 4년 만에 남한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김태훈: 4년 만에 형제가 만났으니까 눈물을 펑펑 쏟을 줄 알았는데 울지 않고 둘이 꼭 껴안고 거친 숨소리만 내더라고요.
엄마와 세 식구가 남한 생활을 하게 됐지만 이 형제는 지금 공동체 가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혁이 엄마는 이곳에 생활비를 보내주며 일을 쉬는 날이면 아이들을 찾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원혁이가 말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입니다.
원혁: 아버지 보고 싶지 않아요? 안 보고 싶어요. 남한으로 오면 안 돼요. 올 준비도 안하고 있지만…
덕수는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생각하는 아버지는 자식을 잘 가르쳐 주고 어려운 것 있으면 잘 챙겨주는 아버지라며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원일이는 이제 중학교 1학년밖에는 안 됐지만 커서 좋은 아내를 만나 아이를 낳고 아이와 많이 놀아주는 아빠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song: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
전문가들은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에 비유합니다. 빠르게 부는 바람과 소용돌이 치는 물결에 아이들의 변화를 비유한 말입니다.
감수성 예민하고 관심이 필요한 때이지만 북한출신 아이들은 부모가 남한 생활에 적응하기 바빠 또는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자칫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늘 곁에 있어주는 공동체의 가장 김태훈 씨가 희망하는 것은 소박한 삶입니다.
김태훈: 본인의 아버지인데 아이들이 싫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습니다. 저도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지만 원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이들이 커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룰 때 자기가 기억하는 안 좋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고 좋은 아버지가 됐으면 합니다.
콩한 쪽이라도 나눠 먹는다는 김태훈 씨와 북한 아이 다섯 명. 연고가 없거나 또는 부모가 남한에 있지만 개인 사정상 아이와 함께 살 수 없을 때 북한 출신 아이들은 ‘탈북청소년 그룹홈’ 즉 공동체가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단체는 남한 정부의 소액 지원과 개인이나 단체 또는 기업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탈북해서 단독으로 남한에 간 북한 출신의 미성년자는 성인이 될 때까지 남한 정부가 인정해 준 ‘청소년 보호 시설’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들 일부는 가족이나 친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생활을 원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남한에서 북한출신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탈북아동 문제 이대로 좋은가?’ 오늘은 그 두 번째 순서로 ‘남한의 그룹홈’편을 전해 드립니다. 취재 보도에는 이진서 기잡니다.
( 문소리 …)
연말을 맞아 경찰청에서 북한 아이들이 사는 그룹홈에 쌀 10Kg 짜리 20포가 전달돼 몇 달간 식량 걱정을 덜게 됐습니다. 이렇게 남한에선 연말이면 온정의 손길이 각지에서 옵니다.
성북구에 있는 상가건물의 꼭대기 층. 현재 이 집에는 다섯 명의 북한 출신 아이들과 이 집의 가장인 김태훈 씨 이렇게 6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남한의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30대 중반의 김 씨와 아이들은 함께 살게 된 이유도 살아왔던 배경도 모두가 다르지만 지금은 한가족이 됐습니다. 공동생활가정이라고 부르는 탈북청소년 그룹홈은 어떤 아이들이 사는 곳일까? 올해 열다섯 살로 이 집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하룡이. 함경북도에 살다 2004년 엄마와 탈북해 남한에 갔지만 엄마와는 떨어져 공동생활 가정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기자: 어머니와 같이 왔는데 어떻게 태훈이 형하고 같이 있나요?
하룡: 어머니가 일 때문에 항상 바쁘셨습니다. 식당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집에 혼자 있었습니다. 삼촌(김태훈)이 자원 봉사를 하면서 수녀님과 저희 집을 방문 했습니다. 그때가 2006년이었습니다. 엄마와 같이 있질 못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오실 때도 있고 그랬습니다.
커서 한의사가 되겠다는 하룡이는 현재 중학교 1학년입니다.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또는 보호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남한에서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한 탓으로 잠시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올해 열일곱 살인 덕수는 탈북해 아버지와 함께 남한에 살았지만 보호시설로 옮기면서 지금은 아버지를 회피하고 있었습니다.
덕수: 북한에서도 아빠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중국에서도 3년 동안 맞았습니다. 남한에 와서는 더 심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때릴 땐 어떻게 때립니까? 가죽띠로 때리고 머리가 두 번 정도 터졌습니다. 약주를 많이 드셨나요? 아니요. 연락은 합니까? 안 하고 싶어요.
아이들의 보호자인 김태훈 씨는 덕수와 함께 살게 된 배경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태훈: 아버지가 감정 조절을 잘 못하고 알콜 의존성이 심하고 정신 이상 때문에 자기 몸이 아프다고 하는데 병원에선 아무 이상도 없다고 합니다. 아동 보호 기관과의 협조하에 덕수 아버지의 동의를 받아 아이를 보호 하고 있습니다.
남한에 한해 입국하는 탈북자 중 청소년의 비율이 13퍼센트 열 명 중 한 명 꼴로 보호자가 필요한 미성년입니다. 또 이중 부모 중 한쪽만 남한 입국에 성공한 경우가 절반 정도고 아무런 연고자 없이 홀로 남한으로 간 경우도 탈북 청소년의 25퍼센트를 차지합니다. 다시 말해 간 북한 출신 아동 4명 중 1명은 대리 보호자가 있어야 된다는 해석입니다.
탈북 청소년은 이미 북한에서 가정해체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남한에 가서도 제일 우선해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임에도 자칫 어른들의 무관심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또 다른 구성원인 열일곱 살 원혁이와 열 다섯살 인 원일이 형제. 이 둘은 탈북할 때 헤어졌다가 4년 만에 남한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김태훈: 4년 만에 형제가 만났으니까 눈물을 펑펑 쏟을 줄 알았는데 울지 않고 둘이 꼭 껴안고 거친 숨소리만 내더라고요.
엄마와 세 식구가 남한 생활을 하게 됐지만 이 형제는 지금 공동체 가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혁이 엄마는 이곳에 생활비를 보내주며 일을 쉬는 날이면 아이들을 찾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원혁이가 말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입니다.
원혁: 아버지 보고 싶지 않아요? 안 보고 싶어요. 남한으로 오면 안 돼요. 올 준비도 안하고 있지만…
덕수는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생각하는 아버지는 자식을 잘 가르쳐 주고 어려운 것 있으면 잘 챙겨주는 아버지라며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원일이는 이제 중학교 1학년밖에는 안 됐지만 커서 좋은 아내를 만나 아이를 낳고 아이와 많이 놀아주는 아빠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song: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
전문가들은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에 비유합니다. 빠르게 부는 바람과 소용돌이 치는 물결에 아이들의 변화를 비유한 말입니다.
감수성 예민하고 관심이 필요한 때이지만 북한출신 아이들은 부모가 남한 생활에 적응하기 바빠 또는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자칫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늘 곁에 있어주는 공동체의 가장 김태훈 씨가 희망하는 것은 소박한 삶입니다.
김태훈: 본인의 아버지인데 아이들이 싫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습니다. 저도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지만 원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이들이 커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룰 때 자기가 기억하는 안 좋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고 좋은 아버지가 됐으면 합니다.
콩한 쪽이라도 나눠 먹는다는 김태훈 씨와 북한 아이 다섯 명. 연고가 없거나 또는 부모가 남한에 있지만 개인 사정상 아이와 함께 살 수 없을 때 북한 출신 아이들은 ‘탈북청소년 그룹홈’ 즉 공동체가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단체는 남한 정부의 소액 지원과 개인이나 단체 또는 기업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