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강제 북송 악순환 끊어야” 숨가쁜 제네바 외교전

제네바-서혜준, 자민 앤더슨 seoh@rfa.org
2024.05.22
“탈북민 강제 북송 악순환 끊어야” 숨가쁜 제네바 외교전
Photo: RFA

제발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김규리] 제발 때리지만 말고안전하게 살 수 있게만 해주세요저한테 안 와도 돼요중국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게만 해준다면 다른 바람이 없어요. 중국에서 제발 좀 받아줘서 딸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만 하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것뿐이에요.

 

탈북민 김규리 씨의 여동생 철옥 씨는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강제 북송됐습니다. 중국으로 탈북한 직후인 1998 15살의 나이에 인신매매로 팔려가 현지 중국인과 결혼해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25년 만인 2023, 한국행을 시도했다가 그 길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지난 5월 태어난 손자도 보지 못 했습니다.

 

[김규리동생이 (탈출을결심했을 때는성공할 수 있겠다고 믿었거든요제가 모든 것을 동원하려고 했어요직접 중국에 가서 데리고 올까란 생각도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제가 너무 한심한 것 같아요. 매일 울고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이렇게 아프면 동생은 더 아플 텐데라는 생각에 더 많이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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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북송되기 전, 2022년 김철옥 씨의 모습. /김규리 씨 제공

 

김 씨를 5개월만인 지난 3 15일 스위스 제네바 유엔 본부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스위스 제네바 유엔 본부에서 오전에 열릴 제55차 유엔 인권이사회 부대 행사장 입구에서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김 씨가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김규리] 안녕하세요?

 

[기자이제 10분 남았는데 어떠세요?

 

[김규리긴장됩니다처음에는 (동생 문제 해결을 위한앞날이 멀다고 생각했는데작년에 유엔 뉴욕 본부에서도 증언했고 이제 더 범위가 넓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탈북 후 영국에 정착한 김 씨는 생업을 잠시 접고 제네바까지 왔습니다.

 

[김규리집중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중국이 문제다’, ‘중국과 타협을 해야한다는 거예요. ‘북한에서 넘어오는 탈북민들을 받기 싫으면 제3국으로 보내 달라다시 그 험한 나라로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는 것을 집중해서 말하고 싶어요.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각국 외교관들과 국제인권단체 관계자들이 북한 인권 문제, 특히 탈북민 강제북송에 대한 중국과 북한의 책임을 지적합니다.

 

[현장] 우리는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을 포함한 유엔 회원국들이 국제법적 의무를 준수하고 강제송환금지원칙을 존중할 것을 촉구합니다.

 

회의 중반, 한 남성이 ‘CHINE’, 프랑스어로 ‘중국이라고 적힌 국가명패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옵니다. 예상치 못한 중국 대표의 등장이었습니다.

 

중국 대표를 앞에 두고 김 씨는 중국 당국이 강제 북송한 동생이 생사의 갈림길에 처했다고 도움을 호소합니다.

 

김 씨의 오빠는 북한 감옥에서 극심한 고문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오빠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는 김 씨는, 동생도 똑같은 일을 당할까봐 두렵다고 말합니다.

 

[김규리북한의 감옥은 정말 열악합니다처벌은 강하고먹을 것은 없습니다저는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제 동생과 모든 북한 사람을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그들이 자유를 얻도록 도와주세요.

 

김 씨가 양해를 구하더니 한국말로 발언을 이어갑니다.

 

[김규리제가 한 가지만 더 추가할 것은 우리 모든 북한 사람들은 죄인이 아니라는 거예요죄라면 북한에서 태어난 거예요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김정은입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눈물을 삼키는 김 씨.

 

참석자들은 눈을 감고 듣기도 하고, 김 씨의 증언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노트북에 열심히 받아적기도 합니다모든 사람이 그의 말을 숨죽여 듣는 회의실의 분위기는 숙연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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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권 관련 부대행사에는 처음으로 얼굴을 비친 중국 대표. 그는 며칠 뒤 유엔에서 열린 다른 부대행사에도 참석했지만, 행사 시간 문제로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다. /RFA Photo

 

행사가 마무리될 무렵, 갑자기 중국 대표가 발언 신청을 하더니미리 준비해 온 두 장짜리 종이를 읽어 내려갑니다

 

[중국 대표경제적 이유로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은 불법 이민자입니다난민이 아닙니다이들에게 강제송환 금지조약은 적용되지 않습니다북한에서 자행되는 고문 또는 이른바 대규모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그러므로 북한 사람들에 대해 강제송환 금지조약을 적용하기 위한 요건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새로울 것없는 발언만 남기고 행사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중국 대표를 김 씨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규리] (마음이아팠어요역시 그렇구나중국이 그렇지예상한 반응이었습니다중국이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고 싶어요중국인들이 우리 북한 사람들을 인신매매로 팔고탈북민들이 중국인들과 결혼해서 가정을 만들었잖아요이번에 강제 북송된 사람 중에는 중국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텐데 그들의 자녀들은요?

 

25년이 지나도 반복되는 비극

 

지난 3 19, 유엔북한인권조사위’(COI) 보고서 발간 10주년을 맞아 주제네바 한국대표부가 주최한 인권 행사장. 증언자로 나선 탈북민 김은주 씨가 발표문을 몇 번이고 들여다봅니다.

 

[김은주] 너무 긴장돼요. 중요한 자린데 실수가 있어서 전달력이 떨어지면 어쩌나 너무 걱정돼요. 잘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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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9일, 주제네바 한국대표부가 주최한 유엔 인권이사회 부대 행사에 초대받아 증언한 탈북민 김은주 씨. 회의장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원고를 수정하며 ‘자신의 메시지가 듣는 사람들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RFA Photo

 

김 씨는 25년 전인 1999, 12살의 어린 나이에 엄마, 언니의 손을 잡고 중국으로 탈북하자마자 인신매매 피해자가 됐고 결국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습니다.

 

북한에서 수용소에 수감돼 고된 강제노동에 시달린 끝에 재탈북한 김 씨는 고민이 많았다고 말합니다. 

 

[김은주] 제가 탈북하고강제 북송되고 나서도 정말 많은 시간이 흘러서 가끔은 ‘내가 너무 과거 얘기만 하는 게 아닌가라며 스스로 돌아볼 때가 있어요.

 

하지만 김규리 씨를 만난 뒤 똑같은 비극이 25년째 반복되는 현실에 계속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용기를 냈습니다.

 

[김은주김규리 씨나 강제 북송 피해자분들을 보면 과거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는 현재라는 걸 다시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그래서 계속 얘기해야 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강제 북송되고, 어려움에 처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그런 마음으로 이번 행사에 오기도 했고요.

 

자신처럼 수많은 탈북민에게는 말 못 할 큰 고통이 있다는 걸 잘 알기에 그는 김규리 씨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고 말합니다.

 

[김은주저도 강제 북송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 동생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너무 공감이 되는 거예요그래서 김규리 씨를 마주 보는 상황이었는데계속 울었어요공감대가 있고또 강제 북송당하는 많은 사람을 보면 북한 정권에 대한 공통된 분노가 있고그 감정이 있어서 그냥 얼굴만 봐도 서로 통하고 이해하는 그런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북한과 중국의적반하장

 

지난 318일, 제네바 유엔 회의장.

 

북한 인권에 관한 논의가 한창인 가운데 유엔 회원국들이 ‘중국을 언급하며강제송환금지원칙을 준수할 것을 지적할 때마다 이를 받아 적는 중국 외교관의 손이 분주해집니다.

 

회의에 참석한 시 취 중국 대표는 강제 북송 문제에 중국이 언급되는 것은 ‘공격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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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권에 관한 논의가 한창인 제네바 유엔 회의장. 강제송환금지 원칙을 준수하라는 회원국들의 발언에 ‘중국’이 언급될 때마다 이를 받아 적는 중국 외교관의 손이 분주해진다. /RFA Photo

 

[시 취중국은 북한 사람들의 중국 입국을 언급한 보고서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그들은 결코 난민이 아닙니다그들은 중국 법과 이민 질서를 위반했습니다우리는 미국을 포함해 다른 국가들의 (강제 북송 문제로 중국에 대한공격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틀 뒤, 인권에 대한 자유 토론이 시작되자 북한의 방광혁 주제네바 대사대리가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작 북한 인권 문제를 집중 토론할 때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가 등장한 것입니다. 

방 대사대리는 준비해 온 4쪽짜리 발표문에서유엔 인권이사회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심각한 인권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미국 11번이나 언급하면서 북한 인권 보고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방광혁북한은 자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결의를 기반으로 한 보고서와 토론 내용을 절대적으로 거부합니다.

 

또 그는 주어진 1 30초 동안 강제 북송된 탈북민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발언 이후 곧장 회의장을 나서는 방 대사대리에게 자유아시아방송(RFA) 취재진은 강제 북송 피해자들의 상황에 대해 여러 차례 물었지만, 그는 황급히 건물을 나서 자신의 승용차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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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북송된 탈북민들의 상황에 대해 묻는 자유아시아방송(RFA) 취재진의 질문세례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방광혁 주제네바 북한 대사대리. /RFA Photo

 

[기자] 지금 강제북송된 탈북민들은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지금 그 600명 탈북민 어디에 있는 상황인가요?

 

[방광혁 대사대리] …

 

[기자] 탈북민들이 지금 계속해서 강제북송의 피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데 그 모든 사실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탈북민들 증언은 들어보셨나요?

 

[방광혁 대사대리] …

 

마치 미리 짜맞춘 듯 닮은 중국과 북한의 적반하장 태도에 탈북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집니다.

 

[김은주사실 강제 북송은 중국에서 시작됩니다중국이 멈추면 그 문제는 해결되거든요그리고 강제 북송을 멈춤으로써 중국에서 인신매매와 성폭행을 당하는 탈북 여성들의 인권 문제도 많은 부분에서 해소될 수 있어요왜냐하면 이걸 (중국에서당하면서도 탈북민들이 말을 못 해요중국 경찰이 나의 존재를 알면 내가 잡힐 거고강제 북송될 거니까 범죄가 발생하고 피해를 당해도 말을 못 하는 거예요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중국과 북한, 두 당사국의 외면에도 이번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는강제 북송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증폭됐습니다.

 

나다 알-나시프 유엔 인권최고부대표도 중국을 포함한 유엔 회원국에게 강제 북송 중단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힘을 보탰습니다

 

[나다 알-나시프모든 국가에 강제 북송을 중단하고 탈북민들에게 필요한 보호와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할 것을 촉구합니다강제 북송은 해당 개인들을 고문임의 구류 또는 기타 심각한 인권 침해의 실제 위험에 처하게 합니다.

 

보고 싶은 동생아, 견뎌... 제발 살아만 줘

 

주말을 맞은 제네바 거리가 관광객들로 붐빕니다.

 

화창한 봄 날씨에 기분이 한껏 들뜬 김규리 씨는 잠시 시간을 내 유엔 제네바 건물 건너편에 있는 국제 적십자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현장음] 일단 ‘Red Cross’, 적십자라는 거에 더 마음이 갔던 것 같아요. 인권에 관한 거잖아요. 우와 여기 이렇게 되어있구나.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김 씨가 마주한 건 ‘가족 간 유대 회복전시장.

 

전시장 입구에 적힌 문구가 그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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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유엔 건물 건너편 언덕에 위치한 국제 적십자 박물관에는 총 세 전시장이 마련돼 있는데, 그 중 김규리 씨가 한참을 서있던 ‘가족 간 유대 회복’ 전시장 앞. /RFA Photo

 

인간은 서로 연결된 사회적 존재다. 이들 간의 유대 관계가 끊어지면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 일부분을 잃는다. 따라서 위기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식을 주고받는 것은 중요하고 또한 필수적이다.’

 

[기자] 박물관 오자마자 이런 내용이 있네요.

 

[김규리] 그러게요, 오길 잘했다.

 

한 줄 한 줄 글을 따라가는 김 씨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오릅니다.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진 수많은 사람의 얼굴 사이로, 보고 싶은 가족에게 쓴 손 편지에 김 씨의 시선이 멈춥니다

 

[김규리편지를 써서 (동생이받을 수 있으면 써주고 싶어요.

 

편지를 통해 동생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김규리] ‘보고 싶다고 하면 울 거 같고, ‘견뎌라는 말밖에는... ‘살아남으라는 말밖에는... 살아남아야 만날 수 있으니까아마 지금 죽을 것만 같을 거예요.

 

 규리 씨는 닿지 못할 편지를 마음으로 수백번 수천번 씁니다.

 

만약 30여 년 만에 동생을 다시 만난다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은 것이 그의 마지막 소박한 꿈입니다.

 

[김규리] (동생을 만나면제일 먼저 먹이고 싶은 게 만두예요엄마가 항상 만들어 주던 만두제 동생 기억에도 그 만두는 항상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그리고 제 손으로 직접 만든 두부초두부가 아닌 모두부로 먹이고 싶어요.

 

김 씨의 휴대전화에는 지금도 동생의 사진과 영상이 가득합니다. 동생이 북송되기 전까지 자주 영상 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습니다

 

[김규리우리가 대화할 때면 항상 이렇게 노래를 불러서 저에게 보내줬어요. 철옥이가 고독하니까 노래를 하면서 푼다고 하더라고요. 재작년에 찍은 비디오예요노래를 너무 잘해요목소리도 너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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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리 씨의 휴대폰에 가득한 철옥 씨의 영상. 규리 씨는 동생이 그리울 때 마다 영상을 본다고 말했다. /RFA Photo

 

휴대전화 속 동생의 노랫소리가 마치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듯 더 슬프게 다가옵니다. 

 

지금 동생은 북한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언제 다시 동생을 안아볼 수 있을까.

 

강제 북송은 지금도 수많은 탈북민과 그들의 가족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 아픔이자 비극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영국에서, 한국에서, 전 세계 곳곳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제네바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강제 북송 중단을 외치는 이유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그 누구에게도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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