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고난의 행군 시절 기근과 꽃제비 생활, 인신매매와 강제 북송, 모진 고문 등 온갖 역경과 인권 침해를 겪었던 탈북 여성이 홀로 미국 워싱턴을 찾아 국무부와 의회, 싱크탱크(연구소) 등에서 북한의 반인도적 범죄를 직접 증언했습니다.
그의 증언을 들은 미 정부 당국자와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 주민들이 매일 겪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노정민 기자가 탈북민 손혜영 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굶주림으로 부모 잃고 , 인신매매 피해자로 전락
2015년 라오스를 거쳐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손혜영 씨.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과 인신매매, 강제 북송, 고문과 수감 생활 등을 견뎌내고 재탈북한 끝에 얻은 소중한 자유였습니다.
1985년 함경북도 단천시에서 태어난 손 씨는 광산에서 일하는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광산이 있던 검덕 지방에는 공식적인 배급 외에도 기름과 신발 등 생활필수품이 정기적으로 공급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이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손 씨의 가정은 극심한 생활고에 직면하게 됐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부모님은 모두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손 씨의 나이는 고작 16살, 약 10년간 이어진 꽃제비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손 씨는 (4월 28일) RFA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손혜영 씨] 사람이 굶어서 죽는 것은 정말 비참하거든요. 얼마나 못 먹었으면 배와 무릎, 어깨가 다 붙거든요. 안의 내장이 다 붙어버리고, 물조차 먹을 수 없는 정도니까 사망하고, 저는 어디 갈 곳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빈집에 혼자 있을 수 없으니까 집을 나와서 방랑 생활을 하게 된 거죠. 어린 나이에 어디 가서 어떻게 먹을 수도 없고, 그 당시에 꽃제비들이 엄청 많았어요.
어린 소녀의 몸으로 10년 동안 꽃제비 생활을 이어가던 손 씨는 광산이 있던 고향으로 돌아가 광석 장사를 하던 중 검열에 걸려 모든 것을 잃고 두 번째 꽃제비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끝에 인신매매로 중국에 팔려 가게 됩니다.
[손혜영 씨] 저를 데려가는 여자가 '얼마 받겠는가', '얼마에 파는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듣기 거북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말했거든요. '언니,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하지 말자. 내가 팔려 가는 몸이라 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했거든요.
중국에 가면 최소한 먹고살 수 있을 줄 알았던 손 씨는 기대와 다른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집은 북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허름한 초가집이었는데, 바닥에는 쥐가 돌아다니고, 천정은 하늘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또 무능력한 남편, 적응하기 힘든 언어와 생활 문화 등으로 삶의 비참함을 느끼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중국 말을 배우고, 아들과 딸을 낳으며 살던 중 2012년 누군가의 신고로 손 씨는 강제 북송을 당하게 됩니다.
보위부에서 모진 구타를 당하고, 기절할 때마다 마약 주사를 맞으며 고문을 받았습니다. 한때는 맹장이 터졌는데, 마취 없이 수술을 받고 다시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공개재판에서 탈북했다는 이유로 2년 형을 선고받은 손 씨.
하지만 수감 생활에서 몸무게가 30kg까지 줄어 왜소해진 체구 덕에 교도소의 철조망을 빠져나와 재탈북에 성공했고, 라오스의 한국 대사관을 거쳐 2015년 대한민국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손혜영] 처음 도착했을 때는 정말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실감이 안 났어요. 제가 북한에서 남한에는 거지가 많다는 걸 많이 배웠기 때문에 정말 내가 남한이 왔는지 실감이 안 났고, 신분증을 받고 집에 갔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제가 아파트에서 못 살아봤잖아요. 그게 정말 좋은 거죠.

북한 주민의 생각과 인식 깨는 데 일조하고파
올해로 한국 생활 7년 차인 손혜영 씨는 한국에서 언어와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획득했습니다.
자신이 한국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돕고 싶고, 언젠가는 요양원을 지어 도움이 필요한 탈북민들을 보듬어주는 것이 꿈입니다.
이와 함께 손 씨는 지금도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참한 현실과 인권 상황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선전 선동에 가려진 북한 주민들의 생각을 깨우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지난 16일 홀로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손 씨는 이번 일정에서 국무부 관리와 영 김 하원의원의 외교정책 담당 보좌관, 한반도 전문가들을 만나 자신이 북한에서 겪었던 경험과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또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북한의 인권 상황을 증언하는가 하면 올여름에 공개 예정인 ‘공산주의 희생자 박물관’의 첫 탈북민 방문자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손 씨를 만난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5월 2일) RFA에 “북한 정권의 인권 침해와 반인도적 범죄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탈북민들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북한 주민들이 매일 겪는 신체적, 정신적 학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손 씨의 증언을 들은 전직 미국 외교관 출신의 말콤 필립 씨도 (5월 1일) RFA에 아직도 북한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준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습니다.
[말콤 필립] 그녀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특권이었습니다.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간 북한 여성이 겪은 끔찍한 이야기는 저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또 이는 단순히 그녀만 겪은 일이 아니라 북한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굶주림과 사회적 탄압, 강제 북송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공유했는데, 이는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녀가 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손 씨는 한국에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 증진을 위한 활동을 계획 중입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소외된 탈북민들을 돌보면서 국제사회를 향해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는 겁니다.
특히 그는 북한 당국의 선전∙선동에 눈과 귀가 가려진 북한 주민들의 생각을 깨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북한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데 앞장서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손혜영] 제가 미국에서 증언할 때 많은 사람들이 북한 정권이 언제 무너지냐고 물어보시는데, 저는 북한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빨리 어떻게 깨우쳐야 할까를 늘 고민합니다. 또 북한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미국 사람들도 알고, 북한 주민들도 아는 날이 온다면 좋겠습니다.
기자 노정민, 에디터 박정우,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