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멘트]반세기가 넘는 남북 분단의 비극 한가운데는 납북자들이 있습니다. 6.25전쟁 때 북으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지만, 전쟁 후에도 하늘과 바다, 해외에서 지속되었습니다.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들은 북한에서는 이방인으로 감시 받고, 남한에서는 잊혀진 존재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납북자 이야기를 네편에 거쳐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첫번째 순서로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웠다”입니다. 보도에 정영기잡니다.
최욱일씨 :새벽인데, 북한 경비정이 우리 배를 찾아 들어왔지요. 경비정이 우리 배를 묶어 가지고 끌고 갔지요.
지금으로부터 48년 전, 동해에서 오징어 잡이를 하던 ‘천왕호’가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던 순간을 당시 사무장이었던 최욱일 씨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많은 선박 중에 유독 ‘천왕호’만을 끌고 간 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습니다.
최욱일 씨 :풍랑은 아니고요. 고기 잡는 시간에 북한 경비정을 만났습니다. 중국 어선도 많이 와 있고, 일본 어선도 많이 와있었습니다.
최 씨가 동료선원 33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강원도 원산항. 이어 선원들은 북한 전역의 탄광, 광산, 농촌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함경북도 김책시의 농촌에 배치받은 최 씨는 고향에 있는 처자식과 친척들을 한시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최욱일씨 :그 거야 말할 수 없죠. 고향을 어떻게 생각 안 하고 살겠습니까? 저는 여기 자식들도 있었고, 처자식이 있었는데 계속 처자식 생각, 고향생각했지요.
최씨와 함께 갔던 ‘천왕호’ 선원 중 남쪽으로 귀환한 사람은 4명 입니다.
최욱일 씨 :동료들 못 만나지요. 모두 뿔뿔이다 다른 지역에 헤쳐 놨는데 어디가 있는지도 잘 모르죠. 만약 안다 해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지 않습니까?
일일천추로 남쪽의 처자식을 그리던 최씨가 탈북한 것은 2007년 1월, 전후 납북자가족모임 최성룡 대표의 도움으로 중국 주재 대한민국 영사관을 거쳐 남한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납북자 사연은 최욱일 씨만이 아닙니다. ‘천왕호’를 타고 최욱일 씨와 북한으로 끌려갔던 고명섭씨와 이한섭씨, 윤종수 씨는 탈북에 성공했지만, 나머지 29명은 북한 어디인가에 남아 있습니다.
평안남도 개천군 농기계 작업소에 배치되어 일하던 윤종수 씨도 2007년 남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초 아내와 외동딸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이들은 탈북 도중 북한 당국에 발각되어, 윤 씨는 혼자 두만강을 건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윤종수씨 :고생이야 말할 것 없습니다. 첫째, 조직 생활이 힘들었고 둘째는 배급을 안 줘서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들었습니다. 가족들과 다 헤어지고 왔는데 고통받는 것이 말할 것 없지요 . 지금은 천왕호 선원들이 한국에 오고 싶어도 감시가 대단할 것입니다.
천왕호 선원이었던 이한섭 씨도 2007년 9월 귀환했지만 북한에 두고 온 가족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는 남쪽의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남한에 내려와서는 또 북쪽의 가족들을 그리며 눈물 짓고 있습니다.
또 다른 납북 사례는 1967년 서해 연평도 앞바다에서 발생했습니다. 당시 조기 잡이를 하던 ‘풍복호’가 북한 해군 경비정에 끌려간 것입니다. 풍복호에는 8명이 타고 있었는데, 훗날 5명의 어부는 돌아왔지만 선주였던 최원모씨를 비롯해 3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현재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인 최원모씨의 아들 최성룡 씨입니다.

최성룡 이사장 :이렇게 바다를 보면 우리 배가 들어오는지 어쩐지 내가 알아요. 멀리서도 우리 배를 돗대만 봐도 알거든. 그런데 우리 배가 안 들어오네. 처음에는 몰랐지요. 그 다음에 5명이 다른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온 거예요. 제 아버지까지 3명이 북한에 억류됐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 난 15살 때니까 아버지가 잡혀갔는지 아버지가 왜 안 오는지 몰랐죠.
그러면 왜 그때 당시 이처럼 납북 사건이 많았던 것일까?
최성룡 이사장 :그때 우리 해군력이 약하고 당시에는 선박에 라침판 밖에 없었어요. 1967년도에는 무전기도 없고 라침판 하나 가지고 작업도 하는 건데, 또 우리나라 해군이나 해경이나 이런 데가 약하고 그러니까 북한 애들이 막 밑으로 와서 끌고 가는 거죠. 어선 납북이 그래서 많았습니다.
북한의 납치 사건은 하늘과 땅 바다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해외에서도 광범하게 이뤄졌습니다.
하늘에서 이뤄진 대표적인 납치 사건은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출발해 김포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YS-11)에서 발생했습니다.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우고 강릉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는 이륙한 지 약 14분 만에 북한 간첩 조창희에 의해 납치되었고, 결국 승객들을 태운 채로 북한 함경남도 정평군에 있는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했습니다.
전 세계가 백주에 대한민국 국민들을 강제 납치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자, 수세에 몰린 북한당국은 두달만에 39명만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끝내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이 내려 보내지 않은 사람들은 여객기 조종사와 승무원, 방송인, 의사 등 전문인들이었습니다.
북한에 억류된 텔레비전 방송 제작자(MBC 프로듀서) 황원 씨의 아들 황인철 씨는 ‘1969년 KAL기 납치피해자 가족회’를 조직하고 아버지의 송환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황인철 대표 : 저희 아버지가 강제 억류가 된다고 하게 되면 저희 아버지가 북한 인민입니까? 대한민국 국민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제네바 협정에 의해서 당연히 전원이 다 송환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6.25 전쟁 시기에도 남한 점령지에서 과학자, 예술인, 공무원 등 전문인들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의 말입니다.
이미일 이사장 : (납북자 문제)는 사전 계획에 의한 조직적인 범죄였거든요. 아주 집단적인 범죄였기 때문에요. 범죄자에게 뭘 인정하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법적으로. 그래도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북한이 문제를 시인을 할지 (고민을 해야 합니다). 북한의 정권이 유지되는 한 저는 (북한이) 시인은 안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문제 제기를 철저히 해야죠.
이 밖에도 중국에서 납치되어 북한에 끌려간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미국 영주권자 김동식 목사,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선교사 등은 북중 국경지역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던 중 북한에 의해 강제 납치된 채 생사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남한에 입국해 한국 국적을 얻은 뒤 북한으로 끌려간 탈북민 김원호, 함진우, 고현철 씨 등도 생사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북한에 지금까지 끌려간 전쟁 납북자는 9만 6천 여명, 전후 납북자는 3천835명이고 현재까지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한 납북자는516명입니다.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의 말입니다.
최성룡 이사장 :끌고 가서 먹는 것도 잘 주고 설득을 해서 당신네들 곧 남한으로 보내줄게. 이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김일성 사상을 교육시키고, 그러면서 북한 주민들한테는 '김일성 장군이 좋아서 의거입북했다'고 체제 선전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납북자 전체를 북한은 '의거 입북자', 그 다음에 국군 포로를 '해방 전사'라고 해요. 내가 모시고 온 납북자 들 증언에 의하면 보내준다고 하다가 안 보내주니까 건물에서 뛰어내려서 자살하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그 다음에 일본의 요코다 메구미나 우리 학생들도 보내준다고 하다가 안보내주니까, 정신적으로 피해가 오는거죠.
이처럼 북한은 납북자들을 데려다 체제선전에 이용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남쪽으로 탈북해 귀환한 납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고향으로 오고 싶어 했는지, 가족을 그리워했는지 세월이 흐르면서 납북자들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속에 희미해지고 있지만 피해 당사자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앵커 멘트] RFA 자유아시아방송 기획 특집, [516명, 당신 어디있나요?] 오늘은 첫번째 순서로"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를 보내드렸습니다. 보도에 워싱턴에서 자유아시아방송 정영기자입니다. 내일에는 제2편 "납북어부, 북한 팔프공장서 노동, 술로 외로움 달래"를 보내드립니다. 여러분의 많은 애청 바랍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
